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142)

15화

오물,

오물오물,

오물오물오물.

다행히 이든과 내가 만든 치료제는 토리의 입맛에 잘 맞았다.

토리가 막 다섯 번째 치료제를 입에 넣었을 때, 까만 콩 같은 눈동자에 생기가 돌아왔다.

벌크업 되었던 몸도 원래의 앙증맞은 크기로 돌아와 있었다.

“……오잉?”

번뜩 정신을 차린 토리가 눈을 느릿하게 끔뻑거렸다.

아직 그에게는 상황 파악이 필요했다.

“이제 좀 정신이 드나?”

그새를 참지 못하고 이든이 토리에게 물었다.

“헉!”

놀란 토리가 헛숨을 들이키며 치료제를 바닥에 툭, 떨어트렸다.

토로로로로록.

그의 손에서 벗어난 동글동글 잘 빚은 환들이 내 발 앞으로 굴러왔다.

잔뜩 붉어진 양 뺨을 감싸 쥐고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니 그제야 내가 아는 토리의 모습이었다.

“소…… 소인이 왜……. 어째서 이런 추태를…….”

“표정을 보아하니 멀쩡해진 모양이군. 이제 어떻게 된 일인지 앞뒤 정황을 말해 봐.”

“기억이……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기억 상실이라도 걸린 건가?”

이든이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두 눈은 토리에게 향해 있었지만, 내게 구하는 자문이었다.

“송구합니다. ……소인, 각하께 면목이 없습니다.”

토리의 목소리가 잔뜩 풀이 죽었다.

그는 이든이 믿고 맡기는 세작 중 하나였기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딱, 딱, 딱.

토리가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작은 것이라도 기억해 내려고 애쓰는 모습이 안쓰럽게 보였다.

‘이성을 아예 잃을 정도로 폭주해서 그동안의 기억이 날아간 건가?’

조금은 예상한 일이었기에 나는 침착하게 토리를 달랬다.

“괜챠나요. 츄릅 바이러스의 후유증 때문이에요. 시간이 지나면 기억이 차츰 돌아올 꼬에요.”

“부디 소인도 그러길 바랍니다.”

“어디서부터 기억이 끊긴 거지?”

작게 신음하는 소리를 내며 곰곰이 생각에 잠긴 토리가 천천히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소인은 그저 각하께서 주신 서신을 신속히 전달하러 가고 있었습니다.”

“서신이라면 이번에 리아노 공작가 쪽에 붙은 감시자들에게 보낸 걸 말하는 건가?”

“네. 분명 공작가의 담을 넘었던 기억까지는 있습니다. 접선 장소에도 무사히 도착한 것 같은데…….”

“그 이후의 기억이 끊긴 건가?”

“그렇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는 더 알아봐야겠군.”

역시 내 생각이 맞았다.

‘그 에피소드의 전조였네.’

리아노 공작가는 에덴의 세도가 중 하나로, 유능한 마법사들을 대대로 배출해 온 명망 높은 가문이다.

늘 명예를 중시하는 그에게 딱 하나 없는 게 있다면 그것은 재물이었다.

그는 은연중에 물욕을 가지고 있었지만, 남들처럼 대놓고 표현하지는 않았다.

‘늘상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입버릇처럼 달고 사는 양반이 그랬다가는 체면이 망가질 테니까.’

그런 그가 재력을 잡게 되는 사건이 바로 ‘츄릅 바이러스’ 사건이었다.

이 바이러스를 처음 창시하고 전염시킨 것도 리아노였고, 치료제를 개발한 것도 그였다.

제가 만든 병으로 돈을 쓸어 모으면서도 겉으로는 구원자처럼 보일 수 있으니, 리아노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다.

빌런 주제에 참 머리도 좋아.

‘지금쯤 떼돈 벌 생각에 들떠 있겠지?’

미안하지만 리아노의 뜻대로 될 일은 없었다.

내가 그 미래를 바꿔 버릴 거니까.

새벽의 식량 창고 사건은 그렇게 일단락됐다.

* * *

나는 날이 밝자마자 이든의 집무실을 찾아갔다.

“안뇽하세요, 백쟉밈.”

“무슨 용건이지?”

“그게…… 어제 예지몽을 꿨는데,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여.”

이든이 보고 있던 신문을 내려놓았다.

“나와 관련된 일인 건가?”

