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142)

21화

끄응. 끙.

1층이 이렇게나 멀었던가.

어린아이 혼자의 힘으로 몸집만 한 도토리 가방을 옮긴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읏챠챠.”

온 힘을 동원해 겨우겨우 마지막 계단을 밟았을 때, 멀찍이서 리챠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라, 아가님?”

“!”

헉. 아직 가방 속의 신문을 처리하지 못했는데.

다급히 도토리 가방을 등 뒤로 숨겼지만, 이미 리챠드가 발견한 후였다.

“그건 토리 씨의 도토리 가방 아닙니까? 벌써 신문이 도착한 모양이군요. 마침 제가 주문한 액자들도 도착한 참인데, 잘 됐습니다.”

“저게 다 액자에오……?”

맙소사.

그가 달려왔던 곳에 나무 상자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설마 저 안에 것이 다 액자라고?

내 눈을 의심했다.

리챠드는 기어코 이든과 내 사진으로 저택을 도배할 생각인가 보다.

“요즘 가족 초상화를 벽에다 걸어 두는 것이 대유행이라고 들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 많이는 쫌……. 그냥 한 개면 충분하지 않을까여?”

“에이,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리를. 다다익선이라 배웠습니다만.”

아니, 이 미친 자야!

아무리 유행이라고 해도, 저택 전체를 초상화로 도배하겠다는 생각은 대체 어디서 나온 거야?

그것도 똑같은 사진으로만!

미치고 팔짝 뛰겠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챠드는 그저 해맑았다.

아아, 이 미친 댕댕이를 어떡하면 좋아.

머리가 지끈거렸다.

“한데 이걸 왜 아가님께서 옮기고 계시는 거죠? 토리 씨는 어딜 가고…….”

리챠드가 내 등 뒤의 도토리 가방을 가리키며 물었다.

나는 도토리 가방을 사수하기 위해 다급히 거짓말을 꾸며 냈다.

“이, 이건 제 꼬에요! 리챠드가 부탁한 물건은 툐리가 방으로 직접 가져다준뎨요.”

“아하. 그렇군요.”

다행히 그는 내가 급하게 지어낸 거짓말에 깜빡 속아 넘어가 주었다.

휴, 이대로 어물쩍 넘어갈 수 있는 건가?

“그럼 이만, 가 보께요.”

“그쪽은 중앙 현관 쪽입니다만.”

슬그머니 빠져나가려 했는데, 이 예리한 똥개 같으니라고.

리챠드가 내 앞을 막아섰다.

“그런데 말입니다. 아가님의 방은 2층이지 않습니까?”

“아, 음, 어, 그로니까…….”

“이리 주십시오. 제가 방까지 옮겨다 드리겠습니다.”

“괘, 괜챠나요. 나 혼자 힘으로도 할 수 이써여!”

나는 도토리 가방을 덥석 부여잡고서 뒷걸음질쳤다.

그러자 리챠드의 밤색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의심의 눈빛이었다.

“흐음……. 이런 말씀 드리기 뭐하지만. 혹, 말입니다.”

“……녜?”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눈치를 살폈다.

눈치챈 걸까?

도토리 가방 속에 자신이 부탁한 신문들이 들어 있다는 걸?

신문을 한 장만 남겨 두고 슥, 쇽, 샥 해치워 버리려는 내 계획을 들키면 곤란한데.

떨리는 마음으로 그의 눈치를 살폈다.

마침내 그가 허리에 손을 얹으며 입을 열었다.

“혹시 가출을 결심하신 것은 아니지요?”

“……응?”

이건 또 무슨 소리래.

어쩌다 그런 오해를 사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리챠드가 바보라서 다행이었다.

“녜? 그런 거 아닙미다.”

“그렇다면 참으로 다행입니다.”

나는 도토리 가방을 끌어안으며 타이밍을 보았다.

이제 그럼 슬슬 빠져나가 볼까?

때마침 리챠드를 따돌릴 좋은 수가 떠올랐다.

“아, 맞다. 아까 백쟉밈이 리챠드를 찾던뎨.”

그에게는 미안하지만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이 많은 신문이 저 사악한 멍멍이의 손에 넘어갔다간, 이든과 내가 수치사하게 생겼는걸?

