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142)

10화

“……풉.”

구경꾼들 틈에서 기어코 누군가 비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어떤 자식이야. 어떤 자식이 감히 나 다페를 비웃어!”

가을철 낙엽처럼 얼굴색이 울긋불긋해진 다페가 검을 휘둘렀다.

주변은 찬물을 뿌린 듯 조용해졌지만, 구경꾼들의 얼굴에 서린 웃음기마저 숨길 순 없었다.

“이 코흘리개 때문에……!”

다페 남작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가만, 이거 지금 보니까…….”

그는 눈을 게슴츠레 좁히며 자신을 째려보는 내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 술 냄새.

역한 냄새를 풍기는 콧바람에 인상을 찌푸리니 그가 비뚜름하게 입술을 끌어 올렸다.

“아직 이 몸이 누구인지 모르는 모양이야?”

다페 남작이 하얀 백태가 덕지덕지 껴 있는 혀를 날름거렸다.

도저히 비위가 상해 보고 있을 수 없어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설정대로네.’

약한 사람들 상대로 힘자랑하기 좋아하는 새끼.

소설 속 그는 강한 자들 앞에서는 설설 기고, 약한 평민들은 괴롭히는 치사한 놈이었다.

세도가 삼인방 중 홀로 ‘남작’ 작위인 그는 자격지심이 심했다.

열등감은 곧 약한 자만 골라서 괴롭히는 것으로 표출됐다.

그는 자기보다 약한 자를 발밑에 꿇리는 것에 쾌감을 느꼈다.

‘그게 얼마나 한심하고 비열한 짓거리인지 알려 주겠어.’

그에게 본때를 보여 주고 싶었다.

“앞으로 비스에서 편히 생활하고 싶다면 이 위대하신 다페 남작님에게 예를 갖춰라!”

나는 다페 남작을 향해 콧방귀를 꼈다.

“미쳤오? 재활용도 안 되는 쓰레기한테 내가 왜.”

“뭐? 이게 미쳤나?”

다페 남작의 언성이 높아졌다.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진 주변에서 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어떡해, 다페 남작 꼭지 돌았어.”라고 속닥거리는 게 들렸다.

‘아니야, 아직 멀었어. 더 자극해야 해.’

심호흡하며 발에 힘을 줬다.

“감히 나, 다페를 무시해? 말귀만 알아들으면 예뻐해 주려고 했더니!”

“너 같은 쓰레기한테 예쁨 받고 싶지 않고든!”

아까부터 눈에 거슬렸던 그의 턱주가리를 발로 힘껏 차 주었다.

“크윽!”

어린애의 발길질이었지만, 방심하고 있던 상황에서는 강력하게 먹혀들었다.

중심을 잃은 다페가 나를 놓쳤다.

“……아, 아기를 받아!”

누군가의 외침 덕분에 나는 바닥에 곤두박질치는 불상사 없이 무사히 다페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저년이 감히!”

이성의 끈이 끊어진 다페의 고함을 기점으로 추격전이 시작됐다.

“당장 이리 안 와?”

“싫오!”

홀은 넓었고 구경꾼들은 많았다. 그 말은 즉, 상대적으로 몸집이 작은 내가 도망치기 유리하다는 뜻이었다.

“잡아! 저년을 잡으라고!”

나는 아슬아슬하게 사람들 다리 틈 사이로 도망치며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

“다들, 꺼져!”

자꾸만 눈앞에서 나를 놓친 다페가 결국, 손에 쥐고 있던 술병을 사람들 사이로 던졌다.

챙그랑!

“사람 살려!”

놀란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건물을 빠져나가기 바빴다.

‘저 미친놈. 기어이 날뛰기 시작했네.’

순식간에 홀 안은 텅텅 비었다.

“이제 위기에 빠진 아기를 구해 줄 백마 탄 왕자님은 없는 거 같은데 이걸 어쩐다?”

“그래서 모. 오쪼라고.”

“이제라도 순순히 이리 오면 이 몸께서 특별히 봐주마.”

다페가 여유를 부렸다.

그의 말대로 나를 도와줄 어른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내 치트키는 내가 직접 만들 생각이니까.’

작가는 엿이나 먹으라지.

