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142)

13화

“나 맛없써어어어!”

“채식주의자라고!”

입구에 선 리챠드가 이든과 나를 번갈아 보며 슬며시 뒷걸음질쳤다.

“어라……. 설마 해서 여쭙는 겁니다만, 제가 두 분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한 건 아니겠죠?”

“아뇨, 리챠드. 보고 시퍼써요!”

나는 혹시라도 다시 이든과 단둘이 남게 될까 봐서 후다닥 리챠드에게 달려갔다.

그러자 등 뒤에서 헛웃음이 들려왔다.

“허.”

“아가님께서 저를 이리 반겨 주시니 감격스러울 따름입니다만. 혹 각하께서 질투를 하지 않으실까 염려가 되는군요.”

질투는 무슨.

비상식량을 남에게 뺏길까 봐 염려하는 거라면 몰라.

리챠드의 다리 뒤에 숨은 나는 고개만 빼꼼 내밀고서 이든을 경계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앞장서.”

아니나 다를까, 잔뜩 못마땅한 말투였다.

“직접 가 보실 겁니까?”

“두 눈으로 확인해 봐야지. 어떤 놈이 겁도 없이 내 영역에 처들어온 건지.”

이든이 앞서 집무실을 나섰다.

쿵. 쿵. 쿵.

평소에는 발소리도 안 내고서 사뿐사뿐 다니는 양반이 왜 저리 심술이 난 건지 모르겠다.

“아가님. 이런 말씀 드리기 뭐하지만, 혹 각하와 다투셨나요?”

“리챠드. 그만 미적거리지?”

귀도 참 좋네.

한참은 멀찍이 떨어진 이든이 용케도 듣고서 리챠드를 나무랐다.

“저런, 더 큰 불호령이 떨어지기 전에 얼른 가 봐야겠습니다.”

“나도 갈래여.”

“아가님도요?”

“녜. 같이 가요.”

리챠드가 나를 번적 안아 들었다.

나는 식량 창고로 향하는 내내 이든의 따가운 시선을 받았다.

‘배가 고파서 예민한 건가?’

괜히 불똥이 튄 기분이었다.

최대한 그와 눈이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 리챠드의 품속으로 숨을수록, 언짢아하는 신음이 이어졌다.

“크흠! 큼!”

심보 고약한 대형 고양이 같으니라고.

왜 자꾸 눈치를 주는 거람.

아무래도 그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모양이다.

“리챠드, 식량 많이 털려써요?”

“어제저녁까지만 해도 가득 차 있던 창고가 하루 새에 텅 비어 버렸으니, 많이 털린 거라고 해야겠죠?”

“오또캐…….”

“아가님께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식량 창고에는 주로 각하와 저 같은 수인을 위한 음식만 저장되어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더 걱정인걸요.

제일 중요한 ‘굶주린 사자’의 음식이 비어 있다니.

누군가의 비상식량으로서 오늘 밤 발 뻗고 자기는 글렀다.

“피해 상황 보고해.”

“식량 창고 외에 침입 흔적은 없었습니다. 직접적으로 돈이 될 만한 물건을 건드린 흔적도 없었습니다.”

“고작 음식을 털기 위해서 백작가의 담을 넘었다고?”

“안 그래도 그 점이 이상합니다.”

대화를 듣다 보니 정말 이상했다.

‘보통 귀족가를 털 정도의 대범한 도둑은 땅문서라든가 돈이 될 법한 것들을 훔치지 않나?’

의아함이 잔뜩 쌓인 채로 우리는 식량 창고에 도착했다.

안에 들어가 보니 난장판이었다.

헉. 진짜 도둑이 들긴 들었나 보다.

태풍이 한바탕 쓸고 지나간 것처럼 식기구들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보시다시피 식료품 저장고 쪽만 난리입니다. 반대쪽 고가의 접시들은 몇 개 깨진 것만 제외하면 멀쩡하죠.”

“냄새 추적은?”

“진작 해 보았죠. 한데, 꽤 치밀한 놈인지 낯선 냄새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리챠드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개코로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의 실력자라고?’

그런 자가 겨우 음식만 훔쳤다니 더욱 수상함이 커졌다.

‘리챠드의 자작극이 아닌 이상 설명이 안 되는 상황인데.’

그렇지만 이 저택의 이인자인 그가 이런 일을 벌일 이유가 없었기에 리챠드를 의심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장난을 좋아한다 하더라도 어차피 수습은 제 몫일 텐데, 굳이?

“족적은 없었나?”

“그것 역시 발견된 건 없었습니다.”

이든이 표정을 심각하게 굳혔다.

