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제국력 1537년 1월 31일.
에덴 제국 건국 아래, 비스에 이렇게 큰 혼란이 온 건 처음이었다.
츄릅츄릅병.
며칠 전 명명된 이 병은 사망률은 낮았지만, 높은 감염률 때문에 의료 당국은 애를 먹고 있었다.
무엇보다 환자들의 식욕을 감당할 만한 식량이 충분히 없었다.
“더! 더 내놔! 고기든 빵이든 있는 것 다 가지고 와!”
“손님, 죄송하지만 이제 저희 가게는 재료가 다 동나서 음식을 더 만들 수 없습니다요.”
“그럼 뺏어서라도 가져와! 배고파 죽겠으니까!”
공급보다 수요가 월등히 많아지자 자연스레 불만은 폭력의 형태로 표출됐다.
“죽고 싶지 않으면 음식을 어서 내오라니까!?”
“아이고, 살려 주십시오!”
세간에는 츄릅츄릅병이 의료계 혼자서만 짊어질 문제가 아니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바로 얼마 전.
라이언하트 백작가에서 ‘츄르 상점’을 오픈하기 전까지는.
“골라, 골라, 한 개에 1,000달란! 듀 개에 2,000달란! 세 개듀 2,000달란!”
녹음용 마도구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호객 멘트가 비스의 메인 스트리트에 울려 퍼졌다.
“오직 츄르 상점에서만 만날 수 있는 츄르츄르병의 유일한 치료제! 츄르 세트를 단돈 39,900달란! 단돈 39,900달란에 드림미다!”
발음이 어눌한 아기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츄르츄르병의 치료제라고?”
“어제 포비에 식당에서 난동 부리던 옆집 어르신이 츄르를 사 먹었는데, 그 자리에서 바로 정신이 돌아왔대.”
“정말?”
솔깃한 사람들이 하나둘, 사서 먹기 시작했다.
“이…… 이 맛은?!”
맛도 좋고 효과도 좋으니, 전국에 소문이 퍼지는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 * *
츄르 상점 오픈 딱 일주일 차.
매출이 달달했다.
츄르 매출이 상승 곡선을 그릴수록 츄릅츄릅병은 빠르게 진압되었다.
나는 오늘 아침, 리챠드가 가져다준 일주일 매출표를 보면서 침대 위를 뒹굴거리고 있었다.
“역쉬 K—홈쇼핑 멘트가 최고라니까.”
“어떤 놈이지?”
“깜짝이야!”
소리 소문도 없이 불쑥 등장한 이든 때문에 화들짝 놀라 폴짝 뛰었다.
나는 콩닥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서 그를 바라봤다.
모르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그의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다.
“언제 오셔써요?”
“방금. 한데 어디 가문이지? 남자인가?”
“누구여?”
“네가 조금 전 최고라고 얘기한, K 어쩌고 하는 놈 말이다.”
이든이 뚱한 얼굴로 물었다.
아, K—홈쇼핑.
딱히 이곳의 용어로 설명할 방도가 없어 대화 주제를 바꾸기로 했다.
“매출표 보셨써요?”
“…….”
가늘어진 눈매가 좀처럼 펴질 줄을 몰랐다.
‘기분 풀어 주는 데는 역시…… 맛있는 게 최고지.’
나는 츄르를 슬쩍 그에게 내밀었다.
“드실래여?”
“그런 거 안 먹는다니까.”
그가 고개를 팽 돌렸다.
하지만 나는 그의 바지 주머니에 삐죽 튀어나온 빈 츄르 껍데기를 발견한 지 오래였다.
으흥흥, 제대로 취향 저격인가 봐.
입이 워낙 짧고 까다롭기로 유명한 이든의 입맛을 사로잡았다는 사실에 뿌듯해졌다.
“이 기세면 츄릅츄릅병은 2주일 내로 해결될 꼬에요.”
“그다음부터는 매출이 떨어지겠군.”
“단기적으로는 그렇져.”
“또 무슨 계획이라도 있나?”
그가 우려하는 대로 츄르 매출이 하락할 일은 없을 것이다.
‘백작님의 주머니에 꽂혀 있는 빈 츄르 껍데기가 그 증거예요.’
