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리챠드가 사 온 포비에 식당의 스튜 냄새가 다이닝 룸을 가득 채웠다.
“오히려 좋네요. 아가님께서 모두 알고 계신다니.”
“팔자 좋은 소리나 하고 있군.”
이든이 아무리 빈정거려도 리챠드는 변함없이 웃는 낯이었다.
“누군가에게 비밀을 만드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으니까요. 안 그런가요, 아가님?”
“우음……. 그러쵸?”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의아했다.
대부분의 수인족은 인간에게 자신의 정체를 들키기 싫어한다.
‘그랬다가는 인간의 사냥감이 되기 십상이니까.’
이든처럼 최상위 포식자에 속해 있더라도, 보통은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다. 불필요하게 적을 둘 이유는 없으니 말이다.
‘그냥 내가 어린애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건가?’
또 그렇다고 생각하기엔, 리챠드의 기분이 묘하게 좋아 보였다.
“음식은 괜찮습니까?”
“녜, 맛이써요.”
나는 스튜를 한입 퍼먹으며 대답했다.
“더 드시고 싶으시면 말씀하세요. 많이 사 왔습니다.”
“고맙슴미다.”
커다란 그릇에 담긴 스튜를 국자로 휘젓던 리챠드가 대뜸 이든에게 말을 붙였다.
“간만에 푹 주무셨나 봅니다. 낯빛이 매우 좋으십니다.”
“잡담은 그만하고 할 일이나 해.”
이든은 괜스레 헛기침을 하며 신문을 뒤적였다.
“각하도 한 그릇 드시렵니까?”
“됐다.”
“계속 식사를 거르시고 대충 때우시면 몸이 상할 겁니다.”
“먹고 환기나 시켜.”
잔소리는 더 듣기 귀찮다는 듯이 이든이 손을 휘저었다.
그러고 보니…….
식탁에 음식은 나를 위한 것뿐.
이든의 것은 없었다.
‘평소에 밥도 잘 안 먹는 건가?’
나는 접시에 코를 박고서 힐끔힐끔 이든을 훔쳐봤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리챠드 말대로 건강 망가지기 딱이네.’
내심 신경이 쓰여 수저질이 느려질 즈음,
“대충 배가 찼나?”
이든이 내게 물었다.
“녜. 잘 먹었슴미다.”
“하던 얘기나 마무리하지. 모리스의 발이란 게 누굴 뜻하는 거지?”
“아아, 무시깅.”
입 안에 든 미트볼 때문에 오물거리느라 발음이 뭉개졌는데, 그가 용케도 알아들었다.
“무식이?”
“있써요. 무조건 힘으로만 다 해결하려구 하는 사람.”
“다페 남작가를 말하는 것인가?”
이든이 맞은편 의자에 앉아 본격적으로 질문했다.
“알고 계시네여?”
“그쪽에 유감이 있는 자가 있으니까.”
라이언하트가의 ‘그 호위 기사’를 말하는 건가?
바로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따가 무식이를 만나게 될 꼬에요.”
“요즘 황궁 경비 강화로 다페 남작가는 바쁘다고 들었다.”
“우리 내기할래여?”
“네 예지몽 능력이 진짜라는 걸 증명하겠다는 건가?”
“녜.”
당당한 대답에 그가 낮게 웃었다.
“좋다.”
“오늘 관공셔에서 무식이가 저를 해치려고 할 꼬에요.”
“이번에도 정말 네 말대로 된다면 살려 주지.”
이건 기회였다.
그에게서 의심의 뿌리를 뽑아내고, 확실히 내 편으로 만들 기회.
* * *
조금 뒤, 우리는 마차를 타고 메인 스트리트로 향했다.
빼곡히 줄지어 서 있는 가문비나무를 따라 달리기를 한참,
머지않아 반질반질 돌이 깔린 도로가 나타났다.
마침내 비스의 중앙이었다.
“도착했습니다.”
라이언하트 가문의 마차는 미끄러지듯 관공서 앞에 멈춰 섰다.
‘생각보다 엄청 주목받네.’
마차 창 너머로 행인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라이언하트 가문 아니야?”
“애를 입양한다던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네.”
“왜 안부인은 들이지 않고 입양을 하는 거지?”
“진짜 비스에 눌러앉을 생각인가 보지. 후계자는 정식으로 부인을 들인 뒤에 차차 낳으면 되는 거고.”
당사자 몰래 쉬쉬하며 떠드는 말은 멈출 줄 몰랐다.
오늘 처음 듣는 나조차도 벌써부터 진절머리 나는데.
그는 오죽할까.
새삼스레 그가 안쓰러워졌다.
끼익.
리챠드가 마차 문을 열어 줬다.
“그럼 다녀오십시오.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우응. 다녀오겠슴미다, 리챠드.”
