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불필요한 시간 낭비는 그쯤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이든이 내게서 멀찍이 떨어진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시작에 앞서, 일단 피로 회복을 위한 티타임을 갖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생략해, 필요 없으니.”
“필요 없는 얼굴이 아닙니다만.”
리챠드의 말을 듣고 보니 이든의 낯빛이 좋지 않았다.
눈 밑으로 짙어진 그림자가 그의 피곤함을 대변했다.
‘불면증에 시달린다고 했었던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 있는 걸 보면 두통도 있는 듯했다.
“또 한숨도 못 주무신 거 아닙니까? 그러다 몸 상하십니다.”
“두 시간 정도 잤어.”
“그런 경우가 바로 밤잠을 설쳤다고 하는 겁니다.”
“잡담은 그쯤하고, 본론.”
이든이 잔소리를 들은 체도 하지 않자, 리챠드는 익숙한 일인 양 어깨를 으쓱했다.
“뭐……, 어찌 됐건, 본론으로 들어가서 아빠 수업을 시작해 볼까요?”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아빠 수업.’
네 글자에 온몸 바짝 긴장감이 돌았다.
입양 기준이 엄격한 편에 속하는 비스에서는 ‘입양 신청서’와 별개로 준비해야 하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양부모의 신분증명서.
보육원의 추천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필수로 이수해야 하는 ‘아빠 수업’까지.
문제는 그 ‘아빠 수업’이라는 것이 어지간히 낯간지러운 것들이라는 데 있었다.
이든이 똥 밟은 표정인 걸 보니, 사전 설명을 듣고 온 모양이다.
“각하께는 이미 설명드렸던 것이지만, 아가님을 위해서 다시 한번 설명드리겠습니다.”
“아빠 수업이 몬지 알아요. 입양하기 전에 반드시 수료해야 하는 프로그램이쟈나요.”
“알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리챠드는 조금 놀란 듯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아차차. 네 살짜리 어린애가 알고 있기엔 어려운 개념이려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 최대한 순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얼마 전에 입양 간 언니가 알려 줘써여.”
“덕분에 설명드리긴 수월해졌네요. 아시다시피, 일주일의 임시 보호 기간 동안 각하와 함께 정해진 프로그램을 수행하시면 됩니다.”
“우응, 녜.”
솔직히 말하자면 자신이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든 라이언하트와 아빠 수업이라니!
내게 한결같이 쌀쌀맞은 그의 태도를 봤을 때, 미래가 훤했다.
“걱정하실 것은 없습니다. 아가님께는 그리 어려운 것들이 아니니까요.”
도중에 말을 멈춘 리챠드는 어쩐지 즐거워 보이는 얼굴로 이든 쪽을 바라보며 이어 말했다.
“오히려 다른 쪽이 어렵겠지요.”
아니요, 리챠드. 어려운 건 제 쪽도 마찬가지인걸요.
속으로 조용히 대답을 삼켰다.
보통의 경우 ‘아빠 수업’은 양부모와 입양아 사이를 끈끈하게 만들어 준다.
만약 나도 평범한 어린애였다면 그의 말대로였을 것이다.
양부모와 마냥 즐겁게 추억을 쌓는 시간이겠지.
‘하지만 내 상대는……, 인간에게 원한이 깊은 사자 수인인걸?’
내가 냉혈한으로 소문난 이든 라이언하트와 보통의 경우처럼 마냥 화목할 리가 없잖아!
“샛길로 새지 말라고 했을 텐데.”
저, 저, 까칠한 것 좀 봐.
앞으로 내가 들을지도 모르는 말이라 생각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심란했다.
“그럼 일정이 바쁘니 바로 시작해 볼까요?”
내 입양 생활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할 수 있는 리챠드가 나를 번쩍 들어 올렸다.
“처음이니 일단 비교적 쉬운 것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듯싶…….”
꼬르륵.
느닷없이 내 배에서 우렁찬 소리가 났다.
“…….”
다급히 배를 감싸 쥐고 모르는 척해 보려고 했지만,
꼬르르르르륵!
눈치 없는 배꼽시계 같으니라고.
경박스럽게도 아우성을 친다.
“…….”
“……허.”
흐르는 정적 속에서 이든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여러모로…….”
그는 끝끝내 뒷말을 내뱉지 않고 혀를 쯧 찼다.
뭐……, 뭐요. 왜요! 사람이 배고플 수도 있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저런. 우리 아가님께서 배가 고프신 모양입니다.”
“한 시간 후에 다시 오겠다.”
이든이 방을 나갔다.
나는 리챠드의 가슴팍에 푹, 얼굴을 묻었다.
‘아기가 배고플 때, 울지 않는 것만 해도 엄청난 건데.’
……그것도 모르면서.
‘성질만 고약한 사자 같으니라고.’
괜히 그가 나간 문을 노려보았다.
