416화
결혼식까지 고작 사흘을 앞둔 날.
황태후는 황제를 찾았다.
“이런. 지금쯤이면 따뜻한 차 한잔 같이할 시간은 날 줄 알았더니…. 아직도 할 일이 많은 것이야?”
“딱히 걱정할 정도는 아닙니다.”
황제는 대충 그렇게 대꾸하며 매의 눈으로 서류를 처리해나갔다.
조만간 있을 딸아이의 결혼식 때 국정을 쉬려면 그때 할 일을 지금 몰아서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나마 황태후가 엘레인의 결혼식 준비를 도맡고 있으니 이 정도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그는 딸아이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는 천하의 못된 부모가 되거나 국정을 제대로 돌볼 능력도 되지 않는 무능한 황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빨리 오르칼 그 녀석에게 황위를 물려주든가 해야지 원….”
“예전에는 빨리 주기 싫다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더니. 이제는 빨리 주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게야?”
“제 나이 벌써 마흔일곱 살입니다, 어머니. 이 정도면 슬슬 무거운 제관을 내려놓을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렇긴 한데. 으음… 20대 후반 얼굴로 그런 말을 하고 있으니 뭔가 이상하구나.”
“그러는 어머니는 곧 칠순이 다 되어 가는데 여전히 정정하시잖습니까.”
“우리 손녀딸이 어렸을 적에 주었던 산삼 효과가 그리도 크지 뭐냐. 이 정도면 불혹의 나이라고 봐도 속겠지? 으응?”
황태후의 자신감 어린 말에 황제는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저게 마음만은 젊다는 사람의 입장인 건가….
제 어머니이기는 하지만 참으로 못 말리는 분이시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결혼식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습니까?”
“말 돌리기는.”
황태후는 쯔쯧. 혀를 차며 당당하게 팔짱을 꼈다.
“누가 하는 일인데, 당연히 잘 되어가고 있지. 아니, 완벽히 잘 끝났다고 해야 더 알맞겠구나.”
“준비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닐 텐데. 벌써 끝내놓았다는 말씀이십니까?”
“트렌디아 양이 이쪽으로는 꽤 유능해서 말이다. 그 아이의 도움을 좀 많이 받았더니 일이 쉽게 풀리더구나.”
“백화점을 세운 그 여인 말이로군요.”
“그래. 그러니 이제는 결혼식 날짜만 기다리면 된다.”
황태후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호언장담했다.
그에 한 차례 고개를 주억거리던 황제는, 문득 서류에서 시선을 떼고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런데 엘레인은. 조금 힘들어하지 않습니까?”
“으음. 조금 힘들어하는 것 같긴 한데. 원래 결혼식 준비라는 게 그런 거 아니겠느냐? 그래도 결혼식 전까지는 이제 푹 쉬기만 하면 되니까. 그동안 컨디션을 회복할 수 있을 거다.”
“컨디션 회복도 중요하지만, 제가 아는 엘레인이라면 지금쯤 많이 긴장하고 있을 겁니다. 아무래도 처음 하는 결혼식이니까요. 그러니 어머니가 가서 잘 다독여주십시오.”
“안 그래도 너와 이야기를 끝내고 나면 내, 들리려고 했다. 그런데…. 왜 네가 직접 가지 않고 내게 부탁하는 게냐?”
“저는 그런 쪽으로 말주변이 없으니까요. 좀 더 섬세하신 어머니가 격려해주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황제의 말에 황태후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전 같았으면 그런 것 따위 생각하지 않고 제 점수를 따는 데에만 급급했을 녀석이….
놀라움을 삼킨 황태후는 새삼스러운 눈을 거두며 흐뭇하게 웃었다.
“이제 보니, 우리 아들. 많이 성장했구나?”
“크흠. 얼른 안 가 보시고 뭐 하는 겁니까?”
“후후. 까칠하게 굴기는.”
황태후는 제 아들을 귀엽게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난 이만 엘레인에게 가 보마.”
“예. 엘레인을 잘 부탁합니다.”
“그래. 내가 잘 독려해줄 테니 너는 지금 하는 일에만 전념하려무나.”
황제는 대충 손을 휘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쪽을 볼 시간도 없다는 듯한 제스처에. 그녀는 조용히 웃으며 방에서 나왔다.
그리고는 엘레인의 방이 있는 방향으로 곧바로 몸을 틀며 걸음을 옮겼다.
“그간 이리저리 돌아다니느라 녹초가 되었으니, 지금쯤 방 안에 있을 테지.”
어쩌면 아직 단잠에 빠져 있을지도 모른다.
황태후는 귀여운 손녀딸이 잠투정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바삐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앗. 황태후 전하.”
