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142)

23화

“루나. 난 제국에서 제일 강한 어른이 될 거야. 다시는 아무도 널 헤치지 못하게.”

노아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라서 그럴까?

나는 고작 여섯 살짜리 남자아이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 대상이 황제라도 말이냐?”

뾰족한 화살촉처럼 날카로운 목소리가 귓등에 내리꽂혔다.

늘 서글서글하던 노아의 보랏빛 눈동자가 그 반듯한 틀을 잃고 흐트러졌다.

“…….”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는 게 아니다, 애송이.”

이든의 목소리가 어두웠다.

그것은 노아에게 하는 말이면서 동시에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었다.

‘이든도 한때는 자신이 가족들을 지킬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적이 있었으니까.’

노아에게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을 투영해 보는 것 같았다.

한 박자 늦었지만, 노아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어요.”

“…….”

한 방 먹은 듯, 이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제가 지키기로 마음먹었으니, 반드시 제 사람을 지켜 낼 거예요.”

“누가 네 사람이라는 거냐?”

이든이 콧잔등을 구겼다.

노아는 사나운 그의 인상 때문에 잠시 움찔했으나, 절대 물러서지는 않았다.

“루나와 약속했으니까요. 제가 평생 지켜 주기로.”

“평생?”

균형을 잃고 비스듬히 올라간 이든의 입술 끝에서 결국에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봐, 애송이. 루나의 곁에 평생 있을 남자는 네가 아니라 보호자인 나다.”

틀린 말은 아니긴 하다만.

어린애에게 어떻게든 말로 이겨 먹으려고 하시는 건 너무…….

‘……너무 유치하잖아요.’

그냥 두었다가는 더 유치해질 것만 같아서 슬며시 이든의 옷자락을 끌어당겼다.

그러자 호박색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백쟉밈…….”

“…….”

순간 그를 잡은 손 위에 두 남자의 시선이 동시에 닿은 것은 내 착각이었으면 했다.

난 그저, 유치한 기 싸움을 그만하라고 눈치 준 것뿐인데.

희비가 교차하듯이 한 남자의 어깨는 기세등등하게 펴졌고, 다른 남자의 어깨는 기운 없이 추욱 쳐졌다.

“애송이, 이만 집으로 돌아가라.”

이든의 목소리가 묘하게 들떠 있었다.

“조금 더 있다가 가도 됩니다.”

“보육원 원장이 걱정한다지 않나.”

“저녁 전까지는 괜찮습니다.”

노아가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대꾸하자, 이든이 마치 비장의 카드를 꺼내는 사람처럼 턱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거만한 얼굴로 노아를 비스듬히 내려다봤다.

“가족 회의가 있다.”

……응?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아니, 사자님. 우리가 언제부터 그런 걸 했었죠?’

금시초문의 일이었다.

그럼에도 이든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라이언하트가의 일원들만 참석할 수 있는 특별한 회의지. 그러니 남은 이만 빠져라.”

“…….”

이번만큼은 노아의 패배였다.

이든은 입술을 꾹 다문 그를 보고 승리자의 미소를 취했다.

‘……어린애 이겨 먹어서 그렇게 좋아요?’

솔직히 말해서 이든이 이렇게까지 유치할 줄 몰랐다만, 묘하게 즐거워 보여서 차마 지적하지 못했다.

“여관까지 돌아갈 수 있는 마차를 준비해 주지.”

친히 손까지 흔들어 주며 노아의 귀가를 재촉하는 모습이 어찌나 얄밉게 보이던지.

당사자도 아닌데, 내가 절로 고개가 저어졌다.

순둥이 같은 노아는 더는 고집부리지 않고 내게 아쉬운 작별 인사를 고했다.

“루나, 다음에 시간 되면 또 올게.”

“입양 준비한다며, 이제 바빠지눈 거 아냐?”

“보러 오지 못하면 편지라도 보낼게. 그러니 꼭 답장해 줘야 해. 알았지?”

“우응, 당연하지.”

노아와 나는 언제나 그랬듯이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그러자 곧바로 불편한 기색이 날아왔다.

“크흠!”

아무래도 우리 사자님 가습기라도 장만해 드려야 하는 걸까.

남아나지 않을 것 같은 그의 목 건강이 심히 걱정됐다.

노아를 쏘아보는 이글거리는 저 두 눈동자가 염려스럽기도 했고.

