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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8/142)

8화

눈이 번쩍 뜨였다.

‘……어라? 나 언제 잠든 거지.’

주변은 온통 캄캄했다.

나는 문득, 이든을 몰래 관찰하다가 까무룩 잠들어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간밤에 쫓겨날 줄 알았는데.

등 뒤가 푹신푹신한 걸 보니, 다행히 그가 나를 그대로 뒀나 보다.

‘근데……, 이건 뭐지?’

어쩐지 무거운 것 같기도 하고.

나는 내 위에 떡하니 얹어진 묵직한 것을 더듬거렸다.

‘엄청 보들보들하네.’

마치 잘 관리받은 짐승의 털처럼 부드러운 감촉이었다.

만지작만지작. 어둠 속에서 한참 더듬거리던 나는 곧 그것의 정체를 알아차리고야 말았다.

그러니까 이건…….

‘사자의 앞발?’

깨닫고 나니 새삼 놀라 버렸다.

“흐으엉?!”

여태껏 아무렇지 않게 만졌던 것이 사자의 발이라니!

나는 그것을 거의 내던지다시피 하고서 침대 끄트머리로 도망갔다.

휙, 날아간 앞발이 포옥, 침대 위로 안착했다.

다행히 사자는 깊게 잠이 든 듯 미동도 없었다.

어둠에 눈이 적응되니 이제야 사자의 모습이 똑바로 보였다.

“헉.”

절로 숨이 집어삼켜졌다.

‘사자를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야.’

아니지, 정정하겠다.

‘인간화가 풀린 이든의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라고.

콩닥콩닥.

나는 요동치는 심장을 부여잡고 그를 관찰했다.

그의 머리칼을 닮아 새카만 갈기.

날카로운 발톱이 박힌 발.

단단한 근육질의 몸.

영락없는 사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동시에 이든이기도 했다.

‘수인족들은 잘 때 본래 모습으로 돌아온다고 했었지, 참.’

책을 통해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음에도 막상 직접 목격하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마터면 심쟝 떨어질 뻔했녜.”

그건 그렇고.

‘……왜 우리가 이렇게 낯간지러운 자세로 껴안고 있는 거죠?’

잠든 그를 깨워서 묻고 싶었다.

“그리고 아조씨……, 불면증이 있다는 설졍 아니여써여?”

잘만 자는구먼 뭐.

멀찍이서 그를 관찰하고 있는데,

“……안 돼…….”

그가 옅은 신음을 흘렸다.

오, 사자의 모습이지만 잠꼬대는 사람 말로 하네?

그 모습이 신기한 것도 잠깐.

갈라진 목소리가 이어졌다.

“……제발. ……안 됩니다.”

악몽이라도 꾸는 걸까?

그가 몸을 비틀었다.

대체 무슨 꿈이기에 저리도 괴로운 표정을 짓는 걸까.

“죽지 마…….”

갈라진 목소리는 거의 애원에 가까웠다.

‘그날의 꿈을 꾸는 거구나.’

덩달아 내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그의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도 아닌데, 그가 지금 꿈속에서 보고 있을 장면들이 눈에 훤했다.

인간들에게 가족을 잃었던 날.

당신에게는 지옥과도 같은 ‘그날’의 꿈을 꾸고 있는 거죠?

“……으…….”

낮은 신음이 나를 이끌었다.

나는 용기를 내서 조심스럽게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살금살금.

혹여나 그의 잠을 방해할까 봐 주의를 기울였다.

“……어머니 제발, 제발…….”

다행히 그는 여전히 꿈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해 줄 수 있는 건 딱히 없었다.

그저 지금 이 순간 내가 기적처럼 그에게 작은 위로가 될 수 있길 바랄 뿐.

“쉬이, 괜찮댜. 괜차냐요.”

그를 살포시 끌어안고 속삭였다.

“백쟉밈 잘못이 아니에요.”

“…….”

작은 손으로 등을 토닥여 주니, 그가 나를 끌어안았다.

“!”

조금 놀라긴 했어도 싫진 않았다.

사자의 품속은 무척이나 따뜻한 데다가 제법 포근했다.

토닥토닥.

한참 동안 계속된 토닥임에 숨소리에서 괴로움의 안개가 걷혔다.

“…….”

“악몽을 무찔러따.”

왠지 모르게 뿌듯했다.

코밑을 스윽 문지르며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숨을 내뱉을 때마다 콧바람에 흔들리는 검은 갈기를 보니 괜스레 웃음도 났다.