마침 막 문밖으로 나온 앨리스와 마주친 황태후는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안에 우리 아가 있지?”
“네. 그런데 아직 누군갈 맞이할 상태가 아니어서….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제가 바로 황태후 전하께서 방문하셨다고 전해드리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남도 아니고 이 할미랑 만나는 건데 무슨 준비가 따로 필요하겠느냐? 너무 큰 걱정은 하지 말고. 너는 피로 회복에 좋은 차를 좀 준비해 오려무나.”
“아… 알겠습니다.”
앨리스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 멈추고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황태후는 종종걸음으로 멀어지는 앨리스에게서 눈을 떼고 손을 들었다.
그리고 막 노크를 하려던 순간.
“흐아아…. 미쳐버리겠네.”
“…….”
방안에서 들려오는 깊은 한숨 소리에 황태후는 노크를 하려던 손을 우뚝 멈추었다.
이렇게 깊은 한숨 소리에 이어 미쳐버리겠다니.
설마 우리 아가에게 무슨 깊은 고민이라도 생긴 것일까?
심각하게 얼굴을 굳힌 황태후는 잠시 체통을 벗어던지고 문가에 귀를 가까이 갖다 붙였다.
-무우우!
“그래. 네 말대로 내가 너무 예민한 걸지도 몰라. 하지만 말이야. 카르넬과 나의 결혼식을 보기 위해 먼 길을 걸어왔는데 내가 실수로 망쳐버리면 얼마나 실망스럽겠어.”
-무우….
황태후는 문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두 눈을 번쩍 떴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람?
설마하니 손녀딸이 결혼식에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을 줄이야!
지금쯤이면 결혼식을 앞두고 많이 긴장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책임감에 짓눌려 있을 줄은 전혀 몰랐기에 황태후는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후우. 진정하려고 해도 이상하게 진정이 되지 않아. 남은 기간 동안 예행 연습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닐까 걱정돼.”
-무우뭇….
“오버하지 말라고? 아니야. 내가 생각하기엔 이건 절대 오버하는 게 아니야. 지금도 이렇게 떨리는데 결혼식 당일에 가서는 또 얼마나 떨리겠어? 이러다가는 100퍼센트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 거야. 그러면 손님들은 엄청 낙심하게 될 거고. 가족들도 크게 상심하겠지. 특히 아빠랑 할머니의 실망이 아주 클 거야.”
이어지는 말에 황태후는 이마를 짚었다.
엘레인이 대관절 무슨 이유로 저리 자학하는 것인지 깨달은 것이다.
‘나와 아들 녀석이 했던 말이 원인이로구나….’
손녀딸을 생각해서 했던 말이 도리어 커다란 짐이 되어 그 무게에 짓눌리게 만들다니.
황태후는 아찔해지는 정신을 다잡고 문고리를 세게 쥐었다.
이렇게 된 이상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손녀딸의 자신감을 지하 저 끝에서 끌어올려야 했다.
황태후는 엘레인이 더 이상 자학하는 말을 내뱉지 않게 굳게 닫힌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아가야!”
“하, 할머니?”
테이블에 엎어져서 축 늘어져있던 엘레인이 깜짝 놀라서 기립했다.
황태후는 우울함이 덕지덕지 묻은 엘레인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는 성큼성큼 걸어서 다가왔다.
“아가야. 네 고민은 잘 들었다.”
“헉. 설마 다 듣고 계셨던 거예요?”
“응? 아, 그게 어쩌다 보니….”
저도 모르게 엘레인의 시선을 슬쩍 피한 황태후는 다시금 파아란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 아가야. 너는 지금 잘못 생각하고 있단다.”
“네? 무엇을요?”
“너는 정말 잘하고 있어.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아….”
“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잘하려고 하는 것 같구나. 결혼식을 완벽하게 치러야 한다는 의무감에 잡아먹혀서 자기 몸도 생각 못 하고 있어.”
황태후의 말에 엘레인은 천천히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현재 엘레인은 막중한 의무감에 사로잡혀서 결혼식을 완벽하게 치러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가야. 그렇게까지 완벽하게 할 필요는 없단다. 하나뿐인 결혼식이라고 해도. 결국은 너와 카르넬 그 아이와의 사랑을 축하하는 자리이며 일종의 축제란다.”
“축제요…?”
“그래. 축제는 즐기지 않으면 손해이지. 이 할미는 네가 자질구레한 건 신경 쓰지 말고 앞으로 행복할 일만 생각했으면 좋겠구나.”
엘레인은 멍하니 황태후를 바라보았다.
아직까지는 크게 와닿지 않는다는 듯. 곰곰이 생각에 빠진 모습에 황태후는 부드럽게 웃으며 엘레인의 손을 잡았다.
