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무엇이 그를 화나게 한 걸까.
이든이 내뿜는 살기가 주변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이 연놈들이랑 아는 사이냐?”
신경전에 밀려 주춤거린 다페 남작이 괜스레 언성을 높였다.
처음부터 결과가 정해진 싸움.
이미 승기는 이든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분명 얌전히 있으라고 했던 것 같은데.”
이든이 나를 향해 말했다.
내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굳어 있자, 그가 입술을 작게 달싹였다.
“……울었군.”
낮게 읊조린 혼잣말이 똑똑히 귓가에 꽂혔다.
“아니. 울린 건가.”
“시끄럽게 만들어서 죄송해여.”
“…….”
“백쟉밍은 시끄러운 거 싫어하시는뎨……. 제가 잘못해써요.”
울먹이느라 발음이 뭉개졌다.
‘하지만 이렇게 목숨을 걸어야만, 제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걸요.’
내뱉을 수 없는 속엣말이었다.
잠자코 바라보고 있던 이든이 나를 향해 양팔을 벌렸다.
“이리 와.”
순간 귀를 의심했다.
‘오라고? 어딜……?’
설마 자신에게로 오라는 건가.
확신이 서지 않아 망설이는 나를 대신해 그가 먼저 움직였다.
탁!
이든이 다페의 손목을 가볍게 쳐내자, 놀랍게도 나를 잡고 있던 손아귀에서 힘이 풀렸다.
“으아아!”
바닥으로 곤두박질쳐질 게 두려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떨어진다……!
내 우려와 달리, 이든이 곧장 나를 품속에 받아들었다.
“!”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이 뛰었다.
‘……깜짝이야.’
그대로 떨어지는 줄로만 알았다.
“이것들이……!”
발끈한 다페가 달려들려 하자, 이든이 손에 든 서류 종이를 다페 남작의 얼굴로 던졌다.
촤악!
다페는 기름진 얼굴에 붙은 서류 탓에 꼴사납게 허우적거렸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
“내 딸에게 무슨 볼일이지.”
“뭐? 딸?”
다페가 얼굴에 붙은 서류를 떼서 살폈다.
백작 작위 증명서였다.
‘중요한 서류 아니야……?’
비스의 관공서는 다른 곳보다 깐깐하기로 소문났다.
한데 방금 막 발급받은 작위 증명서를 저리 막 던지다니.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만약 저러다가 망가지기라도 한다면 재발급을 받아야 하는 건데.
귀찮은 것을 달가워하지 않은 이든이 한 행동이기라기엔 믿기 어려웠다.
“감히 일개 남작 주제에, 내 딸에게 무슨 볼일이 있냐고 물었다.”
“일개…… 남작?”
다페 남작이 서류를 구겼다.
콰직.
동시에 반듯했던 이든의 이마 위로 실금이 갔다.
* * *
이든은 저보다 한 뼘은 작은 다페를 삐딱한 시선으로 내려다봤다.
고약한 악취를 풍기는 인간.
속을 뒤집어 놓을 만큼 술에 전 냄새와 희미한 피비린내가 풍겼다.
‘참으로 역겹군.’
저 역겨운 손으로 얼마나 더러운 짓을 서슴없이 했을까.
손톱 때가 낀 더러운 손을 보고 있자니 수인족의 비명이 귓가에 들려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어또캐…….”
문득 제 품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인간의 아기. 달갑지 않은 존재가 제 품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이거 꾸겨지면 안 되는 곤데.”
아이가 조그마한 손을 뻗었다.
그 움직임을 좇으니 무참히 구겨진 서류 종이가 시야에 들어왔다.
“백쟉밈한테 소중한 거자냐요.”
“…….”
눈가와 목덜미가 새빨간 작은 인간은 제 작은 몸뚱이보다 구겨진 서류를 더 걱정했다.
찢어 버리면 그만인, 그깟 종잇장 하나에.