어쩌면 이든이 리챠드를 정말 거꾸로 매달아 놓을지도 몰랐다.

‘거짓말해서 미안해요, 리챠드. 하지만 이게 다 라이언하트 저택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예요.’

나는 속으로 사과하며 그를 재촉했다.

“얼른 가 보셔야 하지 않을까여?”

“아가님의 짐을 옮겨 드리고 가도 충분합니다.”

나는 도토리 가방을 들어 올리려는 그의 손을 덥석 붙잡아 세웠다.

“엄청 엄청 엄청 엄청 급한 일이라고 하셨던 거 같아여.”

“오, 이런. 이걸 어쩐다…….”

리챠드가 난감한 얼굴로 나와 도토리 가방을 번갈아 바라봤다.

이때다 싶어 그의 등을 계단으로 떠밀었다.

“전 괜찮으니까, 빨리 가 보세여.”

“그럼…… 금방 다녀와서 짐 옮기는 것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안뇽, 리챠드!”

리챠드는 눈 깜짝할 새에 계단을 올라 2층으로 사라졌다.

‘리챠드가 돌아오기 전에 얼른 처리해야겠어.’

숨길 곳이라면 적당한 곳을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거기가 제격이겠지?’

나는 온 힘을 다해 도토리 가방을 끌고 저택의 뒤뜰로 향했다.

가는 동안 오가는 사용인들이 없어서 보는 눈을 조심할 필요도 없었다.

“으랏챠챠챠!”

여기부터는 평지라서 훨씬 옮기기 수월했다.

나는 가방을 땅에 질질 끌다시피 하여 뒤뜰에 도착했다.

“와아.”

감탄이 절로 나왔다.

넓은 뒤뜰 한가운데 있는 웅장한 크기의 온실은 소설에서 읽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곳이었다.

숲을 오려서 그대로 옮겨 놓기라도 한 것 같았다.

푸릇푸릇 싱그러운 나무 주변으로 알록달록 이름 모를 봄꽃이 만개했다.

온실 전체를 둘러싼 마력석이 온도를 조절해 주어, 한겨울에도 이곳의 시간만큼은 봄이었다.

‘이렇게나 이쁜데 방치만 되고 있다니.’

괜히 내가 다 아쉬운 마음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장소였다.

소설에 쓰여 있길, 이곳은 이든의 비밀 공간이었다.

그는 마음이 심란할 때마다 저택의 온실을 찾곤 했다.

‘이를테면, 부모님의 기일 같은 때…….’

그런 사정을 알고 있어서인지, 온실 안에 숨겨 둬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허락도 없이 개인적인 공간에 들어가는 건 실례이니까.’

그 대신 온실 입구 옆, 커다란 나무 밑을 선택했다.

여기에 숨겨도 괜찮을 거야.

‘뒤뜰로는 사용인들이 거의 안 오는 것 같으니까.’

온실 안만큼은 아니겠지만, 이곳도 무언가를 숨기기에 나쁘지 않은 장소라 생각했다.

‘아무도 없지?’

주변을 슬쩍 둘러봤다.

발자국 소리 하나, 숨소리 하나 없이 고요했다.

“죠아써, 역시 증거 인멸은 이런 곳이 최고지. 으흥흥흥.”

나는 바닥에 떨어진 적당한 길이의 나뭇가지를 야무지게 움켜쥐고 흙을 파기 시작했다.

“아무도 모를 꼬야.”

여기다가 숨겨 놨을 줄은.

손이 흙먼지로 꼬질꼬질할 때쯤, 도토리를 숨길 적당한 구덩이가 완성됐다.

나는 한 번 더 치밀하게 주변을 살핀 뒤, 가방 속 도토리 마도구를 구멍 속에  와르르 쏟아 냈다.

맹수의 눈이 어디선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 * *

이든에게 있어서 겨울의 냄새만큼 지독한 것은 없었다.

건조한 공기는 인간의 체취를 더욱 선명하게 전달해 줬으니까.

‘모조리 숨통을 끊어 버리고 싶군.’

이맘때쯤 그가 늘 하는 생각이었다.

한데 이번에는 달랐다.

차가운 바람결에 섞여 든 인간의 체취가 그를 이상하게 만들었다.