이 일은 저택의 경비가 허술하다는 것의 증거였으니, 그로서는 불쾌한 일이었다.

물론 내게도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이곳만큼은 내게 안전한 공간이어야 했으니까.

“당분간 경비를 강화한다.”

“네. 야간 보초를 더 늘리겠습니다.”

영 갈피를 잡지 못하는 두 남자를 보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가만 보자. 이맘때쯤 원작에서 무슨 사건이 발생하더라?’

이렇게 솜씨 좋은 대도라면 원작에 이름이라도 언급됐을 법한데.

‘내 기억으로 그런 자는 없어.’

도둑의 짓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누구지?

다른 재산은 건드리지 않고 음식만 홀랑 훔쳐 도망갈 자.

‘혼자는 아니겠지?’

단독으로 많은 양의 음식을 옮겼다가는 분명 들켰을 것이다.

‘그렇다고 여러 명도 아닐 텐데.’

저택에는 보는 눈이 많으니, 범인이 다수였더라면 꼬리가 잡혔을 것이다.

……잠깐만.

‘만약 혼자서 그 많은 양의 음식을 다 먹어 치운 거라면?’

문득 나는 한 에피소드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 사건이 있었지?’

아무리 먹어도 배가 고파서 끊임없이 먹어 댄다는 그 설정이 처음으로 등장한 사건이 떠올랐다.

‘원작에서 집중해서 다룬 에피소드는 아니었지만, 그걸로 그놈이 탄탄한 경제권을 구축했던 그 사건!’

그놈은 모리스 대신관의 세 명의 주요 수족 중 하나며, 동시에 이든의 원수 중 하나이기도 했다.

‘어쩌면 이번 일과 그 일이 관련 있을지도 몰라.’

원작을 유리하게 우리 쪽으로 바꿔 놓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헉, 어떡해. 나 완전 천재인가 봐.

머릿속에 계획이 대충 그려졌다.

“백쟉밈, 제가 밝혀 보께요!”

“뭐?”

“범인이 누군지 찾을 수 있을 거 가타요.”

“네가 무슨 수로.”

이든이 눈매를 좁혔다.

“전 예지몽을 꾸는 아가자냐요.”

나는 여느 때보다 당당한 목소리로 사기를 쳤다.

* * *

어느덧 날이 저물었다.

나는 불 꺼진 식량 창고에서 홀로 범인이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촛불이라도 하나 달라고 할 걸 구랬나.”

암흑 속이라서 조금 무섭긴 했지만, 별수 없었다.

불이 켜져 있으면 범인이 안 나타날지도 모르니까.

“괜찮을 꼬야.”

스스로를 다독이며 조용히 어둠에 눈을 적응시켰다.

내가 리챠드에게 부탁해 놓은 대로 선반은 새로 산 식재료들로 채워져 있었다.

대부분 향이 강한 것들이었다.

“이게 좋게따.”

그중 하나를 골라 들었다.

가까이서 보니 자극적인 향신료가 들어간 걸로 유명한 포비에 식당의 포테이토 샐러드 캔이었다.

딸깍.

캔을 따자마자 창고 안에 고소한 냄새가 스멀스멀 퍼졌다.

와, 진짜 냄새 장난 아니다.

“꿀꺽.”

나는 군침을 삼키며 슬며시 창고 문을 열어 두었다.

‘이렇게 하면 냄새를 맡겠지?’

이제 남은 것은 기다림뿐이었다.

팔락팔락.

미리 준비한 얇은 나무 판때기로 열심히 부채질을 하며 복도에 맛있는 냄새를 퍼트리는 데에 열중했다.

‘내 예상대로라면 범인은 아는 얼굴일 텐데.’

잠시 후 누군가 창고로 다가왔다.

‘왔다!’

나는 부채질을 멈추고서 곧장 속이 비어 있는 커다란 나무 상자 안으로 몸을 숨겼다.

끼이이익.

간발의 차로 철문이 열렸다.

‘누굴까.’

숨을 죽이고서 귀를 기울였다.

“…….”

사락사락.

걸을 때마다 옷깃이 쓸리는 소리만 날 뿐.

발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역시 혼자였어.’

인기척이 점점 가까워졌다.

나는 상자의 구석, 작은 틈새 사이로 밖을 살폈다.

등불을 들고 온 모양이다.

상대가 움직일 때마다 주변에 그림자가 아롱거리는 게 보였다.

‘밖에 경비가 돌아다니는데도 등불까지 들고 온 걸 보면, 엄청 대범한 성격인가 보네.’

