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임무를 받은 리챠드가 조용히 저택을 떠났다.
어느새 시곗바늘은 부지런히 새벽 세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창문을 여니 익숙한 새벽 공기가 밀려들어 왔다.
‘아직도 하고 있나 보군.’
그의 시선 끝에는 환히 불이 켜져 있는 부엌이 닿아 있었다.
“……물론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말은 그렇게 해 놓고서 그는 한참 동안 창가를 떠날 줄 몰랐다.
새벽 공기에 코끝이 시렸다.
난로는 때 가면서 하는 건가?
‘어린애 주제에 얌전히 일찍 자러 갈 것이지, 왜 자꾸 신경 쓰이게…….’
평소였다면 사색에 잠겨 복수 계획을 다듬을 그였는데, 어째서일까.
오늘따라 도통 생각에 깊게 빠져들 수가 없었다.
“리챠드 그놈이 쓸데없는 소리를 해 가지고.”
무정하게 뱉어낸 말과는 달리, 그의 두 다리는 이미 집무실을 나서고 있었다.
주변에 아무도 보는 이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괜히 찔려 스스로 변명했다.
“그저 잠시 산책만 하려는 거다.”
그의 걸음이 향한 곳은 평소 잘 가지도 않던 부엌 방향이었다.
달그락, 달그락.
오독, 오도도독, 오독 오독!
부엌에 가까워질 즈음,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직 안 자고 있을 거란 걸, 예상하고는 왔다만…….
막상 직접 확인하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뭐라고 말을 걸어야 하지.’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 없으니, 당장 폭신폭신하고 안락한 침대가 있는 네 방으로 돌아가라고?
아니면 땔감이 남아도니까 쓸데없이 감기에 걸려서 코를 훌쩍대지 말고 난로나 실컷 쬐라고?
“하아.”
어째 둘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보다 빨라진 발걸음이 부엌 앞에 멈추었다.
“…….”
일단 들어가 보자.
이렇게 생각해 봤자 답이 나오지 않을 걸 알았기에 그는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하나, 문을 열고 들어가 마주친 이는 생각했던 이가 아니었다.
“토리 무크?”
“……가, 각하?”
놀란 토리가 손에 쥐고 있던 치료제를 툭, 떨어트렸다.
데구르르르르.
둥글둥글한 치료제가 두 남자 사이를 가로질러 구르다 이든의 구두코에 톡, 부딪혔다.
“그 병이 재발이라도 된 건가?”
“아닙니다. 소인 그저 아가님께서 츄릅 열매를 구해 달라는 심부름을 하러 왔다가, 마음껏 드셔도 좋다고 허락하셨기에…….”
토리가 말을 할 때마다 볼록하게 나온 양 볼에서 치료제가 와르르 떨어져 내렸다.
두 남자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
“이, 이건 그러니까…….”
“한가하게 농땡이나 피울 시간이 없을 텐데.”
“소인 얼른 다녀오겠습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토리는 부리나케 부엌을 빠져나갔다.
‘애써 고생해서 만들어 놓은 걸 왜 퍼 주는 건지.’
역시나 이해할 수 없는 인간 아기였다.
혼자 남게 된 이든은 부엌을 둘러보았다.
정작 자기가 찾던 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새 잠이라도 자러 간 건가.”
차라리 그쪽이 더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화로에 불은 꺼져 있었지만, 아직 솥에 열기가 남아 있었다.
방금 전까지 있었던 것 같은데.
그는 문득 바닥에 츄릅 열매가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쪽에 있나.’
아이가 만들어 놓은 흔적을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움직였다.
마침내 발견한 것은 곤히 잠들어 있는 천사 같은 아이의 모습이었다.
“……쓸데없는 데 열심이군.”
치료제를 만들다가 깜빡 잠이 든 건지, 앙증맞은 손에 국자가 꼭 쥐어져 있었다.
토실토실하게 살이 오른 복숭앗빛 뺨에는 붉은 과즙이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칠칠치 못하네.”
그는 무심결에 손을 뻗어 아이의 뺨에 묻은 것을 닦아 주었다.
더럽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우응……, 백쟉밈.”