“아가야. 로맨스의 끝은 결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 결혼은 로맨스의 시작이란다. 그러니까 시작이 비록 완벽하지 못하더라도 앞으로의 길이 한참 남았으니 너무 거기에만 얽매이지 말려무나.”
“할머니….”
“후후. 이건 부끄러운 과거지만, 사실 나 또한 완벽함에 얽매이다가 후회한 적이 있단다.”
“네? 할머니가요?”
엘레인이 동그랗게 뜬 눈으로 황태후를 바라보자, 그녀는 먼 과거를 떠올리는 사람처럼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 흠잡을 데 없는 결혼식을 치르는 데에만 신경을 쓰느라 정작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챙기지 못했거든.”
‘내 옆에 있는 사람.’
황태후의 말에 엘레인은 자연스럽게 카르넬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카르넬은 지금 어디서 뭐 하고 있지?
웨딩 촬영 이후로 서로 준비하느라 바빠서 만날 시간이 나지 않았다.
아니.
만날 시간은 있었지만, 내 일을 감당하는 것에만 급급해서 그와 만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말이 더 정확했다.
황태후는 뒤늦게 카르넬을 떠올리고 희게 질린 낯을 하고 있는 엘레인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아가야. 너는 어떠하느냐? 너 또한 나처럼 같은 길을 걷고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더냐?”
“아니요….”
“그래. 우울해 있을 시간에 네 신랑을 챙기는 편이 훨씬 낫지. 그렇지 않느냐?”
엘레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굳게 다짐한 듯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말했다.
“저 잠시 다녀올게요.”
“그래. 잘 다녀오려무나.”
황태후는 씩씩하게 걸어 나가는 엘레인의 등에다 대고 손을 흔들어주었다.
아까 우울했던 모습보다는 백배 천배 낫다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아주 흐뭇하게 웃었다.
***
태양신교 본단.
그곳의 기도실에 들어선 카르넬은 태양신을 본뜬 조각상에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며칠 뒤 이곳에서 엘레인과 결혼식을 올릴 예정입니다.”
창문을 통해 밝은 빛이 쏟아져 내리는 자리.
그 한가운데에 선 채 두 눈을 감고 기도를 올리고 있는 모습은 자못 경건해 보이기까지 했다.
마치 성스러운 성자를 떠올리게 만드는 그 모습에 먼지조차도 숨을 죽이던 그때.
잠깐 다물렸던 카르넬의 입술이 다시금 열렸다.
“엘레인은 아주 귀엽고 사랑스럽습니다. 가만히 바라보기만 해도 심장이 뛰고… 또 미소가 절로 지어지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과 앞으로 평생을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이. 제겐 아주 큰 축복으로 느껴집니다.”
카르넬은 양 볼을 발그레하게 물들이며 속마음을 털어냈다.
만약 태양신이 앞에 있었다면 ‘그건 또 뭔 TMI냐?’면서 짜게 식은 시선을 보낼 법한 주접.
그 이후로도 엘레인에 관한 칭찬을 수도 없이 늘어놓던 그는 한참이 지나서야 본론을 꺼내었다.
“…부디 결혼식을 무사히 잘 치를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카르넬은 언제 주접을 떨었냐는 듯 진지한 얼굴로 감았던 눈을 살며시 떴다.
그리고 미련 없이 몸을 돌린 그는 언제 도착했을지 모를 엘레인과 눈이 정통으로 마주쳤다.
“어… 엘레인?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음. 네가 나에 대한 칭찬을 막 늘어놓을 때부터?”
“…….”
“…….”
한동안 기나긴 침묵이 흘렀다.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게 물들인 카르넬은 괜히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흠흠. 뭔가 쑥스럽네.”
“나는 오히려 그렇게 말해줘서 기분이 좋았는데.”
엘레인은 천천히 손을 뻗어 카르넬과 손을 꼭 잡았다.
이렇게 나를 생각해주는. 그런 소중한 사람을 곁에 두고서, 완벽한 결혼식에 얽매여 있었다니….
지난날의 자신이 너무나도 바보처럼 느껴졌다.
“정말? 그럼 자주 표현해도 될까?”
“당연하지. 앞으론 나도 자주 표현할 테니까 각오해. 알겠지?”
“하하하. 각오할 것까지야. 오히려 나도 바라던 바인걸.”
카르넬은 밝게 웃으며 빈틈없이 잡았던 엘레인의 손에 깍지를 꼈다.
그 손의 온기가 얼마나 따스한지….
그간 겪었던 마음고생이 한꺼번에 휘발되는 것을 느끼며.
엘레인은 그늘 한 점 없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