“손으로 펴면 괜찮겠쬬? 집에 가서 제가 잘 펴 드릴께여.”
“……하.”
입술 새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여러모로 신경 쓰이게 하는군.’
그의 앞으로 다페의 군화가 가까워졌다.
“높으신 양반이니 말귀는 잘 알아 처먹겠네.”
“…….”
“이 몸이 비록 작위는 이래도 말이야. 든든한 뒷배가 많거든?”
다페는 이든의 단단한 어깨 위에 손을 얹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런데 마침 딱 당신의 딸년이 이 몸의 심기를 거슬렀네? 무슨 말인지 이해해?”
“그러니, 달라?”
다페의 숯덩이 같은 눈썹이 활시위처럼 휘었다.
“크하하, 그래. 이렇게 말귀를 잘 알아 처먹으니까 얼마나 좋아.”
“…….”
“특별히 노불레스 오블루…… 오블리……. 아무튼 그 뭐시기 그걸 발휘해서 사례는 두둑이 챙겨 주지. 아, 원한다면 황실에 다리도 놓아 주고.”
어깨를 으스대는 꼴이 우스웠다.
“어때. 꽤 괜찮은 거래지?”
이어서 다페는 제 품속 아이의 작은 팔뚝을 서슴없이 잡아챘다.
“시…… 싫오!”
아이가 표정을 찌그러트렸다.
‘거슬려.’
파르르 떨리는 얇은 팔뚝이 시선을 강탈했다.
“백쟉밈, 도와쥬세요…….”
시선이 뒤엉킨 푸른 눈동자 위로 뿌연 물안개가 짙어졌다.
“제발.”
간절함이 날카로운 화살촉이 되어 그의 심장 깊숙한 곳에 박혔다.
그는 문득, 마음속에 묻어 두었던 과거를 떠올리고 말았다.
.
.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이든이 열 살 남짓 되던 해.
그날은 공기 한 줌, 달빛 한 결마저 온통 피로 칠해졌다.
비명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짐승이면 짐승답게 기어야지.”
촤악!
검이 허공을 긋자, 수인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투둑, 투두둑.
검날을 타고 선홍빛 액체가 흘러내렸다. 이윽고 인간은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내며 씨익 웃었다.
“숨이 붙어 있는 것들 중에서 쓸 만한 것들은 생포해! 노예로 가져다 팔 거니까!”
악귀와도 같은 인간이 떠난 후.
어린 이든은 싸늘히 식어 가는 시체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안 됩니다……. 안 돼. 그리 죽으시면 안 돼요.”
한때 이든의 스승이자, 친구이며 때론 가족과도 같았던 자였다.
……툭.
힘없이 바닥으로 추락한 손과 함께 스승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이든의 가슴 깊이 낙인처럼 남았다.
.
.
투둑, ……툭.
눈물이 떨어졌다.
그간 속내를 가늠하기 위해 지켜봤던 경계 대상이자, 곧 제 딸이 될 작은 인간의 눈에서.
“울렸다, 라.”
이든의 관자놀이 위로 핏줄이 솟아올랐다. 퍼석하게 마른 숲에 누군가 불화살을 당긴 것처럼 화륵, 열기가 차올랐다.
“내 앞에서도 울지 않은 애를.”
콱.
이든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다페의 손목을 잡아챘다.
다페에게는 놀랄 틈도 없었다.
“하나 가르쳐 주지.”
콰드득.
이든이 힘을 주자 다페의 얼굴이 점점 새빨갛게 변했다. 울룩불룩 솟은 다페의 근육과 힘도 이든 앞에서는 무쓸모였다.
“난 소유욕이 아주 강해.”
“소유…… 뭐?”
“내 것을 건드리는 걸 아주 싫어한다고.”
자존심이 센 다페는 참으려 노력해 봤지만, 끝내 두터운 입술 사이로 옅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크윽!”
“다음번에도 마주쳤을 때 내 딸에게 그딴 말을 지껄인다면…….”