나는 씨익 미소 지었다.
“츄릅츄릅병이 사라질 때쯤이면, 마약 츄르의 맛에 다들 푹 빠져 버릴 꼬에요.”
“……정말 마약이라도 탄 건가?”
“비슷해여.”
으흥흥. 승리자의 웃음이 절로 나왔다.
아마 그때 되면 츄르를 안 먹어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어 본 사람은 없을걸요?
“아무튼, 그건 그렇구, 제 방까지는 오쩐 일로 오신 거예요?”
내가 라이언하트 저택에 온 이래에 그가 직접 행차한 적은 없었던지라 궁금증이 생겼다.
“서신이 왔다.”
“뇨아한테 답장이 와써요?”
들고 온 서신을 건네려던 손길이 멈추었다.
“……그건 또 어떤 놈이지?”
“얼마 전에 토리한테 부탁해서 보육원 식구들에게 안부 편지를 보냈거든요. 답장이 올 때가 된 것 같은뎨.”
“사업에 관한 서신들이다.”
그는 왠지 모르게 언짢은 표정으로 침대 위에 여러 장의 서신을 내려놓았다.
봉투에는 각기 다른 가문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이렇게나 많이여?”
“돈 냄새를 맡은 벌레들이 몰려드는 거겠지.”
찬찬히 봉투를 둘러봤다.
어린애인 내가 익히 알 정도로 유명한 가문의 인장도 있었고 생소한 것들도 있었다.
“열어 봐도 돼여?”
“네 사업이니 당연히 네가 먼저 봐야 하는 거 아닌가?”
그가 당연한 걸 묻는다는 표정으로 내게 반문했다.
“제 사업이요……?”
“난 그저 투자자일 뿐. 츄르 사업에 관한 결정권은 너에게 있다.”
솔직히 말하면 그런 그의 태도에 조금 놀랐다.
‘보통은 아가를 무시할 법도 한데.’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나를 존중해 주고 있었다.
“그래도, 아가인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내용일 수도 있자냐요.”
“그럴 리가.”
그가 단호한 말투로 덧붙였다.
“내 딸은 천재다.”
……응?
내가 방금 무슨 말을 들은 걸까.
벙찐 얼굴로 그를 바라보니 그가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천재성도 예지몽 능력의 일부인지는 모르겠다만, 확실한 건 이깟 인간 놈들이 보낸 서신 따위를 내 딸이 이해 못 할 리가 없지.”
“…….”
아무래도 그에게 단단히 오해를 사 버린 것 같다.
‘아니, 어쩌면 굳이 해명할 필요 없는 오해일지도?’
덕분에 앞으로 아가인 척 내숭 떠는 수고는 줄일 수 있을 테니까.
“안 그런가?”
그리 진지한 얼굴로 물으신다면…….
“녜!”
오늘부터 천재 딸내미가 되어 드리는 수밖에.
그가 내 대답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손수 서신을 뜯어 주었다.
“글자는 읽을 줄 아나?”
“당연하져!”
나는 첫 번째 서신을 읽었다.
‘친애하는 라이언하트 백작님께’ 로 시작한 글은 ‘—하여 독점권을 팔 생각은 없으신지요?’로 끝났다.
그 뒤로 읽은 것들도 대부분 비슷한 제안이었다.
“뭐라고 쓰여 있던가?”
“백쟉밈 말대로 독점권을 얼마에 팔 생각 없냐고 떠보는 얘기나, 투자해 줄 테니 6:4로 나누자는 제안들뿐이여써요.”
“개소리를 아주 정성껏들 지껄여 놓았군.”
낮게 깔린 음성에는 경멸이 담겨 있었다.
나도 어느 정도 공감했다.
일절 일면식도 없는 자들이 츄르 사업이 잘되니까 친한 척 아부하는 모습이 그리 달갑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게다가 비율은 왜 또 지들이 6이고 우리가 4인데?’
양심이 가출해도 단단히 가출을 한 모양이다.
‘대부분 돈에 미친, 던버르레 공작가에 줄을 댄 가문들이라 그런가?’
하는 짓들이 똑같았다.
“하지만 나름 쓸 만한 정보도 있어여. 이것 봐 봐요. 짜쟌!”