몽글몽글한 아기의 분내.

그것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사람 냄새라면 딱 질색했는데 어째서…….’

싫지 않다고 생각 드는 걸까.

뜬금없이 며칠 전의 일이 떠올랐다.

제 품에서 울던 아이의 눈물.

오래전 자신의 과거와 겹쳐 보였던 그 장면이 자꾸만 속에서 턱, 걸렸다.

그래서였을까.

뒤뜰로 다가오는 아기를 보고 저도 모르게 나무 위로 훌쩍 뛰어올라 몸을 숨기게 된 것은.

“됐따. 감쪽같네!”

한참 동안 쪼그려 앉아서 사부작사부작 움직이던 아이가 기뻐했다.

잡생각을 털어 내기 위해 온실은 찾은 그는 도리어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곳에 타인의 발걸음이 닿은 게 얼마 만이던가?

아니 그것보다……,

‘지금 뭘 하는 거지?’

이든은 자신의 개인 공간에 콩알만 한 인간 아이가 겁도 없이 발을 들였다는 사실을 점점 망각하고 있었다.

어느새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호기심이었다.

원래였으면 무엄한 침입자의 목을 단숨에 비틀었을 그가 가만히 아이를 관찰했다.

‘특별히 봐주려는 것은 아니다. 혹시라도 헛짓거리를 할까 봐 감시하려는 거지.’

그저 만일을 위한 대비일 뿐이다.

스스로에게 변명을 늘어놓으며 눈으로는 아이의 움직임을 좇았다.

“완벽해! 죠아써! 이 정도면 아무도 못 찾겠찌!”

탈탈탈.

아이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손에 묻은 흙을 털어 냈다.

덩달아 양 갈래 머리카락이 달랑달랑 흔들렸다.

이상하게 눈을 뗄 수 없었다.

‘이럴 땐 영락없이 애 같군.’

그는 자신이 오랫동안 아이에게 시선을 뺏겼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제 오른쪽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는 사실 또한.

‘……복수 외에 딴생각을 해본 게 언제더라.’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돌이켜 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아이를 관찰하는 동안 줄곧 그를 괴롭히던 두통이 사라졌다.

끊임없이 메아리쳐 그를 괴롭히던 그날의 비명 대신,

“으흥흥.”

저 요상한 웃음소리가 가득 채웠다.

맹수의 눈이 가늘게 떨렸다.

아무도 모르게 온실의 벽을 넘어 든 이른 봄의 징후가 그의 가슴에 스며들었다.

‘저놈의 머리카락 때문인가.’

그는 몰랐다.

자신이 제 오른쪽 가슴에 일어난 동요를 필사적으로 부정하고 있음을.

“뭘 숨겼다는 거지.”

나무 위에 숨어 있던 그가 가볍게 아이의 옆으로 착지하며 물었다.

“흐어어어억!”

놀란 아이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커다란 푸른 눈동자가 데굴데굴 길을 잃고 헤매기 시작했다.

“배, 배, 백쟉밈, 어디에 계셨던 거에여?”

“반응을 보니 심히 수상한데.”

“아, 아무것도 안 해써요!”

아이가 등 뒤로 흙 묻은 손을 숨기며 말했다.

“묻지도 않았는데 설명한다, 라. 이런 걸 보고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하는 건가?”

“아니, 그로니까……. 그게…….”

횡설수설하는 아이를 보자니 그답지 않게 아이를 놀려 주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이든은 부러 송곳니를 드러내 보였다.

“이걸 어찌 처리하면 좋을까.”

“처리라면 오떤……?”

“글쎄. 보통 스파이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산에 묻어 버리곤 했지.”

“헉.”

아이가 양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어쩐지 그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물론, 자신이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은 인지하지는 못했다.

“아. 비상식…….”

“하, ……하지만 육식은 안 하신다고 하셨자냐요.”

“혹시 모르지. 그때와 달리 내 입맛이 바뀌었을지도.”

아이는 별안간 제 양 갈래 머리를 잡으며 울상을 지었다.

“나 맛없써요!”

“……뭐?”

“비상식량 말고 츄르 드세여, 츄르!”

그 모습에 이든은 입술 새를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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