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그런데 이짜나요, 백쟉밈.”
“왜.”
“신문 거꾸로 드셨는뎨.”
내 지적에 그가 머금고 있던 차를 풉! 하고 뿜어냈다.
콜록! 콜록, 콜록!
사레에 걸려 기침을 해 대는 그의 귀 끝이 새빨갛게 변했다.
“오해하지 마라. 수련한 것뿐이니까.”
“무슨 수련이여?”
“……거꾸로 매달린 채로도 신문을 빠르게 읽을 수 있는 기술을 연마한 것이다.”
그런 이상한 걸 연습해서 어디에다가 써먹으시려고.
말도 안 되는 핑계였지만 그래도 그가 명색이 수인의 왕, 사자이니까 속아 주기로 했다.
“역시, 백쟉밈은 준비성까지 엄청나시네여.”
“큼! ……할 말은 그게 끝인가?”
“아. 이거 옷, 백쟉밈이 두고 가신 거죠?”
나는 들고 온 어른용 코트를 가지고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여기요. 덕분에 밤에 안 추웠어요. 감사함미다.”
“그것 역시 모르는 옷이다.”
그가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거짓말, 백쟉밈 꺼면서.”
“아니래도.”
“그렇지만 여기서 백쟉밈의 핑쿠 쩰리 냄새가 났는걸요?”
“뭔…… 젤리?”
차마 그에게 ‘당신 앞발이요.’라고 대답할 순 없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이써요. 아무튼, 이 옷이 백쟉밈 께 아니라는 거죠?”
“그렇다면…… 어찌할 생각이지?”
“진짜 주인을 찾아서 감사 인사를 드려야져. 역시 리챠드인 곤가?”
“그럴 리가.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봐라.”
뭐야. 자기 것도 아니라고 했으면서.
내 혼잣말에 굳이 발끈하며 부정하는 그를 보고 확신했다.
‘반응 보니까 본인 것 맞네.’
하여튼 부끄러움 많은 사자 같으니라고.
“모 어쨌든, 리챠드에게 물어보면 주인을 알게 되겠쬬. 리챠드는 이 저택에 계신 분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집사님이자냐요.”
도로 옷을 들고 가려는데, 이든이 내 어깨를 덥석 붙잡아 세웠다.
“……그 옷, 두고 가라. 내가 직접 주인에게 가져다줄 테니.”
“주인이 누군지 아세여?”
“그래. 그러니까 굳.이. 리챠드에게 이 일을 말할 필요는 없다. 절대.”
나는 게슴츠레 좁힌 눈으로 그를 아주 빤히 바라봤다. 그러자 그가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모야. 아까는 처음 보는 옷이라고 하셨으면서.”
“아무튼, 놓고 가.”
그가 자신의 책상 위를 가리키며 단호히 말했다.
“녜.”
나는 까치발을 들고서 테이블 위에 ―그의 것으로 1,000% 확신되는― 겨울 코트를 올려 두었다.
그러다 문득, 보고야 말았다.
책상에 쌓인 서류 더미 사이에 살짝 튀어나온 익숙한 색의 껍질을!
‘엇, 저건?’
직접 고른 포장지라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내가 애타게 찾았던 츄르 맛 치료제였다.
‘뭐야. 관심 없는 척하시더니. 이미 드셨나 보네?’
으흥흥흥. 웃음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그 음흉한 웃음은 뭐지?”
“녜? 뭐가요?”
나는 눈썹을 꿈틀거리는 그에게 순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분명…….”
그의 입술이 다시 열리려는데,
“각하, 안 주무시죠?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나이스 타이밍!
집무실 문 너머에서 리챠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하는 수 없이 하려고 했던 말을 집어삼킨 이든이 언제 그랬냐는 듯,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이제야 그다운 얼굴이었다.
끼익.
나는 문을 열고 들어온 리챠드와 곧장 시선이 마주쳤다.
“안뇽하세요, 리챠드.”
“어라, 두 분……?”
리챠드는 커다래진 밤색 눈동자로 나와 이든을 번갈아 바라봤다.
이내 그의 입술 끝이 슬그머니 말려 올라갔다.
“흐음, 이런 말씀 드리기 뭐하지만…….”
“같이 잔 거 아니니까 헛소리할 생각 마라, 리챠드.”
이든은 놀림당하기 전에 미리 선수를 쳐서 방어했다.
물론 그런 노력에도 리챠드의 은근한 눈빛은 사라질 줄 몰랐다.
“꼭두새벽부터 용건이 뭐지?”
“그러게 말입니다. 꼭두새벽부터 두 분이서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참으로 궁금하군요.”
리챠드가 놀리는 투로 되물었다.
‘리챠드는 목숨이 두 개인 걸까?’
나는 삐딱한 이든의 시선에도 굴하지 않고 싱글벙글 웃는 리챠드를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오늘을 네 제삿날로 하고 싶다고?”
“그럴 리가요. 언제나 그렇듯, 늘, 열렬히, 최선을 다해서 사랑합니다. 각하.”
리챠드가 냉큼 기다란 팔로 머리 위에 하트를 만들어 보였다.
그러자 이든은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고개를 반대쪽으로 휙 돌려버렸다.
“징그러우니까, 치워.”
“그 발언은 여린 제 마음에 크나큰 상처입니다만.”
“시끄럽고, 본론.”
리챠드가 손에 든 편지 봉투를 내밀었다.
“이걸 전해 드리려고 왔습니다.”
이든이 봉투를 건네받았다.
무슨 편지일까?
