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솔직히 이든에게 조금 미안했다.
덩치가 산만 한 성인 남자에게 상자에 숨으라는 얘기는 내가 생각해도 조금 무리한 부탁이었으니까.
“쉬잇.”
그런데 웬일인지 이든은 내 뜻대로 잠자코 몸을 꾸깃꾸깃 접은 상태로 잘 참아 주었다.
꽤 불편할 법도 한데.
나는 그가 예민하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하며 상자 밖으로 관심을 돌렸다.
“맛있는 냄새…….”
범인이 내가 까 놓은 포테이토 샐러드 캔으로 다가왔다.
‘얼굴이 잘 안 보이네.’
불이 꺼진 탓에 형체만 보였다.
“킁킁, 킁킁킁.”
냄새로 추적해 온 건가?
정체불명의 그림자는 어둠 속에서도 잘도 샐러드 캔을 찾아냈다.
텁.
그가 캔을 손에 쥐었다.
‘미끼를 물었어!’
이윽고 음식 먹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순식간에 캔을 먹어 치웠다.
이내 그것만으로는 양이 부족했는지, 선반 위의 것들까지 꺼내 먹기 시작했다.
달그락, 달그락.
지이이이이익.
부스럭부스럭.
들리는 소리만으로도 얼마나 빠르게 먹어 치우는지 알 수 있었다.
“저자는…….”
“쉬잇, 목소리 낮춰여.”
나는 다급히 조심성 없는 사자의 입술 위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다행히 상대는 무아지경 상태라 우리가 숨어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아는 자다.”
“얼굴을 봐써요?”
역시 맹수인 건가.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있는데, 그는 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용케 범인의 얼굴을 확인했다.
“내 집에 든 침입자가…… 토리 무크일 줄은 몰랐군.”
“툐리요?”
“한데, 상태가 왜 저러지?”
상태가 어떻기에?
이든이 등불에 다시 불을 지폈다.
주변이 환해지면서 마침내 나는 토리의 상태를 눈으로 확인해 볼 수 있었다.
“헉.”
동물화된 모습일 때는 성인 주먹만 한 크기의 작고 아담한 사이즈였던 토리가 우락부락한 덩치로 변해 있었다.
“정신 상태도 제대로가 아닌 것 같군.”
이든의 말대로 토리는 불이 켜지든 말든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캔에 코를 박고서 음식만 와구와구 먹어 치울 뿐이었다.
“흑주술에 걸리기라도 한 건가?”
“아뇨. 저건…… 바이러스에 걸린 거에여.”
“바이러스?”
“정확히 이름 붙이자면, 츄릅츄릅병임미다.”
이든이 눈을 가늘게 떴다.
“츄릅츄릅병? 처음 들어 보는 병명인데.”
“당연하죠. 올해 처음 발병하니까여.”
내 기억상, 츄릅츄릅병은 1월 말쯤 전국적으로 유행한다.
지금은 1월 첫째 주.
아직 한 번도 발병하지 않은 상태라 학술적으로 명명되지 않았다.
“그것도 네 능력으로 미리 예지한 건가?”
“마자요.”
이제 이 정도 거짓말쯤은 능숙했다.
“알고 있는 걸 설명해 봐.”
“츄릅츄릅병은 야생의 츄릅꽃 열매를 잘못 먹으면 감염되는 병이에여.”
“츄릅꽃이라는 건 프리마 숲에서 본 적이 없는데.”
“그야 당연하죠. 츄릅꽃은 인간들이 마법으로 일반 식물과 마물을 배합해서 만든 거니까여.”
“……괜한 짓거리들을 했군.”
눈살을 찌푸리는 그의 심정에 동의했다.
츄릅꽃은 전적으로 인간들의 욕심 때문에 만들어진 실험체였다.
“민들레랑 결합해서 만든 거라서 바람을 타고 금방 확산될 꼬에요.”
“증상은, 내가 지금 보는 그대로인 건가?”
이든이 미친 듯이 먹어 대는 토리 무크를 가리켰다.
토리는 먹으면 먹을수록 벌크업이라도 하는 것처럼 덩치가 무럭무럭 커지고 있었다.
“츄릅 열매를 과하게 섭취해서 식욕이 폭주 상태에 돌입한 거에여.”
적당량의 츄릅 열매 섭취는 입맛 없는 사람에게 식욕을 돌아오게 해 주는 치료제가 될 수 있지만, 뭐든지 과유불급인 법.
과하게 섭취하면 토리처럼 되기 십상이었다.
“치료 방법은?”
“당연히 알고 있쬬. 이 세상에서 오직 저만이 치료제를 만드는 법을 알고 있을 고에요.”
원래라면 ‘그 자식’이 개발하는 거지만, 선수를 칠 생각이었다.
‘빌런이 잘 되는 꼴은 또 죽어도 못 보지.’
나는 빙긋 미소 지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번 일로 토리에게 점수도 딸 수 있고, 이든에게 예지몽 능력을 또 한 번 증명할 수 있으니 나로서는 의욕이 넘칠 수밖에 없었다.
“일단 토리를 잡아야 함미다.”
“어렵지 않군.”