“죠은 말로 할 때 꼬져라.”

“저년이 끝까지…….”

근육 덩어리가 내 쪽으로 달렸다.

“!”

다급히 도망가려 했지만, 눈 깜짝할 새에 그가 내 앞길을 막아섰다.

“!”

“어디부터 알려 줄까. 응? 이 위대한 다페 남작님의 업적? 다페 남작가를 칭송하는 평민들의 민요?”

다페는 악취가 나는 거북한 주둥이로 나불거리기 시작했다.

“저리 가!”

“너는 특별히 이 다페 남작님을 칭송하는 찬가를 부를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

헛소리하고 자빠졌네.

나는 비열하게 웃으며 거리를 좁혀오는 그를 노려보았다.

그를 피해 도망가다 보니 어느덧 등 뒤로는 벽이 가로막혀 있었다.

젠장.

더는 도망칠 곳이 없었다.

“시러!”

“이제야 머리가 조금 굴러가는 모양이지? 하지만 걱정 마라! 이 다페 남작님께 사상 교육을 받는 것은 천운이니까!”

마침내 그가 나를 붙잡으려는 때였다.

“아가님!”

멀지 않은 곳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챠드!”

울컥 차오른 것이 뱉어졌다.

근처 시장에서 장이라도 보고 있었는지, 리챠드는 양손 가득 들고 있던 짐을 내팽개치고 달려왔다.

“이 무슨 무례한 짓입니까.”

리챠드가 순식간에 달려와 나를 품에 안아 들었다.

‘……살았다.’

안도감이 밀려오자 구슬구슬 빚어 놓았던 눈물이 후드득 흘러내렸다.

“그년이 네 딸년이라도 되냐?”

“신사답지 못한 언행이군요.”

“허? 이 새끼나 저 새끼나 나를 아주 개똥만도 못하게 보는구먼.”

“그건 제 똥에 대한 모독입니다만.”

리챠드가 심히 불쾌하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

“이 이상으로 우리 아가님을 더 위협하면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다페는 리챠드를 죽일 듯이 노려봤고, 리챠드 역시 지지 않았다.

당장 유혈 사태가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팽팽한 신경전이 이어졌다.

“내가 오늘 네 두 녀석에게 위대한 다페 남작의 역사에 대해서 톡톡히 알려주마.”

“이리 소란을 일으키시면 뒷감당을 어찌하시려고요.”

“상관없어. 내 뒷감당은 얘가 하거든.”

다페가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들 기세로 검집을 잡았다.

리챠드는 그 위협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후회할 짓은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리챠드의 말이 통했던 걸까.

다페 남작은 거친 콧김을 뿜어 대며 검 손잡이를 꽉 쥐었다.

‘답지 않게 머리를 굴리네.’

다혈질에 욱하는 성격을 가진 몬조거 다페에게도 나름 머리를 굴릴 때가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상대가 귀족인 것 같을 때.

상대가 ‘던버르레 공작가’나 ‘리아노 공작가’에 줄을 댄 ‘고위 귀족’이라면 꽤 골치 아플 테니까 말이야.

그렇기에 섣불리 검을 뽑아 들지 않는 것이었다.

‘일단은 리챠드의 차림새가 꽤 있는 집안 같아 보일 테니까.’

다페는 천천히 눈을 굴려 리챠드를 가늠해 보고 있었다. 그가 자신보다 우위에 있는 자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아가님, 어찌할까요.”

리챠드가 내게 속삭였다.

“……여기서 싸우면 안 뎨요.”

“우리 아가님께 이리 무례했는데도 말입니까?”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살며시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어쩔 수 업써.”

물론 나도 저 못돼 처먹은 악당에게 정의 구현의 쓴맛을 끝까지 보여 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참아야 할 때다.

아직 내 입양이 통과된 것도, 이든의 귀화가 허락된 것도 아니다.

이든의 입지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다페와 정면으로 싸움이 붙어 버리면 곤란했다.

‘저래 보여도 다페 남작은 제국을 수호하는 검사들 우두머리니까.’

“다음에 혼내 죠요, 우리.”

“그럴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일을 키울 필요는 없었다.

복수의 때는 머지않았다.

나와 라이언하트 가문이 에덴 제국에서 무사히 자리 잡았을 때.