“녜. 아마 이걸 잘 이용하면 앞으로의 비스 생활이 훨씬 유리해지실 꼬에요.”

“말해 봐라.”

나는 그가 턱짓한 소파로 폴짝 올라가 앉았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짧게 고민한 나는 결론을 내렸다.

역시 설득에는 충격 요법이 좋겠지?

“우리 사업 하나 할래여?”

“……뭐?”

내가 너무 돌직구를 날려 버린 건가?

앞뒤 다 자르고 본론부터 꺼낸 나 때문에 이든이 보기 드물게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역시 설명이 필요하겠쬬?”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니 그가 허탈한 웃음을 뱉었다.

“네 능력이 특별하다는 건 인정한다.”

그는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책상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마에서부터 시작되어 눈 아래로 이어진 흉터가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났다.

이든이 나를 지긋이 응시하며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사업은 애들 장난이 아니야.”

“알고 이써여.”

“그리고 난 인간들처럼 돈벌이에 관심도 없고.”

“그것두 알아요. 하지만 꼭 하셔야 할걸여?”

“어째서지?”

그의 물음에 나는 허공에 붕 떠 있는 다리를 흔들면서 대답했다.

“이 기회를 백쟉밈이 놓치신다면 리아노 공작가가 세력을 확장하게 될 테니까여.”

“!”

그가 오늘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역시 원수에 관련된 일에는 즉각 리액션이 돌아오네.’

나는 순진한 아이처럼 눈을 빛내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백쟉밈은 그걸 원치 않으실 것 같아서여.”

“…….”

개인 의자에 앉아 있던 그가 내 맞은편 소파로 자리를 옮겨 왔다.

이제야 본격적으로 들을 마음이 생겼나 보네.

나는 판이 내 손에 거의 넘어왔다는 것을 느꼈다.

“자세하게 말해 봐.”

“츄릅꽃을 개발한 사람이 리아노 공쟉이에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토리 무크가 기억을 잃은 것도 그 근방이고, 그만한 마법을 다루는 가문은 그곳밖에 없으니까.”

역시 유능한 세작들을 두셨네.

벌써 거기까지 알아차린 걸 보면, 수하들의 실력이 소설에 서술된 것보다 더 대단한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것까진 모를걸?’

이건 원작 소설을 읽은 독자여야만 아는 비밀일 테니까.

“그 공쟉이 츄릅꽃을 만들어 낸 이유도 혹시 아세요?”

“또 그 빌어먹을 학술지에 기재할 연구를 한답시고 죄 없는 식물을 실험한 거겠지.”

“대외적으로는 그게 맞는데 실은 이유가 따로 이써요.”

역시나, 그가 부리는 세작들이 아직 파악하지 못한 정보였다.

이든의 표정을 보고 대충 유추할 수 있었다.

나는 내심 안심하며 본격적으로 그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츄릅 바이러스를 퍼트려서 돈벌이할 생각이거든여.”

그것을 시작으로 츄릅꽃과 관련돼서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을 이든에게 말해 주었다.

어느덧 그는 진지하게 내 말을 듣고 있었다.

내 제안을 기막혀하던 처음과는 상반된 태도였다.

“그래서 네 말은, 리아노 공작이 사업권을 들고 나서기 전에 우리가 먼저 치료제 사업을 시작하자?”

“녜. 비스에는 독점권 제도가 있자냐요.”

그가 아래턱을 쓸어내리며 신중히 고민한 끝에 입술을 벌렸다.

“고려해 보도록 하지.”

“진짜여?”

나는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에게 재차 물었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한 대답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면 충분했다.

이든이 고려해 보겠다는 건 곧 실행시키겠다는 말을 돌려 말하는 거였으니까.

“전 그럼 미리 여러 식감으로 만들어 놓고 있을게여!”

“그러든가.”

좋았어. 오늘부터 이든의 정식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밤샘 작업이다!

나는 의지를 불태우며 곧장 부엌으로 오도도도 달려갔다.

* * *

밤이 깊었다.

이 시간이 되면 이든은 리챠드에게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보고받는다.

보통은 그의 세작들이 가져온 정보들이나, 복수에 관련된 일이 주된 주제였다.

그런 대화를 나눌 때면 늘 심각한 분위기이곤 했는데, 오늘은 좀처럼 진지할 수가 없었다.

오도독, 오도도독.

모든 게 다 리챠드가 정체불명의 딱딱한 막대형 비스킷을 시끄럽게 먹어 대는 탓이었다.