“…….”
순간 아이가 깬 줄 알고 이든은 뻣뻣하게 굳었다.
“백쟉밈 줄 꼬야…….”
나를 주겠다고?
대체 뭘?
그제야 잠꼬대를 웅얼거리는 아이의 머리맡에 삐뚤빼뚤 써진 글씨와 함께 스틱형 코팅 종이에 포장한 치료제가 눈에 들어왔다.
맞춤법도, 그어진 획도 완벽한 것 하나 없이 엉망이었다.
그럼에도 이든은 그 글자가 싫지 않았다.
“이런 이상한 걸 대체 누가 먹는다고.”
이상하게 입꼬리가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을 통제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적힌 스틱형 치료제를 한참 만지작거리다가 은근슬쩍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 * *
어제저녁까지만 해도 오늘 아침 내 계획은 이러했다.
‘종일 고생해서 만든 츄르 맛 치료제를 백작님께 선물해야지.’
야심 찬 계획도 함께 품고 있었기에 꼭두새벽부터 눈이 번쩍 떠졌다.
그런데 이게 웬걸?
일어나 보니 간밤에 힘써 만든 츄르 맛 치료제가 사라지고 없었다.
“어? 어어어어?”
분명 머리맡에 둔 것 같은데?
제자리에 있어야 할 츄르 맛 치료제는 온데간데없었고, 내 어깨에는 주인 모를 남성용 코트가 덮여 있었다.
“어디 갔지? 이건 또 모야?”
내 몸 전체를 덮은 두꺼운 겨울용 코트를 벗어서 이리저리 살폈다.
교복처럼 이름표가 붙어 있는 것도 아니니 누구의 것인지 알 방도가 없었다.
나에게 이런 걸 덮어 줄 만한 사람이라면 아무래도 역시…….
‘리챠드인가?’
어림짐작할 뿐이었다.
‘당연히 백작님은 아닐 테니까.’
그건 터무니없는 일이라 생각하면서 코트에 얼굴을 묻었다.
킁킁.
왠지 모르게 익숙한 체취가 깃들어 있었다.
덕분에 따뜻하게 꿀잠 자기는 했다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이든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내 야심작이 사라졌다는 게 문제였지!
“어제 만든 것이 진짜 맛이 기가 맥혔는뎨……. 그거 맥이고 사업하자고 한 번 더 꼬드기려고 했는뎨!”
생각할수록 한숨만 나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여분으로 몇 개 더 만들어 놓을걸.
넉넉하게 만들어 놓지 않은 간밤의 일이 조금은 후회스러웠다.
그렇다고 이대로 마냥 있을 수는 없어 어질러진 부엌을 뒤지기 시작했다.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니. 고약한 사자를 온순한 개냥이로 만들어 줄, 내 사랑스러운 조련 용품아!’
게다가 그것은 내 미래를 위한 자금줄이 되어 줄 물건이기도 했다.
‘이든이 모든 복수를 끝내고 더는 에덴 제국에서 머무를 이유가 사라지게 된다면, ……더는 그에게 내가 필요 없을지도 모를 테니까.’
어쩐지 입 안이 썼다.
‘그러면 나를 파양하겠다고 할 수도 있겠지?’
그런 날이 올지도 모르니 독립 자금을 준비해 둘 필요가 있었다.
‘그걸로 떼돈 벌어서 보육원 식구들이랑 살 집을 사야 하는데.’
물론 다시 만들면 되는 문제였지만, 츄르 맛을 내는 데 사용한 특별 재료를 다시 구하려면 다음 주쯤이나 만들 수 있었다.
‘이번 주 내로 설득해야 리아노 공작보다 먼저 치료제 독점권을 가질 수 있어.’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져서 찾는 손길이 더 분주해졌다.
“설마 토리가 다 먹어 버린 곤가?”
그러고 보니 간밤에 츄릅 열매를 추가로 더 구해 준 토리에게 도토리 맛 치료제를 마음껏 먹어도 좋다고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토리에게 물어봐야겠어.’
나는 곧장 도토리 모양 펜던트가 달린 설렁줄을 당겼다. 토리를 직속으로 부를 때 사용하는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부엌으로 찾아왔다.
