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142)

12화

리챠드가 품속에 안겨 있는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었다.

“그럼 우리 아가님을 위해 제가 특별 서비스를 해 드릴까요?”

“특별 서비쓰?”

나는 솔깃한 제안에 고개를 슬그머니 들었다.

“장담하는데 분명 받자마자 잠이 솔솔 오실 겁니다.”

자장가라도 불러 주려는 걸까?

무엇이든 간에 놀리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죠아요.”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흠흠, 리챠드가 목을 몇 차례 가다듬더니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응?”

갑작스러운 밀착에 당황스럽기도 잠시, 점점 그가 가까워졌다.

어……? 어어? 어어어?

남의 입술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저, 저기 리챠드. 잠깐만요.”

“아가님께서는 가만히 계시면 됩니다.”

“가만히요?”

왠지 더 수상하게 느껴졌다.

어느덧 거리를 좁힌 입술이 서서히 벌어지고, 그 사이로 무언가 반짝였다.

‘뾰족한 송곳니!’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무, 물린다!’

뒤이어 내게 찾아온 감각은 엄청난 통증이 아닌……,

할짝.

축축함?

“……으엉?”

뺨 위 느껴지는 축축하고도 생소한 감촉에 슬그머니 눈을 떴다.

“어떻습니까, 아가님? 슬슬 잠이 오시나요?”

“모 하신 거예요?”

“뭐긴요. 아가님을 위한 그루밍이지요.”

어깨를 꼿꼿이 펼친 리챠드가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구루밍?”

……그거 고양잇과 동물이 하는 거 아냐?

얼이 빠져 있는 내게 리챠드가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각하께서 어릴 적, 그루밍 없이는 잠을 주무시지 못하셨답니다.”

나는 슬쩍 이든을 훔쳐봤다.

‘저 험악하게 생긴 이든의 뽀짝이 시절이라고?’

지금과는 정반대일 그 모습이 쉬이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다.

게다가 그루밍받는 모습이라니.

더더욱 상상할 수 없었다.

“리챠드. 언제부터 네 장래 희망이 기미 집사로 바뀐 거지?”

귀가 좋은 이든이 리챠드가 내게 한 말을 들었나 보다.

“기미 집사라뇨?”

“배고프면 식량 창고에나 가. 헛짓거리 하지 말고.”

이든이 건조한 눈빛으로 출입문을 향해 턱짓했다.

그러자 가뜩이나 동그란 리챠드의 밤색 눈동자가 더욱 커졌다.

“맙소사. 그런 상스러운 단어들은 아기님 앞에서 실례입니다만.”

그래, 비상식량 취급이라니. 그건 너무하잖아.

나는 공감의 의미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말고 조금 더 부드러운 애칭으로 불러 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왜 그래야 하지?”

“그야, 이제는 아빠시니까요.”

이든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럴 때만큼은 감정에 솔직한 그의 왼쪽 눈썹이 왠지 얄미웠다.

“폐하께서는 따로 생각해 놓지 않으셨을 것 같아서, 제가 아가님 애칭에 대해 따로 생각해 봤습니다만.”

“쓸데없는 짓을 했군.”

리챠드는 이든이 허락하든 말든 수첩까지 꺼내 들며 본격적으로 재잘거렸다.

“땅콩은 어떻습니까?”

“일리가 있네.”

일리 있기는 무슨!

영 관심 없는 척하더니만, 곧장 대꾸하는 이든이 어이없었다.

“비슷한 거로는 병아리, 마시멜로우, 솜뭉치, 똥강아지 등이 있습니다만…….”

“똥강아지야말로 애한테 실례가 되는 표현 아닌가?”

“……그런 상스러운 단어는 제게 무척이나 상처입니다만. 아니, 잠깐만. 왜 그런 표정으로 저를 보시는 겁니까?”

리챠드가 콧김을 뿜으며 항의를 했으나, 이든은 들은 채도 하지 않고서 그의 수첩을 가로챘다.

“흐음. 하얀 쪽이 적당할 것 같은데.”

한참 수첩을 뒤적이던 이든의 손이 멈추었다.

“밀가루 반죽, 이라…….”

“말랑말랑 통실통실한 볼을 가진 우리 아기님과 딱 어울리기는 한데, 아무래도 다정한 어감은 아닌지라 예비 후보에만 두었습니다.”

“나쁘지 않군.”

제 아래턱을 매만지며 긍정하는 이든을 보며 리챠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그게요?”

“이걸로 하지.”

……졸지에 밀가루 반죽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눈 뜨고 사자에게 코 물린다’라는 표현은 바로 이럴 때나 쓰는 것일까.