“인상 안 쓰니까 얼마나 보기 죠아, 이 아조씨야.”

으흥흥, 실컷 웃을 만큼 웃은 나는 이쯤하면 됐지 싶어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다.

이대로 아침을 맞이했다가는 내게 또 까칠하게 굴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나를 끌어안은 그의 팔에서 도통 힘이 풀리지 않았다.

“으응?”

어째 빠져나가려고 할수록 더 꼭 끌어안는 것 같은 건, 그냥 내 느낌 탓이라고 해 줘.

나는 내게서 그의 앞발을 떼어내기 위해서 손을 뻗어 허우적거렸다.

“좀 놔 봐 바요, 백쟉밈.”

무심결에 뻗은 손이 무언가에 닿았다.

“……어?”

방금 이 감촉 뭐야. 나도 모르게 멍하니 잠든 이든을 바라봤다.

복슬복슬한 앞발.

‘그 밑의 이건 설마 그거……?’

홀린 듯이 그런 생각을 해 버렸다.

‘딱 한 번만 만져 볼까?’

스스로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본능에 충실한 손이 먼저 움직였다.

그의 앞발을 잡자,

“흐어어어!”

발가락 끝에서부터 이름 모를 쾌감이 타고 올랐다.

“완전 쨩이댜.”

말랑말랑한 젤리.

쫀쫀하면서도 부드러운, 탱글탱글하면서도 묘하게 중독성 있는 마약 같은 촉감!

나는 거의 무아지경이 되어 그의 앞발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역시 고양이 쩰리는 늘 짜릿해, 새로워, 완젼 최고야!”

뭐, 엄연히 따지자면 그는 사자지만, 어쨌든 비슷한 맥락인 거잖아?

대형 고양이의 젤리에 취한 내가 계속해서 만지작거리자,

“음…….”

이든이 잠결에 뒤척였다.

살짝 미간이 찌푸려진 것을 보고 정신이 번뜩 들었다.

‘헉. 이러다가 깨겠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손은 자꾸만 의지와 다르게 움직였다.

만짓. 만짓 만짓.

‘아. 그만 만져야 하는데….’

말랑.

‘그만……. 이러다가 정말 깰라.’

말랑 말랑.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만져 볼까? 진짜 마지막으로.’

말랑 말랑 말랑.

아아, 더는 손을 멈출 수 없었다.

내 뇌는 이미 감촉에 지배당하고 말았다. 의지와 상관없이 본능에 충실한 손을 막을 방도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이걸 오또캐 그만둬…….”

말랑 말랑 말랑 말랑.

나는 양손까지 동원해서 그의 젤리를 마구 만지고 있었다.

“……으음…….”

그가 또다시 뒤척였다.

여기서 더 했다가는 진짜로 깰 것 같았지만, 마음속에 차오르는 충동을 억제하기 힘들었다.

“……마지막으루, 진쨔 마지막으로 따악 한 번만 하는 고야.”

스스로에게 엄포를 하며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앞발을 잡았는데.

어라, 이게 무슨 냄새지?

킁킁.

묘하게 이끌리는 냄새를 따라 열심히 킁킁거리던 나는 이내 경직되고 말았다.

……큰일 났다.

‘아빠님 발에서 꼬순내가 난다.’

그것도 엄청나게 중독적인.

“아, 망해따.”

이마를 부여잡았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내 사랑스러운 두 콧구멍은 열렬히 제 할 몫을 해내고 있었다.

킁킁. 킁킁킁.

꼬순내 주제에 어찌나 중독성 있는지!

머리로는 ‘놓아야지’ 생각하는데, 도무지가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최선을 다해 킁카킁카했다.

킁킁. 킁킁킁. 킁킁킁킁.

얼마만큼의 시간 동안 그랬을까.

“……뭐 하는 거지.”

결국, 사자가 잠에서 깼다.

“헙.”

놀라서 몸이 경직된 와중에도 말랑거리는 그의 앞발은 놓지 못했다.

내가 거대 젤리를 소중히 끌어안으니 그의 마른 미간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뭐 하는 거냐고, 물었다.”

서슬 퍼런 핏줄이 솟아오른 관자놀이를 보고 있으니 저절로 입술이 움직였다.

“꼬순내…….”

“뭐?”

“꼬순내 젤리 소듕해. 절대 못 잃어…….”