나는 리챠드에게 배꼽 인사를 한 뒤, 이든을 돌아봤다.
그러자 그가 퉁명스레 물었다.
“왜.”
“안아 쥬세요.”
“뭐?”
“귀찮으시면 그냥 쩜프하께여.”
당장에라도 뛰어내릴 자세를 취하니, 그가 덥석 나를 안아들었다.
“쓸데없는 짓 좀 하지 마.”
그의 언성이 평소보다 높았다.
……깜짝이야.
그냥 표정 좀 푸시라고 조금 장난친 것뿐인데.
답지 않게 예민한 반응에 심장이 다 콩닥거렸다.
‘무슨 일이 있었나?’
표정은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지만, 왠지 어딘가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화났나?’
딱히 화날 일도 없었는데 말이야.
하여튼 간에 대형 고양이님의 변덕스러운 마음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얌전히 있어.”
이든이 나를 품에 안은 채로 관공서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당연히 시선은 우리의 몫이었다.
“라이언하트 백작이다.”
“저 아이가 입양한다던 그 아이인 건가?”
관공서 직원들이며, 볼일이 있어서 온 자들이며, 너 나 할 것 없이 우리에 대해서 수군거렸다.
우리는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그들의 안줏거리가 됐다.
“형식상 하는 입양인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야?”
많은 목소리 중, 왜 하필 그 목소리만 유독 또렷하게 들렸던 걸까?
어쩐지 싱숭생숭했다.
‘우리가 남들 눈에는 제법 부녀처럼 보이나?’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슬쩍 그의 가슴팍에 고개를 묻었다.
“피곤하군.”
나한테 한 말인가?
그의 혼잣말에 나는 슬며시 고개를 올려 그를 봤다.
“인간들이 너무 많아.”
“신청서만 받아 오면 되니까, 쪼금만 힘내세여.”
“역겨운 냄새가 들끓는다.”
낮게 울리는 목소리 속에서 인간을 향한 증오가 느껴졌다.
‘나는 많이 봐주고 있던 거였네.’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다음 분 들어오십시오.”
때마침, 관공서 직원이 민원실의 문을 열고서 이든의 차례를 알렸다.
“저는 여기에 내려 쥬세여.”
“여기서 만난다는 건가?”
“녜. 곧 올 꼬에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백쟉밈은 일 보고 오세여.”
“…….”
말 끝나기 무섭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민원실로 들어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웬일인지 이든은 꼼짝을 안 했다.
“다음 분?”
재차 관공서 직원이 그를 찾았다.
나는 그저 뚫어져라 나를 내려다보고만 있는 그에게 물었다.
“저한테 할 말이 있으세여?”
“아니.”
“그럼 왜 그로케 보셔요?”
별안간 그가 내 볼을 덥석 잡더니, 무심한 얼굴로 마구 만지작거렸다.
“묻었다. 토마토 소스.”
“이겅 땅강 쥬능 게 앙닝 공 강퉁댕.” (이건 닦아 주는 게 아닌 것 같은데.)
납작하게 눌린 볼에서 발음이 뭉개져서 흘러나왔다.
한껏 내 볼을 만진 그가 이내 손을 뗐다.
“다녀올 테니 이상한 짓 하지 말고 얌전히 기다려라.”
“녜…….”
내가 이상한 짓을 할 게 뭐가 있다고.
그에게 또다시 테러(?)당하지 않기 위해서, 내 몰랑몰랑한 두 볼을 감싸 쥐었다.
“조심히 다녀오세여.”
“빨리 못 보내서 안달인 건가?”
이든이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와중에 등 뒤에서는 관공서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다음 분? 다음 차례 분 안 계시나요?”
나는 관공서 직원을 가리켰다.
“그러다가 순서 지나가여.”
“……다녀오지.”
그가 느릿한 걸음으로 민원실 안으로 들어갔다.
‘저 아조씨가 갑자기 왜 그런데.’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 후로 이든이 돌아올 때까지, 오로지 저들의 관심은 나 혼자 감당해야 했다.
내내 이것저것 묻고 싶어서 안달 났던 이들이 입술을 달싹거리며 슬금슬금 내 쪽으로 다가왔다.
“저기…….”
“멍멍이 놀이 해야지. 멍! 멍멍!”
그들과 말을 섞을 생각은 없었다.
나는 말을 붙여오는 이들을 상대하지 않기 위해 아무 말 대잔치를 시작했다.
“얘야?”
“멍멍! 개소리댜, 개소리. 멍멍!”
더러운 똥은 피하는 게 상책이지.
어차피 이상한 소문만 전할 이들이었다.
한참을 피해 다니니 그제야 나를 향한 그들의 관심이 사라졌다.
휴. 끈질기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이제 슬슬 올 때가 됐는데.’