허탈한 웃음만 나왔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챠드가 내게 다급히 질문했다.

“아가님은 어떠신가요?”

“……진심으로 묻는 고예요?”

“네. 역시 후보 중에서는 똥강아지가 제일 마음에 드시죠?”

나쁜 리챠드. 나쁜 똥개!

얄미운 그의 가슴팍에 이마를 조금 세게 쿵, 들이박았다.

“억!”

“……저 진쨔 잘 꼬에요. 말 걸지 마세요.”

머리 위로 남정네들의 잔잔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걸 애써 무시하며 눈을 꼭 감았다.

* * *

뭐야. 리챠드의 말이 진짜였나.

나도 모르는 사이, 깜빡 잠이 들어 버렸다.

“아가씨 도착했습니다.”

“우응…….”

나긋한 속삭임을 듣고 눈을 떴을 때는 마차가 저택에 도착해 있었다.

“역시 낮잠에는 그루밍이 효과가 좋…….”

“그래도 다시는 안 됨미다.”

“이런.”

아쉬운 표정을 짓는 리챠드의 품에서 내려와 주변을 살폈다.

그나저나…… 이든은 어디 갔지?

그에게 아까 일에 대한 감사 인사를 전해야 하는데.

이리저리 두리번거려도 주변에는 마차의 짐을 옮기는 일꾼들과 리챠드만 보일 뿐.

이든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백쟉밈은요?”

“도착하시자마자 집무실로 가셨습니다. 모셔다드릴까요?”

“녜.”

리챠드가 친히 나를 이든의 집무실까지 데려다주었다.

“각하, 아가님께서 오셨습니다.”

짧은 정적 뒤, 대답이 돌아왔다.

“들어오라 해.”

뜻 모를 응원과 함께 문을 열어 준 리챠드는 제 일을 하러 갔다.

이제 이든과 나의 시간이었다.

슬그머니 집무실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그는 내 방문에도 보고 있던 서류에만 집중할 뿐.

일말의 알은체도 없었다.

“저기……, 백쟉밈.”

“고마워할 필요 없다. 네가 말한 예지대로 됐으니, 나도 약속을 지킨 것뿐이다.”

아직 말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그가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먼저 선수 쳐서 대답했다.

“그래도 감사함미댜.”

“…….”

대꾸 없이 서류를 뒤적거리던 그의 손이 멈칫했다.

“이제 제가 했던 말들을 다 믿어 쥬시는 거니까 기뻐요.”

“착각하지 마라. 그냥 네 능력이 내게 쓸 만했던 것이다.”

참으로 무심한 목소리였다.

그럼에도 나는 충분히 기뻐 제자리에서 폴짝 뛰었다.

“진쨔요?”

이든에게 인정받다니!

이건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허무하게 죽어야 할 운명쯤은 거뜬히 바꿔 놓을 만큼이나!

‘적어도 라이언하트 저택에서 지내는 동안에는 비명횡사할 일은 없겠네.’

걱정거리가 하나 줄어든 셈이다.

“다행이댜…….”

“무엇이.”

그의 질문에 나는 양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대답했다.

“제가 백쟉밈께 쓸 만한 존재가 되었자냐요.”

“…….”

그가 내게 시선을 옮겼다.

커다란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을 등지고 있어서일까?

아니면 벌어진 입술 틈으로 송곳니가 보일 듯 말 듯 해서?

그늘진 얼굴을 보니 착각이 들었다.

‘마치 오래 굶주린 맹수가 사냥감을 보는 것 같은 눈빛인데…….’

불현듯 아까의 대화가 떠올랐다.

[도시락은 어떻습니까?]

[일리가 있네.]

왜 하필 그 대화가 생각난 건지.

괜스레 찝찝한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속으로 생각했다.

‘이든이 이성이 있는 수인이라서 다행이야.’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나 같은 어린애쯤은 그가 했던 말대로 이미 비상식량이 되었을걸?

그리 생각하니 마음이 놓였다.

“……넌 왜 매번 쓸데없는 것들에 진심인 거지?”

잡념에 빠진 내게 이든이 물었다.

무언가 마음에 안 들었나?

그의 시선이 잔뜩 삐딱했다.

‘관공서에서의 일로 우리가 조금 가까워진 건 아닐까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나 보다.

‘역시 고양잇과 동물인 걸까?’

좀처럼 그를 종잡을 수가 없었다.

“백쟉밈 화나셨어요?”

나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그리 답하기 어려운 질문도 아닌데. 한동안 굳어 있던 그의 입술이 미적미적 움직이기 시작했다.