그렇게 노아는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이든이 준비해 준 마차를 타고 저택을 떠났다.

이든은 노아가 떠난 후, 한참 동안 뚱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하실 말씀 있으셔여?”

“…….”

돌연 그가 콧방귀를 뀌며 획 돌아서서 응접실을 나가 버렸다.

‘또 뭐에 마음 상하신 거지?’

원인은 알 수 없으나, 왠지 꽁한 마음을 풀어 줘야 할 것 같아 그의 뒤를 쫄래쫄래 쫓아갔다.

그리고 한참 뒤, 앞서가던 그가 휙 돌아섰다.

“저놈이 K 뭐시기라는 놈인가?”

“……설마 그거 물어보시려고 뇨아를 보낸 건 아니시죠?”

“…….”

대답 없이 돌아선 그가 아까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백쟉미이이밈.”

나는 부랴부랴 그의 뒤를 쫓았다.

정말이지 사자 속이란 알 수 없다니까.

* * *

한편, 제도의 중심가.

활기찬 주변과 달리 코노미야 상단은 찬물을 끼얹은 듯 냉랭했다.

가장 상석에 앉은 상단주 코노미야 백작이 보고 있던 신문을 신경질적으로 내팽개쳤다.

“그 사내아이가 필요하다고 했잖아.”

“면목 없습니다. 일이 이렇게 틀어질 줄은 몰랐습니다.”

코노미야의 심복이 그 앞에 무릎을 꿇으며 사죄했다.

“내 분명히 다른 쪽에서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처리하라 했을 터.”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한데, 이렇게 버젓이 이런 기사까지 나돌게 해?”

코노미야가 면전에 집어 던진 신문에는 라이언하트 백작가의 입양 딸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

“이 계집애가 혹 우리 쪽에서 작당한 일이라는 걸 눈치라도 챘으면 일을 다 그르칠 뻔했어.”

“죄송합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저희가 다페 남작 쪽에 살수를 고용한 것까지는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하여튼, 근본 없는 다페 남작가 놈들에게는 일을 시키지 말았어야 했는데.”

여전히 화가 가시지 않는지 코노미야는 죄 없는 소파 손잡이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러다가 문득, 화풀이 대상을 떠올렸다.

“그렇지. 그놈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워야겠어. 살수 놈을 데려와.”

“연락이 두절되어 알아보니, 프리마 숲에서 변사체로 발견됐습니다.”

“기르신 쪽의 소행인가?”

제 라이벌을 떠올린 코노미야의 목소리가 은밀히 낮아졌다.

“그쪽은 아닙니다. 오히려 기르신 쪽은 폭죽 사고를 빌미로 저희 상단의 이미지를 깎아내릴 궁리만 하고 있었습니다.”

하면 누구란 말인가?

리아노 공작가가 이런 굳이 이런 저급한 일을 벌이진 않을 테고.

기르신 남작은 자신의 상단 이미지를 깎을 기사를 쓸 궁리만 한다니까 그 역시 아닐 텐데.

그 외에는 딱히 떠오르는 인물이 없었다.

“……처리 방식을 봤을 때 인간의 소행은 아닌 듯싶습니다.”

심복이 조심스럽게 꺼낸 얘기에 코노미야의 하얗게 센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수인족의 짓이다?”

“확신할 수는 없으나, 그런 게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하고 있습니다.”

“내 분명 확실치 않은 정보는 들이밀지 말라고 했을 터인데.”

그가 표정을 구겼다.

확실치 않은 정보를 운운하는 것은 코노미야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사체를 분석해 보았을 때는 정황상 그게 맞는 듯하나, 이상한 점이 있어서…….”

심복은 코노미야가 보고 있던 신문 속 여자아이를 가리켰다.

“이 계집아이가 어찌 살아남았는지가 의문입니다.”

말간 계집아이.

양 갈래로 머리를 땋은 토끼 같은 이 아이가 묘하게 거슬렸다.

‘다른 놈들보다 먼저 그 사내놈을 데려와 대신전에 줄을 댈 기회였는데.’

별 볼 일 없는 보육원에 신성력이 있는 남자아이가 있다는 정보를 돈 주고 샀던 그였다.

그렇게 비싼 돈을 주고 산 제 계획이 뒤틀린 게 고작 저 보잘것없는 계집아이 때문이라는 게 이가 갈렸다.