너울너울 흔들리는 커다란 그림자가 창고 안을 한 바퀴 돌더니 내가 숨은 상자 앞에 섰다.

‘곧장 먹어 치울 줄 알았는데.’

상대는 의외로 신중했다.

등불의 움직임으로 봤을 때 주변을 이리저리 살피는 것 같았다.

점점 범인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때,

“여기 있겠다더니 어디 간 거지.”

범인의 혼잣말이 들려왔다.

낮게 깔린 목소리는 어쩐지 익숙하게 느껴졌다.

“쓸데없이 또 이상한 곳을 뽈뽈뽈 돌아다니고 있는 건가?”

이 목소리는……?

나는 곧장 한 얼굴을 떠올렸다.

‘설마.’

슬그머니 상자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상대를 확인했다.

어둠과 동화된 짙은 흑발.

장대같이 큰 키와 널따란 어깨의 소유자.

저 낯익은 뒷모습은 아무래도 내가 떠올린 인물이 맞는 것 같았다.

“……백쟉밈?”

조심스레 그를 불러보았다.

그러자 화들짝 놀란 그림자가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

“백쟉밈이 범인이여써요?”

이든이 천천히 돌아섰다.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치미를 뚝 뗀 얼굴로 고상하게 대답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럼 여긴 왜 오신 고에요.”

“그냥 확인차 온 것이다.”

“범인이 잡혔는지 궁금하셔써요?”

“그게 아니라…….”

말을 하다 말고 그가 멈칫했다.

무어라 말을 꺼낼 듯 말 듯,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입술을 꾹 닫아 버렸다.

이 못된 사자야. 말을 하다 마는 건 한국인을 화나게 하는 법이라고.

답답함을 못 이겨서 이래저래 머리를 굴리던 나는 금방 그럴듯한 이유를 떠올렸다.

“아! 제가 도망이라도 갔을까 봐 감시하로 오신 거구나.”

“……그냥 말을 말아야겠군.”

그런 이유가 아니면 뭔데?

더는 내 상식선에서 짐작할 만한 게 없는걸.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순진무구한 말투로 질문했다.

“당연히 절 보러 오신 건 아닐 테니까, 그런 이유밖에 없지 않아여?”

움찔.

그의 몸이 재차 떨렸다.

“착각하지 마라.”

“모를요?”

“…….”

아. 설마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싶으신 건가?

그럴듯한 추측이라고 생각하며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방긋 웃었다.

“백쟉밈이 범인이 아니라는 말은 믿으니까 걱정하지 마셰요.”

“그게 아니라. 딱히 범인이 너한테…… 할까 봐…… 해서 온 건 아니니까 착각하지 말라고.”

뭐라고 한 거야?

개미 똥만 한 목소리로 웅얼거린 탓에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녜?”

“하……. 아니다.”

이든이 한숨을 뱉으며 마른세수를 했다.

“이제 방으로 돌아가시려구여?”

“그래.”

그가 등불을 내 옆에 내려놨다.

덕분에 주변이 밝아져 더는 무섭지 않았다.

“어? 저 빌려주시는 고예요?”

“무거워서 두고 가는 거다.”

“녜?”

그 커다란 덩치로 손바닥만 한 등불이 무겁다니.

아무래도 우리 집 사자님은 운동 부족인 게 분명했다.

“백쟉밈, 보기보다 엄살이 심하시네여.”

“……그냥 그런 줄 알아.”

그가 서둘러 창고를 떠나기 위해 문으로 한 발짝 뗀 순간,

……쿵.

……쿵쿵.

……쿵쿵쿵.

복도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꽤나 묵직한 발소리였다.

무언가가 식량 창고 쪽으로 오고 있었다.

“!”

“누가 오고 이써요.”

나는 그를 끌어당겼다.

기우뚱 몸이 기운 그는 얼떨결에 내가 들어와 있는 상자에 발 한짝을 들이게 됐다.

“모 해요. 빨리 들어와요.”

“여기에 들어가라고?”

그가 상자를 가리키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이 챰, 범인 잡아야져.”

쪼그려 앉아서 그를 재촉했다.

그사이, 발소리는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쿵쿵! 쿵쿵쿵!

거의 코앞이었다.

“백쟉밈 얼른!”

“…….”

이든이 오만상인 채로 남은 발을 마저 상자 속으로 들였다.

“등불 이리 주셰요.”

주변을 밝히던 등불을 후, 불어서 껐다.

금세 암흑이 찾아왔다.

“백쟉밈. 숙여요, 숙여.”

그의 옷깃을 잡아당기자, 그가 하는 수 없이 상자 속에 몸을 구겨지듯 밀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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