나는 에덴 제국의 대부호, ‘던버르레 공작가’에서 온 서신을 그의 눈앞에 내밀었다.
“그자는 어떤 제안을 했기에.”
“전국에 츄르 상점을 세울 돈을 투자해 주고, 수출할 수 있게 무역상이랑 연결도 해 준댔어여.”
“그 정도는 내 돈으로도 해 줄 수 있다.”
던버르레 공작가 역시 이든의 원수 중 하나라서 그럴까?
퍽 자존심이 상한 것 같은 얼굴이었다.
“던버르레 공작가와 손잡지는 않을 꼬에요.”
언젠가 물욕을 밝히는 그가 쓸모 있는 패가 되어 줄지는 몰라도…….
적어도 지금 당장은 그랬다.
“그럼, 뭐가 쓸 만한 정보란 거지?”
“중요한 건 던버르레 공작가가 우리를 의식하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져?”
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그는 두뇌 회전이 빨랐다.
단박에 내 말뜻을 알아차린 그의 눈매가 조금 누그러들었다.
“비스 귀족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다는 뜻이겠지.”
“정답임미다. 이제 우리는 흐름을 잘 타야 해여.”
“어떻게?”
“어떻게는요. 물 들어왔을 때 열씨미 노 저어야죠.”
나는 벽난로에 던버르레 공작가에서 온 서신을 던져 버리며 빙긋 웃었다.
“백쟉밈. 혹쉬 로얄 클럽이라고 들어 보셨어여?”
“에덴 제국 최상류층 귀족들의 사교 모임……이라는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온갖 더러운 짓들을 작당하는 곳. 말인가?”
역시 알고 계셨네.
이러면 그에게 설명하기가 더욱 쉬워진다.
“마쟈요. 거긴 모리스 대신관의 체스판이에요. 그곳의 일원인 던버르레 공작과 리아노 공작은 체스 말일 뿐이구여.”
“한데 거긴 왜.”
“우리 올해 목표가 로얄 클럽에 가입하는 거자냐요.”
화사한 내 웃음에도 그의 표정은 사정없이 구겨졌다.
언뜻 봐도 많이 불쾌해하는 것 같아 보였다.
“언제부터 그딴 이상한 목표가 생긴 거지?”
“지금부터요. 방금 정해써요.”
당당한 내 대답에 그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근래 나에게 많이 풀어진 모습을 보여 줬던 그였는데, 원수들의 얘기가 나오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냉랭하게 변했다.
그래, 이런 반응일 줄 알았어.
아무래도 차근차근히 설득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백쟉밈은 로얄 클럽 귀족들에게 볼일이 있으신 거 아니여써여?”
“착각하지 마라. 빚진 것을 갚아 주고 싶다는 거지 그놈들과 어울리고 싶다는 뜻은 아니다.”
“알아요. 그런데 무슨 수로요? 혹쉬, 대신전을 무턱대고 습격이라도 하실 생각이세여?”
“…….”
그가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나는 답을 알고 있었다.
원작에서 실제로 그가 대신전을 습격했다가 오히려 큰 위기에 빠졌었으니까.
“에덴 제국은 황권보다 대신관의 권력이 더 센 걸 아시쟈나요. 기습은 통하지 않을 꼬에요.”
“그럼 그냥…… 참고만 있으라는 건가?”
꽉 말아 쥔 그의 주먹이 가늘게 떨렸다.
수십 년 세월 동안 그가 가슴에 품고 살았을 원한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그런 그를 조금은 위로해 주고 싶어졌다.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그에게 다가갔다.
“아뇨. 복수는 해야져.”
그러고서는 그의 다리를 살포시 끌어안았다.
복수는 한 발짝씩, 신중히.
이든의 최종 목표, 대신관과의 접점을 만들려면 그들이 만들어 놓은 세계에 발을 들여야 했다.
“로얄 클럽에 가입하게 되면 몇십 번, 몇백 번이고 그에게 복수할 기회가 생기실걸여?”
“…….”
“백쟉밈이 복수에 성공할 수 있게 제가 도와드릴 거니까, 조급해하지 마세여.”
……툭.
그는 말없이 내 머리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려놓았다.
그것은 내게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