‘이 꼭두새벽부터 직접 와서 전달해 줄 정도라면, 이든에게는 엄청 중요한 소식이라는 건데…….’
은근히 호기심이 생겼다.
나는 까치발을 들고서 슬쩍, 그의 손에 들린 봉투 겉면을 훔쳐보았다.
봉투 끝을 고정하고 있는 실링 왁스 위에 비스의 대법원을 상징하는 인장이 찍혀 있었다.
어? 저건……?
“입양 허가서입니다.”
“!”
그 얘기를 듣자마자 가슴이 쿵! 울렸다.
‘나, 오늘부터 이든의 정식 딸이 되는 거야?’
상상했던 것보다 더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든은 지금 어떤 기분일까?’
힐끔 곁눈질로 그를 봤다.
실감이 나지 않아 얼떨떨한 나와는 달리, 그는 평온해 보였다.
“결과는 다음 주에 나오는 거 아니었나?”
“저번 달에 직원 충원을 했다더니 평소보다 빨리 서류 처리를 해 준 모양입니다.”
“그렇군.”
이든은 별말 없이 서류를 서랍에 챙겨 넣었다.
그를 대신해 리챠드가 다가와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축하드립니다, 아가님. 이제 정식으로 라이언하트가의 일원이 되셨네요.”
정말이지 태어나서 이렇게 심장 뛰게 하는 말은 처음이었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서류상으로 내 이름 두 글자 뒤에 ‘라이언하트’라는 성(姓)이 붙은 것도 벌써 지난주의 일이었다.
물론 아직 나는 내 이름에 적응 중이었다.
“루나 라이언하트.”
“!”
특히나 지금처럼 이든이 뜬금없이 풀 네임으로 부를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점심밥을 먹고 있던 나는 갑작스러운 그의 방문에 수저를 내려놓았다.
“왜여?”
“허락한다.”
“녜?”
다짜고짜 찾아와서 허락한다니.
뭐를?
앞뒤 다 잘라먹은 문장이 도무지 이해 가지 않아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가 자연스럽게 반대편 의자에 앉으며 신문을 펼쳐 들었다.
“저번에 네가 제안했던 그 치료제 사업이라는 거. 지원해 주겠다고.”
“졍말요?!”
지난주 내내 기다렸던 답변이라 밥상 앞이었다는 것도 까먹고 벌떡 일어섰다.
옆자리의 리챠드가 비어 있는 내 물잔을 채워 주며 웃었다.
“아가님께서 이리 좋아하시는 걸 보니, 지난주 내내 가게 자리를 보러 다니길 잘한 것 같습니다.”
“벌써 가게도 구해써요?”
“네. 아가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유동 인구가 많은 자리를 인수했습니다.”
“혹쉬, 메인 스트리트 쪽?”
거기 쪽이면 완전 대박인데.
오고 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홍보를 따로 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
“마침 포비에 식당 옆에 있던 오르골 가게가 폐업했더군요.”
“헉, 진짜여? 리챠드 최고!”
나는 양쪽 엄지를 펼쳐 보이며 폴짝폴짝 뛰었다.
‘그냥 상가 구석진 골목이라도 자리가 생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비스에서 가장 인기 있는 포비에 식당 옆자리라니!’
어쩌면 내가 계획했던 것보다 더 장사가 잘될지도 몰랐다.
“……왜 그놈이 최고인 거지?”
응?
언짢은 말투로 무어라 혼잣말하는 이든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곧장 신문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오늘은 또 뭐에 저렇게 심술이 난 거람.
‘아, 혹시 월세 때문인가?’
나는 살짝 리챠드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런데 리챠드. 거기 월세 짱 비싸지 않아여?”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건물을 통째로 사 버렸거든요.”
“녜?!”
이놈의 집구석, 스케일이 왜 이렇게 큰 거야?
대충 물가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사업에 관련돼서 재정적인 문제는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각하의 사비로 제가 다 충당해 둘 테니까요.”
응?
백작가의 재정에서 지원을 받는 게 아니라 이든의 개인 재산에서?
어리둥절해하는 나를 보며 리챠드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후후, 그렇게 됐습니다.”
어쩐지 리챠드가 흑막이 있는 것같이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이겠지?
“그나저나, 치료제의 이름은 정하셨습니까? 본격적으로 판매하려면 상품명부터 정하셔야 할 것 같은데.”
그건 이미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라 고민할 것도 없이 대답했다.
“녜. 츄르! 츄르라고 이름 지어써요.”
“츄르? 뜻은 모르겠지만, 왠지 입에 딱 붙는 어감이군요.”
“얼마 후면 라이언하트 가문이 비스에서 제일 영향력 있는 가문이 될 꼬에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츄르로 정복해 주마!
나는 불어나는 미래 자금을 상상하며 으흥흥, 웃음을 흘렸다.
* * *
확실히 돈 많은 게 좋기는 좋다.
이든의 돈으로 일꾼을 고용해서 만들기 시작하니, 오픈 물량이 금세 채워졌다.
이제 남은 건 때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며칠 뒤.
나는 사업에 관해 의논할 게 있어 이든의 집무실에 와 있었다.
대충 얘기를 끝마치고 돌아가려는데, 리챠드가 방금 막 배달 온 신문을 들고 뛰어 들어왔다.
“아가님, 각하! 기사 떴습니다!”
비스에서 가장 소식이 빠른 기르신 신문사의 것이었다.
이든이 신문을 건네받았다.
나는 잽싸게 그의 옆에 앉아 어깨너머로 기사를 함께 읽었다.
기르신 신문
제국력 1537년 1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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