내 애처로운 표정에 그가 ‘허.’ 하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 * *

잠시 후. 나는 환히 밝혀진 침실에서 이든의 눈초리를 묵묵히 받아내고 있었다.

꼭두새벽부터 이게 뭐람.

오랜 침묵 끝에 그가 질문했다.

“그러니까. 내가 수인족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고?”

딱히 숨길 것도, 숨길 수도 없었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그 예지몽 능력인 건가?”

“그거 말고도 아는 건 많아여.”

“다 읊어 봐.”

“리챠드가 멍멍이 수인이라는 것도, 백쟉밈이 에덴 제국에 오신 이유도 알고 이써요.”

줄줄이 말할 때마다 이든 입술이 굳어졌다.

“내 예상보다 많이 알고 있군.”

“아무한테 말하지 않고 쉿! 비밀로 할 꼬에요. 약속할게요.”

“당연하지. 그러지 않았다가는 내 손에 죽을 테니까.”

바짝 날이 선 시선이 따가웠다.

“오늘은 없었나?”

“녜?”

“그 예지몽이라는 거. 오늘에 관련한 꿈은 없었냐고 묻는 거다.”

아. 작게 탄성을 뱉은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헤헤 웃었다.

“믿어 쥬시는 고에요?”

“묻는 말에나 대답해.”

치. 하여튼 까칠하기는.

나는 입술을 연신 삐죽거리며 그가 원하는 대로 대답을 내놓기 시작했다.

“혹쉬, 입양 신청서 받으러는 언제 가실 생각인뎨여?”

“오늘 오전에.”

다행이다.

라이언하트가 입양 신청서를 발급받기 위해 관공서에 들르는 장면은 책에 제법 자세히 묘사됐었다.

나는 내심 안도했다.

말할 거리가 생겼다는 건, 그에게 내 필요성을 증명하는 것과 같았으니까.

내 목숨이 연장된 셈이다.

“그럼 오늘 벌어질 일을 알고 이써요.”

자신감이 붙은 나는 두 주먹을 감자처럼 야무지게 말아 쥐며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린 오늘 뚝배기 사냥꾼이 돼야 해여.”

“……뭔 사냥꾼?”

전혀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으음, 이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곰곰이 머리를 굴리며 그가 이해하기 쉬운 방향으로 물꼬를 텄다.

“에덴 제국을 꽉 쥐고 있눈 세도가 가문에 대해서는 알고 있쬬?”

“그놈들이 왜.”

복수를 빚진 자들이라 그런가.

그의 표정이 금방 진지해졌다.

“사실 그 세 가문들, 그렇게 역사 깊은 가문도 아니쟈냐요. 그런데 그들이 오또케 기존 귀족 세력을 밀어내고 자리를 잡았다구 생각하세여?”

“대신전을 뒷배 삼은 거겠지.”

말귀가 밝아서 설명하기 쉽겠네.

나는 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조금 더 직설적인 설명을 덧붙였다.

“인간관계는 다 기브 앤 테이꾸에요. 모리스 대신관에게 충성한 대신에 권력을 얻은 거죠.”

이 소설 속 또 다른 악당으로 거론되는 모리스 대신관.

그는 니드 보육원에 화재를 내라 명령했던 나의 원수이기도 했고, 동시에 이든의 부모님 목숨을 앗아간 철천지원수이기도 했다.

모리스는 늘 교묘하게 뒤에서 사람을 조종하는 자다. 그런 놈은 웬만큼 궁지에 몰리지 않는 이상 직접 움직이지 않는다.

‘수족으로 부리는 세도가 삼인방을 꺾어 놓으면, 그는 팔다리가 묶인 거나 다름없어.’

나는 짧은 다리를 당당히 꼬았다.

“우리는 내일 모리스의 발을 묶을 꼬에요.”

“모리스의 발이라면, 누굴 뜻하는 거지?”

이든이 심각하게 물었다.

“그건 말이죠…….”

나 역시 덩달아 심각해져서 대답해 주려는데,

꼬르르륵.

눈치 없는 배꼽시계 같으니라고.

“…….”

그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머쓱해진 나는 홀쭉해진 배를 쓰다듬으며 헤헤 웃었다.

“오늘 아침은 몰까요?”

“……하아.”

해맑은 내 질문에 이든이 허탈한 숨을 내뱉었다.

“뒷얘기는 이따 듣지.”

그가 침대맡의 설렁줄을 잡아당겨 리챠드를 호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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