“조심해야 해요. 츄릅 바이러스에 감염된 상태에선 평소보다 더 난폭하게 행동할 수도 이써요.”
“그게 걱정인가? 내가 옆에 있는데.”
아, 맞다.
상자 안에서 나와 함께 쪼그려 앉아 있던 이 남자가 이래 봬도 먹이 사슬 꼭대기에 있는 사자였지, 참.
“잡는 건, 내가 하겠다.”
이든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나도 치료제를 만들 준비를 해 보실까?
* * *
이든과 함께하니 모든 것이 속전속결이었다.
그는 사냥의 귀재답게 순식간에 토리를 잡아 왔다.
서로의 안전을 위해서 토리는 작은 방에 격리해 두었다.
“토리 무크는 격리해 두었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되는 거지?”
“부탁드린 것은여?”
“여기.”
이든이 묵직한 포대 자루를 내 앞에 내려놓았다.
“네 말대로 제 침대 밑에 숨겨 두었더군.”
“그럴 줄 아라써요. 자, 이제 그걸 여기 바닥에 쏟아부어 쥬세요.”
“이걸 다?”
“녜. 그래야지만 치료제를 만들 수 있써요.”
이든은 순순히 포대 자루 안의 내용물을 바닥에 부었다.
그 안에서 도토리며 캐슈넛, 땅콩 같은 견과류부터 시작해서 크고 작은 열매들과 곡식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많이도 모았군.”
“겨울에는 음식을 저장해 놓는 게 다람쥐들의 습성이니까여.”
어디 보자.
‘여기 분명 있을 텐데.’
나는 바닥에 쪼그려 앉은 채로 본격적으로 츄릅 열매를 찾기 시작했다.
꽤 많은 양이라서 나 혼자 찾으려면 꼬박 하루는 더 걸릴 것 같았다.
“리챠드한테 도와달라구 해야 하나…….”
막막함에 무심코 혼자 중얼거렸는데, 이든이 내 옆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뭘 찾으면 되는 거지?”
“백쟉밈이 도와쥬시게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딱히 할 게 없으니까 그러는 것뿐이다.”
“감사함미다! 민들레 씨처럼 솜털이 달려 있는 분홍 열매를 찾아 주시면 뎨요.”
“이런 거 말하는 건가?”
이든이 많은 음식들 중에서 단박에 내가 말한 츄릅 열매를 골라냈다.
“헐, 대박. 오또케 그렇게 빨리 찾아써요?”
“이 정도는 우리 사자들에게 기본이지.”
은근슬쩍 그의 양어깨가 기세등등해졌다.
나는 한참을 들여다봐도 한 개를 찾을까 말까인데.
역시 사냥감을 쫓던 습성 때문에 그런가?
그의 집중력은 대단했다.
“백쟉밈 덕분에 빨리 찾을 수 있겠따.”
“여기도 있네. 여기도 있다. 여기. 그리고 여기와 여기에도 있군.”
“백쟉밈 최고!”
칭찬은 사자를 춤추게 하는 걸까?
보이는 족족 걸러 내는 그 덕분에 츄릅 열매를 찾는 데 속도가 붙었다.
‘그냥 손 놓고 구경만 할 줄 알았는데, 의외네.’
우리는 함께 팔을 걷어붙이고 열매를 찾아냈다.
어느덧 바구니에 츄릅 열매가 가득해졌다.
“이 정도면 된 거 같아여!”
나는 츄릅 열매가 담긴 바구니를 번쩍 들어 올렸다.
“토리 무크가 걸린 병의 원인이 저 열매라고 하지 않았나?”
“녜. 마쟈요.”
“근데 어찌 이 열매로 치료제를 만들겠다는 거지?”
“원래 모든 음식이 잘 쓰면 약이고 잘못 쓰면 독인 법이거둔요.”
표정을 보니 내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뭐, 그래도 상관없다.
몸소 만들어서 보여 주면 되는 거니까.
“일단 열매는 제가 씻을 테니까, 백쟉밈이 불 좀 지펴 쥬세요.”
내가 흐르는 물에 츄릅 열매를 깨끗이 씻어 오는 동안 그가 화로에 불을 붙여 놓았다.
그릇에 담은 츄릅 열매를 그에게 넘겨주었다.
“자, 이제 이걸 다 으깨면 됨미다.”
“지금 이걸 나보고 하라는 건가?”
이든이 표정을 굳히면서 싫은 티를 냈다.
‘으음. 그래도 소용없어요. 백작님을 어떻게 꼬드길지는 대충 감 잡았으니까.’
나는 으흥흥 웃으며 양쪽 엄지를 그에게 펼쳐 보였다.
“백쟉밈은 츄릅 열매 찾는 거에도 최고니까, 으깨는 것도 분명히 최고로 잘하실 거예요. 제 말 맞쬬?”
“……당연하지.”
그가 군말 없이 츄릅 열매가 든 그릇과 주걱을 받아들였다.
역시 그러실 줄 알았어요.
으흥흥, 웃음을 흘리며 그가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꾸욱.
이든은 오만상인 채로 츄릅 열매를 으깨기 시작했다.
토독독!