이든이 으르렁거리며 덧붙였다.
“그 눈과 혀를 뽑아 주지.”
“!”
수많은 전장을 누볐던 다페였다.
그런 그조차도 절로 몸을 움츠러트리게 만드는 살기였다.
‘어디서 굴러온 놈이지?’
자신이 패기로 밀리다니.
다페는 퍽 자존심이 상했다. 그렇기에 그는 나불거리는 입을 멈추지 않았다.
“그 코흘리개 때문에 괜히 인생 망치고 싶지 않으면 그냥 위대한 이 몸께 순순히…….”
“루나.”
나지막한 음성이 말을 끊었다.
“뭐?”
뭐라는 거야?
되묻는 물음에 다페의 손목을 잡은 악력이 더 강해졌다.
“크헉!”
“…….”
“알았으니까, 놔! 놓으라고!”
고함을 지르는 다페를 보며 이든은 생각에 잠겼다.
‘무엇 때문에 이토록 충동적으로 행동하는가.’
스스로에게 하는 질문이었다.
저 작은 인간을 동정해서?
제 앞에서도 울지 않던 아이를 저자가 먼저 울린 게 분해서?
그것도 아니라면…….
지금 이 상황이 제 기억 속의 그 악몽이 떠올리게 해서?
이든은 쉽게 답을 내리지 못했다.
확실한 건 저 작은 인간이, 세게 쥐면 한 줌 모래로 바스라질 것 같은 콩알만 한 아이가 신경이 쓰인다는 것이었다.
그저 저 아이가 우는 게 싫었다.
‘그래, 그저 그뿐이다.’
이든은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코흘리개가 아니라, 루나 라이언하트.”
차가운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이든의 시선이 제 품에 안겨 있는 루나에게로 옮겨졌다.
“그게 내 딸의 이름이다.”
* * *
마차가 가문비나무 숲을 지났다.
나는 리챠드의 품에 안겨서 창밖을 내다보는 척 턱을 괴고 있었다.
조용히 눈을 감으면 시끄러운 말발굽 소리는 지워지고 이든의 목소리만 귓가에 생생히 울려 퍼졌다.
[코흘리개가 아니라, 루나 라이언하트.]
[그게 내 딸의 이름이다.]
심장이 콩닥거렸다.
내가 꿈을 꾸는 걸까?
‘이든이 본인 입으로 직접 그런 말을 하다니.’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슬쩍 반대편 창 쪽에 앉은 이든을 훔쳐봤다.
‘무슨 생각이었던 걸까?’
그의 표정을 읽으려 애쓰는데, 나지막한 리챠드의 음성이 들려왔다.
“다음번에도 마주쳤을 때 내 딸에게 그딴 말을 지껄인다면…….”
“…….”
“그 눈과 혀를 뽑아 주지.”
리챠드는 답지 않게 목소리를 잔뜩 깔고서, 이든이 했던 말을 흉내 내며 재현했다.
“코흘리개가 아니라, 루나 라이언하트.”
“…….”
“그게, 내 딸의 이름이다.”
이든의 몸이 경직됐다.
조마조마하며 눈치 보는 나와 다르게 리챠드는 와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각하의 기사도 정신에 저는 감동했습니다.”
“……그 입 다물어, 리챠드.”
묵직한 경고에도 리챠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아가님께서도 각하의 행동에 감동하셨죠?”
질문을 한 건 리챠드인데, 이든과 시선이 마주쳐 버렸다.
“……졸려, 잘래요.”
나도 모르게 도망치듯이 리챠드의 품속에 얼굴을 묻고 말았다.
“어라? 방금 전까지 눈이 말똥말똥하셨던 것 같은데 말입니다.”
“…….”
“아가님 설마……, 부끄러우신 겁니까?”
“진짜 잘 꼬에요.”
리챠드의 놀림이 계속 이어졌지만, 지금은 차마 고개를 들어 이든을 볼 수 없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