“화나? 내가? 그럴 리가.”

전혀, 그럴 리가 없다.

거듭 반복하는 모습이 어째 스스로에게 변명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내 착각이겠지?

“아니면 다행이구여.”

“더 할 말 없으면 나가 봐.”

“녜, 그럼 안뇽히 계세…….”

배꼽 인사를 꾸벅하고서 내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꼬르르륵.

별안간 요란히 집무실에 울려 퍼지는 배 끓는 소리만 아니었더라면.

“…….”

“…….”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놀란 나는 습관적으로 배를 움켜쥐고서 입을 열었다.

“이번엔 저 아니에요.”

“……안다.”

개미 똥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지금 보니까 그도 나처럼 자신의 배를 부여잡고 있었다.

게다가 호박색 동공이 격렬히 흔들리고 있는 걸 보니…….

“혹쉬, 배고프세요?”

그의 몸이 크게 움찔했다.

분명 아니라고 잡아떼겠지만, 티가 너무 났다.

“네가 상관할 바 아니다.”

“리챠드를 불러 드릴께여.”

이건 점수를 딸 기회야!

나는 마냥 해맑은 마음으로 집무실 한편에 매달린 설렁줄을 잡아당기려 쪼르르 달려갔는데,

“안 돼!”

이든이 번개 같은 속도로 날아들어 나를 낚아채듯 안았다.

뭐, 뭐야!

얼떨결에 다시 그의 품속에 안긴 꼴이 됐다. 정작 그는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부를 필요 없다.”

그가 단호하게 말했지만,

꼬르르르르르르륵!

그의 위장이 더욱 단호했다.

“…….”

“…….”

“하지만 백쟉밈의 배꼽시계가 멈추지 않눈걸요.”

“곧 멈출 것이다.”

한참 입술을 달싹거리던 그가 한숨처럼 말을 뱉어 냈다.

“식사를 하셔야지 배고픔이 사라지는뎨…….”

중간에 말을 끊은 건, 맹수의 집요한 눈빛이 내게 닿아 있다는 걸 자각해서였다.

‘갑자기 왜 그런 눈으로 뚫어져라 보는데, 왜!’

그가 입술을 달싹일 때마다 언뜻언뜻 보이는 위협적인 송곳니가 시선을 강탈했다.

‘저걸로 목덜미를 물리면 즉사겠지.’

자꾸 무시무시한 전개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아무래도 이놈의 원작 장르 때문인 걸까.

그럴 생각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수인족과 인간이 서로를 사냥했다는 역사가 있는 세계관이잖아?’

내 의지와는 달리, 두 눈이 금세 그렁그렁해졌다.

“백쟉밈…….”

“왜 그런 표정이지?”

그가 눈살을 찌푸리니 한층 더 맹수처럼 보였다.

“혹쉬, 저 잡아먹으실 꼬에요?”

“뭐?”

“저 맛업써여…….”

코맹맹이 소리로 내 뱃살을 잡아 보였다.

“이거 봐 봐여. 살도 쪼꼼밖에 업써. 씹고 뜯고 즐기고 맛보고 할 수 업써요.”

뒤늦게 내 말뜻을 이해한 그가 허, 하고 헛웃음을 뱉었다.

“육식은 과거 선조들의 일이다.”

“정말이에여?”

“그렇ㄷ…….”

꼬르르르륵.

그가 다시금 배를 움켜쥐었다.

“흐아아아!”

그의 손에 매달려서 버둥거리는 나를 보고 그가 이마를 부여잡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난 채식주의자다.”

“그런 배꼽시계 소리랑 그런 송곳니를 갖꼬서 그런 말씀을 하니까 하나도 설득력 없꼬든요.”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다만, 걱정할 필요 없다. 백작가의 식량 창고는 차고 넘치니까.”

삐질 흘러나온 콧물을 훌쩍이며 그에게 되물었다.

“……정말요?”

“그래, 정말.”

다른 이가 말을 했으면 쉬이 믿지 못했겠지만, 그가 하니 왠지 그럴듯하게 들렸다.

‘그래, 생판 남이나 다름없는 나한테도 큰 방을 아무렇지도 않게 선뜻 줄 정도의 재력이라면, 식량 창고 걱정은 할 필요도 없겠지?’

겨우 마음에 평화가 다시 찾아오려던 순간,

리챠드가 집무실 문을 벌컥 열고 들이닥쳤다.

“각하! 식량 창고가 털렸습니다!”

내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나 다름없었기에 절규했다.

“나 맛없써어어어!”

“채식주의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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