시원하게 터지는 과즙에 호박색 동공이 동그랗게 커졌다.
“!”
“그래도 할 만하죠?”
“……크흠!”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점점 주걱질 속도가 빨라지는 걸 보니 나름 재미가 붙었나 보다.
금세 내 부탁을 끝마친 그가 그릇을 도로 건넸다.
“다 끝냈다.”
“역시 백쟉밈이 최고에요! 그러니까 이제 선반에서 타피오카 전분 좀 꺼내 쥬세요.”
또? 라는 표정으로 이든이 나를 바라봤다.
“은근히 시켜 먹는 것 같은데.”
“에이, 느낌 탓이에오. 저는 아가라 저기 선반 위까지 키가 닿지 않아서 키 크고 멋찐 백쟉밈께 정중히 부탁드리는 건걸요?”
순수한 표정을 지으며 선반 가장 위에 놓인 타피오카 전분을 가리켰다.
그는 미심쩍은 표정을 거두지 않으면서도 순순히 내게 전분을 가져다줬다.
“감사함미다, 백쟉밈.”
커다란 솥에 이든이 으깨 준 츄릅 열매와 타피오카 전분을 넣었다.
‘이제 빙의 전 내 재능과 솜씨를 발휘할 때가 왔나?’
왕년에 반려동물을 위한 용품들을 만들어 본 경험이 많은 나였다.
이 정도는 식은 죽 먹기지!
뜨거운 불에 달궈진 솥 안에서 츄릅 열매즙은 금세 보글보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앗챠챠, 타면 안 되는뎨.”
나는 내 키만 한 손잡이가 기다란 국자를 들고서 아래가 눌어붙지 않도록 부지런히 휘젓기 시작했다.
끙차 끙차.
몇 분 동안 열심히 반복하니, 묽었던 츄릅 열매즙이 시중에서 파는 고양이 간식 츄르처럼 되직하게 변했다.
“토리는 다람쥐 수인이니까 치료제를 환 모양으로 만들면 되겠쬬?”
“환?”
“음, 그러니까…… 동글동글 토끼 똥 같은 모양이요!”
“왜 하필 비유를 해도.”
“헤헤, 아무튼 토리가 동그랗게 생긴 도토리나 견과류를 좋아하쟈나요.”
토리용 치료제는 따로 꺼내 전분을 더 추가했다.
그러자 더욱 걸쭉해져서 동글동글하게 뭉쳐지기도 했다.
나는 깨끗이 씻은 손으로 적당한 크기의 환을 여러 개 만들어 냈다.
‘이러니까 보육원 언니 오빠들이랑 했던 소꿉놀이가 생각나네.’
추억에 잠긴 채 하다 보니 토리를 위한 치료제가 금방 완성됐다.
“다 됐써요. 짜잔, 완성!”
동글동글 예쁘게 빚은 치료제를 이든의 앞에 내보였다.
“남겨 둔 건 뭐지?”
“백쟉밈이랑 리챠드에게 줄 것듀 만들어야죠.”
“……어째서?”
그의 표정이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그야 당연하죠! 수녀밈께 식구끼리는 이런 걸 나눠 먹는 게 당연한 거라구 배워써요!”
“그냥 한꺼번에 만들어서 나눠 주면 될 것을, 뭐 하러 굳이.”
“백쟉밈이랑 리챠드랑 서로 입맛이 다르자냐요. 백쟉밈 것은 수프처럼 묽게, 리챠드 것은 바게트처럼 딱딱하게 만들어 드릴께여.”
고양이용 츄르 만들기와 강아지용 개껌 만들기에 이미 통달한 나였다.
‘분명 입맛에 맞으실걸요?’
뿌듯한 얼굴로 으흥흥, 웃고 있는 내게 그가 문득 질문을 던졌다.
“그것도 네 예지 능력인가?”
“녜?”
“인간 주제에 수인의 습성에 대해서 잘 아는 거 말이야.”
“알고 있으면 안 되는 곤가요?”
혹시 내가 실수한 건가?
슬그머니 눈치를 보면서 물었다.
“보통 이곳의 인간들은 수인을 학대하는 것부터 배우는 거 아니었나?”
이든의 말이 맞다.
에덴 제국 모든 어른들이 자신의 아이들에게 그리 가르친다.
수인은 천성이 악한 것들이라 매로 다스려야만 한다고.
심지어 우리 천사 같은 수녀님도 가급적이면 수인과 엮이지 말라고 하셨다.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원래 머리 검은 짐승이 더 무서운 법이랬어.’
인간보다 악한 동물은 없다.
인간들이 수인을 사지로 몰아서 그들도 살고자 발악하는 것뿐.
“그건 누가 봐도 잘못된 거쟈냐요.”
“…….”
그가 무어라 더 말을 꺼내려고 입술을 열려는데,
“소인은…… 소인은 아직 배고픕니다!”
문 너머로 반쯤 이성이 나간 토리의 울부짖음이 쩌렁쩌렁 들려왔다.
나는 토리의 치료제가 든 바구니를 꼬옥 끌어안으며 말했다.
“얼른 가요. 토리를 얼른 구해 죠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