“이깟 계집애가 왜?”

“그날의 목격자에게 물어보니, 웬 계집아이가 살수에게 쫓기는 걸 봤다고 합니다.”

“목격자가 있었다고?”

“입은 제대로 막아 두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심복이 덧붙인 말에 코노미야의 사나운 표정이 누그러들었다.

그는 이어서 제 의견을 피력했다.

“만약 수인족이 살수를 해친 것이라면, 분명 그 자리에 같이 있었던 이 계집아이도 죽어서 사체로 발견됐어야 했습니다.”

“흐음…….”

코노미야가 소파 손잡이에 턱을 괴며 생각에 잠겼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목격자의 증언이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제 심복이라면 분명 목숨을 빌미로 협박해서 알아낸 정보일 테니까.

함께 있었던 자 중에서 어떤 이는 죽어서 발견되고, 어떤 이는 별안간 입양돼서 멀쩡히 잘 지낸다?

확실히 이상했다.

“라이언하트 백작에게 적당히 돈을 쥐여 주고 아이를 사들여.”

생각을 정리한 코노미야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명령을 내렸다.

거슬리는 건 미리 싹을 잘라 놔야 하는 게 그의 오랜 철칙이었다.

“하오나, 각하. 섣불리 움직이기에는 여론이 염려됩니다.”

“몸값을 치르고 입을 막으란 얘기야. 대체할 고아들은 널렸으니까.”

“최근에 츄릅츄릅병의 치료제를 만든 것도 그 아이라서 온 제국의 관심이 집중된 상태입니다. 조금 귀족적인 방법으로 접근, 처리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귀족적인 방법이라 함은 곧 사교와 머리싸움을 뜻했다.

뼛속까지 귀족의 피가 흐르는 그로서는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근본도 없는 가문과 대면을 해야 한다니.

그리 유쾌한 기분일 수는 없었다.

“내키시지 않는 건 압니다. 하지만 지체하시면 안 됩니다. 기르신 남작 쪽이 계속 보육원 화재 사건에 관련해서 라이언하트 백작가에 접근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어디까지 진행됐느냐?”

“아직 저희 상단의 불량품 폭죽이 화재의 원인이었다고 직접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습니다. 기르신 쪽은 계속 그 발언을 유도하고 있고요.”

기르신이 원하는 바를 손에 넣게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만약 츄릅츄릅병의 치료제 개발로 민심을 얻은 아이가 “코노미야 상단의 폭죽은 위험하다.”라는 발언이라도 했다가는…….

코노미야 상단의 이미지는 크게 실추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축제 때마다 황실에 폭죽을 납품할 수도 없게 될 것이고, 그건 그의 상단에 크나큰 손해였다.

다른 건 몰라도 수익이 떨어지는 것만큼은 용납 못 했다.

“어찌할까요, 각하.”

“그쪽보다 먼저 손을 써야지.”

코노미야는 벽난로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노려보았다.

“고작 신문사 하나 쥐고 우쭐대는 풋내기에게 톡톡히 보여 줘야지. 누가 우위에 있는지를.”

그가 벽난로 안으로 신문을 던져 버렸다.

화르르륵!

순식간에 기르신 신문은 새카만 재가 되어 사라졌다.

“라이언하트 가문에 접점을 만들 방법을 강구해 와.”

“예, 각하. 빠른 시일 내에 방법을…….”

그때, 코노미야 상단 건물에 손님의 방문을 알리는 청아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딸랑.

“주인장 계십니까?”

“죄송하지만, 무슨 일로 오셨는지…….”

코노미야의 심복이 다급히 낯선 방문객에게 물었다.

“우리 아가님과 손님분께 대접할 슈크림을 사러 왔습니다만.”

찬란한 금발의 소유자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수첩을 꺼내 들며 방긋 웃었다.

“이런 말씀 드리긴 뭐하지만, 혹시 이 가게 망한 겁니까?”

“뭐요?”

길 건너편의 슈크림 가게를 잘못 찾아 놓고서, 멀쩡한 상단 보고 망했다니?

불쾌한 언사에 언성이 점점 높아지려는 찰나,

“혹, 이곳 자리를 파실 생각이라면 라이언하트가에 연락을 주십시오. 높은 가격에 사겠습니다.”

낯선 방문객이 주소가 적힌 메모를 심복에게 건네며 방긋 웃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