“소인 왔습니다, 아가님. 간밤에 맡기신 편지는 보육원의 친우분께 잘 전달해 드렸습니다.”
“뇨아에게 벌써 편지를 전해 주고 온 거예여?”
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토리가 워낙 날랜 발을 가졌다기에 전서구를 보내는 것보다 더 빠를 거라고는 예상했다만, 동이 트기도 전에 이미 다녀왔을 줄이야.
새삼 그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네. 친우분께서 곧 답신을 준비해서 보낼 터이니 잊지 말고 기다려 달라고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고마워요, 툐리.”
“이게 소인의 일인걸요. 한데 이 일을 하문하시려고 이른 새벽부터 소인을 부르신 겁니까?”
뒤늦게 내가 본론을 까먹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 맞다. 툐리. 혹쉬, 겨울잠 준비해요?”
“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온지…….”
“어제 동글동글하게 생긴 치료제 말고 길쭉하게 생긴 것도 가져갔나 싶어서여.”
다람쥐의 본능상 여러 개를 챙기다가 이든에게 줄 것까지 가져갔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아닙니다! 중간에 각하께서 오신 바람에 소인은 동그랗게 생긴 것을 두 개밖에 먹지 못했습니다.”
“백쟉밈이 왔다 갔다구여?”
“예. 소인은 길쭉하게 생긴 것은 맹세코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
눈이 절로 커다랗게 떠졌다.
이든이 부엌에 왔다 갔다니, 대체 언제?
내가 잠들었을 때?
……아니, 그것보다 무슨 일로?
답을 알 수 없는 질문들이 머릿속을 메꿨다.
“각하께 한번 여쭤보십시오. 치료제의 행방을 알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다녀올게요, 툐리!”
어쩌면 이 옷도 설마?
나는 밤새 내 어깨에 덮어져 있던 코트를 챙겨 들고 이든의 집무실로 쫄래쫄래 걸음을 옮겼다.
똑똑똑똑.
노크하기가 무섭게 대꾸도 없이 문이 열렸다.
직접 문을 열고 나온 이든을 보고 솔직히 조금 놀랐다.
“저인 줄 어또케 아셨어요?”
“노크 소리가 낮은 곳에서 들리기에.”
그가 옆으로 비켜서며 안쪽을 가리켰다.
“들어올 건가?”
“녜. 실례하겠슴미다.”
언제 또 그가 마음이 바뀔지 모르기에 나는 냉큼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몇 번 와 본 곳이라서 그런지 소파가 반갑게 느껴졌다.
변함없이 정갈하게 정리된 집무실을 둘러보는 나를 지나쳐, 그가 개인용 책상으로 가 앉았다.
“내게 할 말이 있어서 온 건가?”
오. 어떻게 말을 꺼낼까 사실 고민하던 참이었는데, 이렇게 먼저 운을 떼어 주니 고마웠다.
“혹쉬…… 츄르 마싯었써요?”
“츄르가 뭐지?”
“제가 만든 치료제 이름이에여.”
“…….”
움찔.
그가 눈에 띄게 동요하며, 목청을 가다듬었다.
“크, 크흠……!”
“?”
갑자기 왜 그런담.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별안간 그는 찻잔에 차를 따르며 나를 힐끔 쳐다봤다.
“그런 걸 왜 내게 묻는 거지?”
“토리가 어젯밤에 백쟉밈이 부엌에 오셨었다고 해서여.”
“……그런 거 본 적도, 먹은 적도 없다.”
“그, 길쭉하게 생긴 포장지에 들어 있던 건뎨.”
“그게 뭔지 나는 모른다니까.”
그가 정색하며 신문을 집어 들었다. 신문 뒤에 가려진 그의 표정을 보고자 고개를 쭈욱 내밀었는데, 철통 방어라서 좀처럼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정말요?”
“정말.”
“…….”
“…….”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나는 신문을 보는 척하면서 찻잔을 들이키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 조심스레 입술을 뗐다.
“그런데 이짜나요, 백쟉밈.”
“왜.”
“신문 거꾸로 드셨는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