‘앞으로 내가 저 까칠 대마왕과 잘 지낼 수 있을까?’
여러모로 험난한 아빠 수업이 예상됐다.
* * *
다행히도 식사는 나 혼자 했다.
이든은 아침을 거른다나 뭐라나.
나야 땡큐였다.
적어도 밥을 먹을 때만큼은 눈치 보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였으니 무척이나 마음이 놓였다.
“아가님, 식사는 입에 맞으셨습니까?”
“녜! 완젼 잘 먹었슴미다.”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까지 토마토 미트볼 스튜의 감칠맛이 혀끝에 남아 있었다.
“아직 저택에는 요리사가 없어서 부득이하게 사 온 음식을 대접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저는 괜챠나요.”
리챠드가 손수건을 꺼내 내 입가를 닦아 주었다.
“당분간은 오늘처럼 식사를 외부에서 사 와야 할 것 같습니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요리사를 구해 보겠습니다.”
“무리하지 않으셔도 됨미다.”
나는 정말이지 괜찮았다.
그가 메인 스트리트의 식당에서 사 온 음식이 마음에 들어서였다.
‘보육원에서 지낼 때는 이런 비싼 음식을 먹어 볼 기회가 없는걸.’
보육원 아이들은 고급 식당의 음식을 먹어 보는 게 소원이었지만, 니드 보육원의 재정은 그리 넉넉지 않았다.
우리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포비에 식당의 음식을 먹어 본 건, 작년 가정의 달 연회 때였다.
수녀님께서 그간 모으신 사비를 탈탈 털어서 고급 음식을 사 주셨다.
그럼에도 그녀는 우리에게 자주 사 줄 수 없어서 미안해하셨다.
‘그렇게나 비싼 음식을 이제는 매일매일 먹을 수 있게 되다니.’
말도 안 돼.
새삼 라이언하트의 재력에 감탄하고 있는데,
이든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환기 좀 시키지.”
그는 내 방에 들어오자마자 인상을 찌푸리며 미운 소리를 했다.
“아가님께는 아직 바깥 공기가 차게 느껴지실 겁니다.”
“이불을 덮으라고 해.”
“그러다 감기에 걸리십니다.”
꼼짝 않는 리챠드를 대신해 이든이 내 방의 창문을 다 열어젖혔다.
찬 공기가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읏츄!”
연약한 어린아이의 몸이다 보니까 재채기가 절로 나왔다.
이든은 뭐가 또 불만인지, 삐딱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쓸데없이 약해 빠졌군.”
당신 체온이 원체 높은 거거든?
혼잣말에 울컥한 것도 잠시,
그가 대뜸 제 겉옷을 벗더니 내게 던졌다.
“!”
휙 날아온 두꺼운 옷은 내 머리 위로 안착했고, 어쩌다 보니 나는 그의 옷에 폭 감긴 모습이 되었다.
‘뭐, 뭐야.’
욕을 하든, 챙겨 주든.
둘 중에 하나만 할 것이지…….
사람 헷갈리게 말이야.
“시끄럽게 하지 말고 시작해.”
이든은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내게서 시선을 돌렸다.
“두 분, 시작이 좋으니 첫 미션은 어렵지 않겠군요.”
리챠드가 큭큭, 웃음을 참으며 준비한 것들을 방 안으로 들였다.
커다란 전신 거울.
값비싼 나무로 만든 빗.
진귀한 보석이 박힌 액세서리들.
어린이용 원피스가 잔뜩 걸린 이동용 행거.
마지막으로 정체 모를 마도구까지.
줄줄이 들어서는 범상치 않은 물건들에 괜히 긴장감이 커졌다.
“이게 뭐지?”
“뭐긴요. 아빠 수업의 평가 항목인 의식주(衣食住) 중에서 첫 번째 평가 항목입니다만.”
설마 했는데, 맙소사.
입을 떡하니 벌린 나를 보며 리챠드가 해맑게 외쳤다.
“이름하야, 아가님의 꽃단장을 도와주는 스윗한 아빠―가 녹화할 영상의 제목입니다.”
“녹화?”
“수업 이수 기준에 명시되어 있길, 프로그램을 수행하는 모습을 정해진 마도구에 녹화하여 제출하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적당히 시녀를 붙여 진행시켜.”
이든의 대답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리챠드가 밑줄이 그려진 종이를 그에게 들이밀었다.
“송구스럽지만, 아빠 수업만큼은 직접 이행하셔야 합니다.”
전혀 미안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이든은 입술을 꾹 닫았다.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뜻이었다.
“정 못 하시겠다면, 이외에 다른 선택지를 불러 드릴까요?”
이든이 고개를 까닥였다.
“의식주 중, 의(衣) 항목에서 꽃단장 외의 선택지는…… 직접 목욕시키기, 기저귀 갈기 등이 있습니다만. 어떤 게 각하의 취향이십니까?”
잠깐만요. 뭐를 어쩌고 저째?
