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142)

22화

이대로 이든의 눈 밖에 나는 건가 싶었는데,

―피식.

뜻밖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선명히 박혔다.

‘우…… 웃었어……?!’

나는 감았던 눈을 살짝 떠서 이든을 훔쳐봤다.

언제나 그렇듯 그의 얼굴에는 일말의 웃음기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찰나에 스쳐 간 것은 분명 웃음소리였다.

“혹쉬, 저한테 장난치신 고에요?”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용기를 쥐어짜 내 물었다.

그러자 그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었다.

“무슨 소리인지 통 모르겠군.”

“그치만 방금 웃으셨자냐요.”

“내가 언제.”

“똑똑히 들어써요.”

“그런 적 없다니까.”

그는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래도 허락도 없이 뒤뜰에 알짱거린 거에 대해서는 혼낼 생각이 없어 보이네.’

다행이었다.

그간 서로에게 코딱지만큼이라도 신뢰가 쌓이긴 했나 보다, 싶었다.

“이곳까지 뭘 하러 온 거지? 아까 보니 흙을 파던데.”

이든이 누가 봐도 파헤쳤다가 도로 덮은 티가 나는 부분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나는 바닥에 나뒹구는 도토리 가방을 주워 들며 그를 올려다봤다.

“솔직하게 다 말하면 봐주실 꼬에요?”

“들어 보고 판단하지.”

“숨기려고 해써요.”

“무엇을.”

그의 눈빛이 조금 날카로워졌다.

‘헉. 괜히 오해 사는 거 아냐?’

예를 들면, 내가 ‘스파이 짓을 하고 있다가 걸렸다’라든가, 하는…….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내 목소리는 저절로 다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리챠드가 백쟉밈이랑 제가 나온 신문을 벽에다가 걸어 둔다고 했꼬든요. 그래 가지고 신문을 몰래 숨겨 두려고…….”

“그게, 그렇게, 싫었나?”

어쩐지 이든의 표정에 불만스러움이 엿보였다.

‘아직 오해가 안 풀린 건가?’

나는 시시각각 바뀌는 그의 표정을 살피며 덧붙여 설명했다.

“문제는 신문을 백 부도 넘게 사들였다는 거에여. 저택 전체에 덕지덕지 붙일 생각인 거 같던뎨…….”

“미친놈이군.”

그러게 말이에요.

하고 싶었던 말을 해 준 이든 덕분에 속이 다 시원했다.

“그래서 그걸 땅에다 묻고 있었다는 건가?”

“녜. 여긴 아무도 안 다니는 곳 같아서여. 허락도 없이 뒤뜰까지 온 건 죄송함미다…….”

“…….”

내 사과에 이든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스파이 짓에 관한 오해는 풀린 것 같은데, 여전히 그의 기분은 좋지 않아 보였다.

‘혹시, 내가 그의 온실에 들어갔다고 생각한 건가?’

허락도 없이 사적인 공간을 침범한다는 건 충분히 기분 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온실이 이든에게 얼마나 특별한 곳인지 알고 있는 나였기에 오해를 풀어 주고 싶었다.

“그래도 온실 안에는 안 들어가써요! 딱, 여기까지만.”

나는 온실 옆, ―그가 갑작스럽게 등장한― 커다란 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이상은 안 들어가써요.”

“어째서.”

“백쟉밈에게 소중한 곳이자냐요. 제가 어또케 함부로 들어가겠어요.”

“…….”

“정말이에요. 온실 안에는 안 들어가써요. 맹세할 수 있슴미다.”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하는 나를 이든은 한참 동안 말없이 바라봤다.

이렇게까지 말해도 역시, 믿기 힘든 걸까?

그의 굳은 입술이 비틀렸다.

어떡하면 좋아.

“진짠뎨…….”

아랫입술이 나도 모르게 슬며시 튀어나왔다.

아무리 노력해도 진심이 닿지 않는 것 같아서 조금은 속상했다.

그런데 별안간,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상관없다.”

“녜?”