‘그때가 네 제삿날인 줄 알아라, 몬조거 다페.’

나는 조용히 복수를 다짐했다.

“아가님께서 용서하셨으니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순순히 물러서려는 리챠드의 앞을 다페가 막아섰다.

“잠깐. ……아무리 생각해 봐도, 네놈은 처음 보는 얼굴이란 말이지.”

“비키십시오.”

“흐음…….”

불쑥, 술에 찌든 고약한 냄새가 가까워졌다.

“이 몸께서 깊이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아니꼬운 시선으로 우리를 훑어 내리던 다페 남작이 검지로 내 이마를 툭, 툭, 기분 나쁘게 쳤다.

“내 기억에 없는 귀족은…… 내 알 바가 아니잖아? 안 그래?”

탁.

리챠드가 다페의 손을 잡아챘다.

두 남자의 눈동자가 허공 속에서 매섭게 뒤엉켰다.

“청결치 못한 손은 우리 아가씨께 이롭지 못합니다.”

“뭐?”

“아, 정중히 말씀드리죠. 그 볼 일 보고 안 씻은 것같이 생겨 먹은 더러운 손, 치워 달란 뜻입니다.”

리챠드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이 자식이!”

다페 남작이 리챠드의 옷깃을 그러쥐었다. 멱살이 잡힌 와중에도 리챠드는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은 말로 할 때 손 놓으십시오.”

“좋은 말로 안 하면 어쩔 건데. 네놈들이 뭘 어쩔 수는 있다고 생각해?”

“글쎄요. 명복이라도 빌어 드려야 하나.”

리챠드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나는 황급히 그를 올려다봤다.

멱살이 잡혀 드러난 목덜미로 핏대가 서 있었다. 불끈 솟은 핏줄로 심상치 않은 기운이 꿀렁거렸다.

‘설마……, 저건.’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수인족이 이성을 잃기 직전의 모습이었다.

급기야 그의 검은 눈동자에서 검은 오라가 스멀스멀 피어 나왔다.

‘지금 여기서 이성을 잃고 폭주한다면 곤란해!’

만약 인간화가 풀려 본래 모습대로 날뛰게 된다면, 리챠드는 즉시 사살될 것이다.

에덴 제국은 대부분 수인족에게 적대적이었으니까.

“멈쵸!”

나는 다급히 리챠드를 꼬옥 껴안으며, 일단 머릿속에 생각나는 대로 외치고 봤다.

“이분은 시고르자브죵 백쟉밈임미다!”

“…….”

멈칫.

검을 쥔 다페 남작의 손이 일순 움직임을 멈췄다.

……토,

…통했나?

가짜 신분을 만들어 내서 지껄인 게 통했나 싶어 다페를 슬쩍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내 후원자라구!”

“네년의 후원자……?”

“응! 리챠드 시고르자브죵 백쟉밈이라고 못 들어 봐써?”

남작 위에 백작, 알지?

재차 강조하니 다페 남작이 검을 쥔 손을 서서히 내렸다.

통했나 봐. 다행이다.

스스로의 기지에 감탄하며 한숨을 돌리려는데,

“나를 무시해도 정도가 있지.”

별안간 눈빛이 변한 다페 남작이 내게 삿대질을 했다.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마.”

“감히 아가님께 무례하게 대하지 마라!”

리챠드의 눈빛이 변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빛났다. 한계에 다다른 리챠드가 이성을 잃고서 발톱을 보이려는 순간,

쾅!

영원히 굳게 닫혀 있을 것만 같았던 민원실의 문이 열렸다.

“리챠드.”

심해까지 단숨에 얼려 버릴 것 같은 차가운 목소리였다.

멈칫.

단 한 번의 짧은 부름에 이성을 되찾은 리챠드가 고개를 숙이며 한 발짝 물러섰다.

“죄송합니다, 각하.”

공손해진 리챠드의 모습을 본 다페는 심상치 않음을 감지했다.

“……누…… 누구냐, 네놈은?”

다페가 이든을 경계하며 물었다.

이든은 그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우리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치워.”

“뭐?”

“치우라고. 그 더러운 손 잘라 버리기 전에.”

맹수의 눈에 살기가 가득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