머지않아 나타날 등장인물을 떠올리며 주위를 살피는데, 때마침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우당탕탕!
무언가 와르르 쏟아지는 소리와 함께 여자의 비명이 들렸다.
“어머!”
누가 나타난 건지는 뻔했다.
‘거참, 무식이답게 등장하네.’
고개를 쏘옥 빼고 소란의 근원지를 바라봤다.
잔뜩 술에 취한 덩치 큰 남자가 여기저기 시비를 걸고 있었다.
“뭘 봐. 눈들을 확!”
교양 없이 무식한 행동을 보이는 저자가 바로, 에덴 제국을 주름잡는 귀족 중 하나.
몬조거 다페 남작이었다.
‘이름값 하네.’
그는 빈 술병을 허공에 위협적으로 휘두르며, 눈이 마주치는 이들마다 시비를 걸고 있었다.
“눈 안 깔아? 엉?”
“나, 남작님. 여,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관공서의 늙은 남직원 하나가 용기 있게 나섰다.
하지만 그것은 도리어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됐다.
“뭐라고? 너, 이 새끼가 지금 나한테 지껄인 거야?”
“아이고! 남작님!”
다페가 그의 멱살을 붙잡았다.
에덴 제국에서 힘만큼은 다페 남작에게 견줄 자가 없다고 했던가.
다페가 자기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노인을 장난감처럼 쥐고 흔드는 동안, 구경꾼들은 혹시라도 제게 불똥이 튈까 봐 쉬쉬하는 분위기였다.
“이리 소란을 피우신다면, 경비병을 부를 수밖에…….”
“경비병? 감히 내 앞에서 경비병 나부랭이를 부르겠다고?”
황실 경비의 총책임을 맡고 있는 다페 남작 앞에서 경비병을 운운하다니.
지켜보던 나는 혀를 쯧 찼다.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그렇지.
저 남직원분은 생각을 잘못해도 한참은 잘못했다.
“이것들이 나를 아주 우습게 보네. 나 다페 남작이야! 어? 몬조거 다페, 몰라?”
대노한 다페가 길길이 날뛰었다.
“나, 남작님. 제발 신사답게…….”
“너 이 새끼, 나 지금 무시하는 거지?”
아이코, 저런. 그건 다페 남작의 역린인데.
아니나 다를까, 다페가 씩씩거리며 온갖 욕지거리를 뱉어 냈다.
“사, 살려 주십시오.”
남직원이 잔뜩 움츠러든 채 목숨을 구걸했다.
“어떡해. 이러다 큰일 나겠어.”
“누가 좀 가서 말려야 하는 거 아니야?”
쑥덕거리는 이들은 많았지만, 어느 누구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
한 번 눈 밖에 난 자들은 끝까지 물고 넘어진다는 다페 남작의 패악질이 워낙 유명해서였다.
“파리 목숨 주제에 감히 이 몬조거 다페 님을 무시하다니.”
죽고 싶어? 그리 협박하는 다페의 눈은 반쯤 이성을 잃어 있었다.
스으윽.
꽉 쥐어진 그의 주먹 위로 핏줄이 불끈불끈 솟은 순간,
‘지금 나서면 되나?’
앞으로 한 발짝 나서서 외쳤다.
“멈쵸어어어어!”
“!”
모든 시선이 내게 향했다.
‘좋아, 이제 멋지게 구해 줘야지.’
이내 나는 아기가 낼 수 있는 최대의 속도로 다페 남작을 향해 달려갔다.
내 의욕이 너무 과했던 걸까.
몇 발자국 떼지도 못했는데,
턱!
나는 스스로 내 발에 걸려 중심을 잃고 말았다.
‘어라?’
기우뚱 넘어간 몸이 총알처럼 날아가다시피 했다.
“흐아아아아!”
짧은 찰나에 스친 생각은 하나였다.
‘다치기 싫어!’
본능적으로 나는 무작정 손에 닿는 것을 꽉 쥐었다.
‘잡았다.’
그것이 다페 남작의 바짓가랑이라는 것을 꿈에도 모르고서!
스르르륵.
툭.
다페 남작의 바지가 훌렁 벗겨지고 말았다.
“헉!”
“세상에!”
구경꾼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뭐, 뭐야!?”
당황한 다페 남작이 남직원의 멱살을 놓고서, 허둥지둥 흘러내려 간 바지를 주워 입었다.
이럴 계획은 아니었다만.
K—유교걸로서 웃어른 알기를 아주 똥같이 아는 놈에게 한 방 먹여 줄 수 있어서 내심 통쾌했다.
“너……. 너 이 자식……!”
“앗, 죄송함미다. 모르고 힘 조절을 실패해 보려써.”
나는 여전히 씩씩거리는 그를 보며 해맑은 얼굴로 덧붙였다.
“볼 것뚜 없구만요,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