“상관없다고. ……아주 가끔은.”

아주 작은 소리였다.

그래서 혹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닐까 싶었다.

‘방금, 뭐라고……?’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을까?

그보다 ‘그런 뜻’이 맞을까?

심장이 간질간질했다.

어쩐지 이든과 내 사이의 공기 흐름이 달라진 것 같았다.

마치 이른 봄이 찾아온 것 같은 기분.

‘그저 내 착각이겠지?’

그래도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들었다.

조심스레 다시 물어보려 했는데,

“각하, 왜 여기 계십니까?”

뒤뜰과 이어진 풀숲 사이로 리챠드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그 순간, 우리를 둘러쌌던 묘한 기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든은 다시 평소대로 무감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너야말로 왜 그런 곳에서 튀어나오는 거지?

“각하를 찾아온 저택을 헤매다가 이곳까지 왔습니다만.”

“나를 왜.”

“그야, 각하께서 저를 급히 찾으신다기에…….”

리챠드가 말을 하다 말고 나를 빤히 바라봤다.

헉. 거짓말인 걸, 들켰나?

나는 잽싸게 흙 묻은 도토리 가방을 등 뒤로 숨기며, 딴청을 부렸다.

“어쨌든 간에, 저택 구석구석을 다녔는데, 정작 찾는 이는 보이지 않고 수상한 침입자만 발견했습니다만.”

“침입자라고?”

“그리 경계하실 건 없습니다.”

“어째서.”

이든이 날이 선 투로 되물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리챠드의 대답에 그의 눈빛은 경계 대신, 의아함으로 변했다.

“그 침입자가 웬 하찮은 꼬맹이라서 말입니다.”

* * *

리챠드가 말했던 ‘웬 하찮은 꼬맹이 침입자’가 너일 줄이야.

나는 응접실 창에 까치발을 들고 서서 밖을 열심히 살피는 저 익숙한 샛노란 뒤통수가 누구인지 한 번에 알아보았다.

“뇨아!”

내 부름에 휙 돌아선 노아의 얼굴에 미소가 퍼졌다.

“루나!”

매달려 있던 창틀에서 폴짝 뛰어내린 그가 내게 쪼르르 달려왔다.

반가운 얼굴을 보니 나도 모르게 절로 웃음이 나왔다.

“여긴 오또케 온 거야?”

“기르신 신문에 네가 나온 걸 봤어. 신문사에 물어물어 찾아왔지.”

“혼쟈서?”

“다행히 우리가 묵고 있는 여관이랑 별로 멀지 않더라고. 별거 아니었어.”

아무리 가깝다고 해도 어린애 혼자서 찾아오기에는 힘들었을 텐데. 

노아는 의젓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니까, 이분이 침입자가 아니라 아가님의 보육원 식구분이셨군요?”

노아와 나를 지켜보던 리챠드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가님과 몹시 친하셨나 봅니다. 그래 보이지 않나요, 각하?”

흥미롭다는 듯 노아를 자세히 뜯어본 리챠드가 넌지시 이든에게 말을 걸었다.

아차차, 내 정신 좀 봐.

그제야 이든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우리를 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마터면 K―유교걸로서 실수할 뻔했네.

나는 차례대로 리챠드와 이든을 소개시켜 주었다.

“녜. 인사해, 뇨아. 이분은 리챠드 집사님이고, 저분은 라이언하튜 백쟉밈이야.”

“안녕하세요. 노아 딜러인입니다. 루나와는 옆방을 썼어요.”

노아가 먼저 그들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리챠드 시고르자브죵입니다.”

“…….”

넉살 좋게 인사를 받아 준 리챠드와는 달리 이든은 입술을 꾹 닫았다.

그럼에도 노아는 기죽지 않았다.

“백작님, 우리 루나를 잘 보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이든의 눈썹이 사납게 꿈틀거렸다.

뭐가 또 마음에 안 든 거람.

“흐음……. 전 아가님의 특.별.한. 친구분이 오셨으니 간식거리라도 사 와야겠습니다.”