“아까부터 뭘 그렇게 주워 먹는 거지?”

“아, 이거요? 아가님께서 저를 위해서 특별히 만들어 주셨습니다.”

“……너를 위해서 특별히?”

이든의 미간에 실금이 생겼다.

리챠드는 그 변화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마냥 해맑게 비스킷을 씹어 댔다.

“네. 토리 씨가 걸렸던 병의 치료제를 여러 식감으로 만드는 방법을 연구 중이라고 하시던데, 이건 제 입맛에 맞게끔 변형시켰다고 하셨습니다.”

“쓸데없는 짓을 했군.”

“아가님께서 꽤 솜씨가 좋습니다. 어떻게 제 취향을 그리 딱 맞추신 건지.”

“시끄러워.”

이든은 괜히 애꿎은 신문을 뒤적거리며 리챠드를 밀어냈다.

그제야 그가 심통이 나 있다는 걸 깨달은 리챠드가 킬킬 웃으며 비스킷을 내밀었다.

“각하께서도 맛보시렵니까? 당장 팔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아주 맛있습니다.”

잠시 망설이던 이든이 휙 고개를 돌렸다.

“됐다. 필요 없어.”

“에이, 나중에 후회하지 마시고요.”

“필요 없다니까.”

“정 싫으시다면 뭐…….”

리챠드가 마지막 남은 비스킷을 날름 먹어 버렸다.

이든은 그 모습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불끈 주먹을 쥐고 말았다.

저 빌어먹을 똥개 같으니라고.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지만, 확 리챠드의 엉덩이를 걷어차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속을 알 리가 없는 리챠드가 해맑은 얼굴로 화제를 전환했다.

“그러고 보니 아가님과 사업 얘기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아직 허락한 건 아니야.”

“어라라. 그렇다기에는 아가님께서 너무 열심이신걸요? 오늘 밤을 아주 꼴딱 샐 것 같은 기세이시던데.”

“아직도 만들고 있는 건가?”

이든이 창문 쪽을 바라봤다.

그의 집무실에서 대각선에 위치한 부엌의 불이 아직 꺼지지 않았다.

‘……매번 신경 쓰이는 짓만 하는군.’

이든의 시선이 부엌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네. 조금 전에도 슬쩍 보고 왔는데, 열심히 만들고 계셨습니다. 쉬었다가 내일 하라고 말씀드렸는데도 어찌나 의욕적이시던지.”

“…….”

리챠드는 실시간으로 구겨지는 이든의 표정을 보면서 웃음을 흘렸다.

‘아가님이 걱정되면 걱정되신다고 그냥 솔직하게 말씀하실 것을.’

이미 그의 마음속을 훤히 들여다본 리챠드였다.

“아가님께서 설명하시길 이게 치료제도 되지만 동시에 예방제도 되기 때문에 수요가 엄청날 거라고 하시더군요. 생각보다 사업에 소질이 있으신 것 같았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누구 딸인데.

이어지는 말은 이든 혼자 생각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입 밖으로 뱉었다가는 배은망덕한 똥개가 신나게 놀려 댈 게 뻔했으며, 저 역시도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어서였다.

물론 그런 틈새를 놓칠 리챠드가 아니었다.

“한데, 표정이 왜 그러십니까?”

“보고나 얼른 시작해.”

이든은 재빨리 말문을 돌렸다.

더 말이 길어졌다가는 분명 리챠드에게 꼬리를 잡힐 터.

다행히도 리챠드가 순순히 수첩을 펼쳐 들었다.

“일전에 각하께서 제게 알아보라고 명령하셨던 아기님 일에 관련된 보고 사항입니다.”

“루나에 관련된 일이라면, 살수의 소속을 알아낸 건가?”

“예. 그때 폐하께서 한 줌의 비료로 만들어 버린 그 살수가 다페 남작가에 연줄을 대고 있더군요.”

이든의 표정이 단번에 굳었다.

“번번이 거슬리는 짓거리만 골라서 하는 패거리군.”

이번만큼은 리챠드도 마찬가지였다.

항상 웃음기가 넘치던 그의 낯에서도 미소 한 줌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찌 처리할까요?”

“적당히.”

제대로 손봐 주는 건, 내가 직접 할 테니까.

뒷말은 적어도 일 년 치 놀림거리였기에 속으로 조용히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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