이든과 내 몸이 동시에 굳었다.
“……변동 사항 없이 가겠다.”
“탁월한 선택입니다.”
리챠드가 냉큼 빗을 건넸다.
이든은 하는 수 없이 빗을 쥐고서 거울 앞에 섰다.
‘거인이 소꿉장난하는 것 같네.’
저 손에 살육을 위한 검이 아니라, 앙증맞은 어린이용 빗을 쥔 모습을 보게 되다니.
그것도 분홍색 리본이 달려 있는.
요상한 조합에 어쩐지 내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그럼 녹화를 시작하겠습니다.”
달칵.
마도구의 작동 버튼이 눌렸다.
이제 이든과 나는 녹화용 마도구 앞에서 다정한 부녀 사이를 연기해야 했다.
“앉아.”
이든이 전신 거울 앞의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너무 높은뎨요.”
이든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자기가 무엇을 해 줘야 하는지를 모르는 것 같았다.
결국 내가 먼저 나섰다.
“안아 쥬세요.”
“……뭐?”
“저 혼자서는 못 올라가요. 백쟉밈이 안아 쥬셔야 해요.”
나는 그를 향해 양팔을 벌렸다.
이번에도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아빠가 안아 쥬세요.”
별 뜻 없이 호칭을 정정했다.
어차피 녹화를 위한 연기일 뿐이니까 이든도 이해해 주겠지?
“알……겠다.”
줄곧 냉담하기만 했던 음성이 미미하게 떨렸다.
그는 마치 고장 난 로봇 같았다.
뻣뻣한 몸짓으로 다가온 그가 나를 의자에 손수 앉혀 주었다.
“……그럼…… 빗질을 시작하지.”
“녜. 잘 부탁함미다, 아빠.”
머리카락에 닿은 그의 손이 움찔하더니 이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윽, 스으윽.
처음 해 보는 듯 서툰 빗질이었다.
하나 아프지도 않았다.
‘의외로 배려해 주는 면도 있네.’
자다 일어난 상태라 긴 머리카락이 엉켜 있었지만, 조심스러운 빗질 덕에 아프지 않았다.
“원하는 스타일은.”
“아빠가 해 주는 건 다 죠아요.”
우리는 제법 부녀가 나눌 만한 대화도 척척 해냈다.
열심히 빗질로 엉킨 머리를 풀어낸 이든은 액세서리 함에서 적당히 화려한 빨간 리본을 꺼내 들었다.
“이걸로 하지.”
“딸기쨈 색이녜. 마음에 들어요.”
이후로 그는 한참 내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
집중 끝에 리본으로 묶어 마무리하고 나서야 옆으로 비켜섰다.
“됐다.”
거울 속의 내 모습이 보였다.
높게 묶은 양 갈래 머리.
이든이 직접 고르고 손수 묶어 준 붉은 리본이 포인트였다.
“마음에 들어요, 완죠니!”
고개를 움직이자 긴 머리칼과 리본이 함께 살랑살랑 흔들렸다.
여자인 내 눈으로 봤을 때는 처음 묶어 본 어설픈 티가 났지만,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았다.
‘저쪽에서 나름대로 노력해 줬으니까, 이쪽에서도 답례를 해 볼까?’
나는 사랑스러운 아이의 모습으로 영상의 피날레를 장식하기 위해, 그의 겉옷을 걸친 채로 의자를 딛고 일어섰다. 그러고서는 그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고마슴미다, 아빠!”
“…….”
어라?
싫은 소리를 하거나, 나를 밀쳐 낼 줄 알았는데.
어떤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이든의 시선이 묘하게 오랫동안 내게 머물렀다.
이상함을 느낀 리챠드가 마도구의 작동을 정지시키고서 슬며시 그를 불렀다.
“……각하?”
“!”
화들짝 놀란 이든이 팔뚝으로 제 얼굴을 가리며 뒷걸음질쳤다.
“앗!”
덩달아 나는 중심을 잃고 휘청했다.
‘깜짝이야.’
운동 신경이 있어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의자에서 떨어져 다칠 뻔했다.
“놀랐자냐요.”
쿵쿵 뛰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이든을 쳐다봤다.
“……녹화는 이쯤 끝내.”
그는 비스듬히 옆으로 빗겨 서서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수인족들은 체온이 높다더니, 내가 끌어안아서 더웠던 걸까?’
목덜미부터 귀 끝까지 빨갰다.
“백쟉밈, 더워요?”
내 물음에 그는 대답도 하지 않고서 방을 나가 버렸다.
더우면 덥다고 말로 하지, 사람을 왜 밀치고 난리람.
“나는 추워 죽겠는뎨.”
어깨에 걸친 그의 겉옷을 여미며 코를 훌쩍거리는 나를 보곤 리챠드가 웃었다.
“창문을 닫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나간 이든은 늦은 저녁까지 코빼기도 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