리챠드가 뜻 모를 웃음을 흘리며 은근슬쩍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

“…….”

리챠드가 나간 후, 이든과 노아는 서로를 응시했다.

두 남자 사이에서 은근한 기류가 흘렀다.

‘뭐야? 이 분위기는.’

나는 어색함을 밀어내기 위해 애써 노아에게 말을 붙였다.

“수녀밈께는 여기 온다고 말씀드리고 온 고야?”

“심부름 나온 길에 잠시 왔어. 루나 네가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서…….”

노아는 언제 그랬냐는 듯,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

그가 웃으니 어쩐지 나도 마음이 놓였다.

“그냥 편지로 물어보지. 수녀밈이 걱정하시게따.”

“이렇게 직접 보고 싶었어.”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슬며시 내 손을 깍지 껴서 잡았다.

마치 소중한 보물을 어루만지듯이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직접 보니까 좋다. 역시 오길 잘했어.”

노아는 햇살처럼 웃으며 나를 꼭 끌어안았다.

그러자 뜬금없이 멀찍이 떨어져 있던 곳에서 엄청나게 오버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크흠! 큼! 크흐흠!”

……왜 저런데?

나는 얼굴이 시뻘겋게 되도록 헛기침을 해 댄 이든을 의아하게 바라봤다.

이든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휙 돌렸다.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일단 속을 알 수 없는 그는 내버려 두고, 오랜만에 본 노아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참, 수녀밈이랑 언니 오빠들은 잘 지내구 이써?”

“너 입양되고 나서 톰은 심심해서 죽으려고 그래. 너만큼 리액션이 재밌는 애는 없다나 뭐라나.”

“바보 톰다워.”

우리는 한참을 키득거리며 보육원 식구들의 안부에 대해 떠들었다.

‘다들 잘 지내고 있어서 다행이네.’

노아에게 직접 전해 들으니, 그동안 나도 모르게 걱정하고 있던 마음이 안심됐다.

“루나 너도 갑자기 입양 가서 걱정했는데, 다행이야. 잘 지내는 것 같아 보여서.”

노아가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겨 주며 웃었다.

또 별안간, 언짢아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별걸 다 걱정하는군.”

……저 사자가 노망이라도 난 걸까.

오늘따라 왜 안 하던 행동들을 하는지 모르겠다.

왜 저리 콧김은 열심히 뿜어 대는 것이며, 눈은 가자미처럼 찢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노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하지만 이어지는 노아의 말에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나도 입양을 알아보려고.”

“……뭐?”

심장이 쿵 떨어졌다.

그가 겪게 될 끔찍한 미래들을 알고 있어서였다.

원작에서 노아는 던버르레 공작가, 리아노 공작가, 다페 남작가에 차례대로 돌아가면서 입양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는 망가지고 만다.

‘그 세 놈들은 최악의 어른들을 모아 놓은 표본이나 다름없으니까.’

제발 노아의 입에서 그 세 명의 이름만 나오지 않길 바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디로?”

“던버르레 공작가, 리아노 공작가, 다페 남작가 중에서 고민 중이야.”

기어코 네 입에서 나오지 말아야 할 이름들이 나오고 말았다.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그를 회유하기 위해 애썼다.

“그런 곳 말고, 화목한 집안에 입양 가는 건 오때?”

“이미 결심했어. 꼭 세 군데 중 갈 거야.”

내가 너의 불행을 막을 수 없는 걸까.

마음이 무거웠다.

할 수만 있다면 너를 그 지옥에서 건져 내고 싶은데.

무엇이 너를 자꾸만 지옥으로 밀어 넣으려는 걸까.

나는 곧 그 질문에 답을 알 수 있었다.

“루나. 난 제국에서 제일 강한 어른이 될 거야. 다시는 아무도 널 헤치지 못하게.”

……그 이유가 바로 나였구나.

그 순간 봤던 네 눈빛 속 타오르던 불꽃을, 아마 나는 평생을 잊지 못할 거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