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4/142)

24화

쫄래쫄래 이든을 뒤따르던 나는 갑자기 멈춰선 그의 다리에 콩! 부딪히고 말았다.

아야.

이마를 부여잡고서, 미동도 없는 그를 올려다봤다.

“백쟉밈.”

“…….”

“화나써요?”

“화나? 내가? 허, 가당치도 않을 소리다.”

하지만 누가 봐도 화나신 것 같은걸요.

계속해서 이어지는 못마땅해하는 숨소리가 그의 심정을 대변해 줬다.

……후.

하!

허?

무엇이 그를 섀도복싱 하게 만든 걸까.

‘원작에서는 이든이 노아에게 큰 관심 없던 것 같은데…….’

오늘 보니까 서로가 서로를 엄청나게 의식하고 있었다.

‘원작이 틀어지기라도 한 건가?’

도무지 답을 알 수 없는 난제에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맛있는 냄새와 함께 구세주가 등장했다.

“어라. 이런 말씀 드리기 뭐하지만, 두 분 혹시 싸우신 겁니까?”

“리챠드!”

나는 계단을 올라온 리챠드에게 쪼르르 달려가 냅다 안겼다.

자연스럽게 나를 품에 안은 리챠드가 똥 씹은 표정을 짓고 있는 이든에게로 다가갔다.

“표정이 어찌 그러십니까?”

“시끄럽다, 리챠드.”

“이제 겨우 한마디 했을 뿐입니다만.”

“간식인가 뭔가를 사러 간다더니, 손에 그건 뭐지?”

이든이 넌지시 턱짓했다.

리챠드는 못 보던 무늬의 편지 봉투를 들고 있었다.

“아가님께 드릴 간식을 사러 간 길에 뜻밖의 초대를 받았습니다.”

“초대요?”

“네. 여기, 아가님 앞으로 온 초대장입니다.”

리챠드가 내민 초대장을 건네받았다.

‘아무래도 코노미야 쪽이겠지?’

이든과 내가 1면에 나온 신문 기사를 통해, 기르신 남작이 움직이는 걸 봤을 테니까.

“열어 보도록 해.”

조심스럽게 편지를 열어 보니 역시나 ‘코노미야 백작가’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저녁 식사에 초대하겠뎨요.”

“응할 건가.”

“당연하져.”

이든과 눈이 마주쳤다.

이건, 기회였다.

“백쟉밈.”

“…….”

여전히 이든은 대답해 주지 않았지만, 두 눈은 올곧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 주 내로 로얄 클럽 추천서를 받아 드릴께여.”

“…….”

빤히 나를 내려다본 그가 느릿하게 입술을 벌렸다.

“약속할 수 있나?”

“녜.”

“그럼…….”

그가 슬며시 내 눈앞으로 새끼손가락과 엄지손가락을 들이밀었다.

“도장도 찍어.”

* * *

며칠 후, 마을 서편으로 뉘엿뉘엿 지는 해가 반쯤 지붕에 걸쳐질 즈음이었다.

우리는 비스의 중심 상가에 인접한 코노미야 백작저에 도착했다.

‘정신 바짝 차리자. 원하는 걸 얻어 가야 하니까.’

오기 전, 그리 마음을 먹은 게 무색하리만치 현재 나는 정신이 혼미해지고 있었다.

바로 바로, 눈앞에 펼쳐진 온갖 진수성찬 때문이었다.

‘이건 반칙이잖아!’

아가의 본능과 어른의 이성이 끊임없이 충돌했다.

아슬아슬한 줄타기 끝에 결국 아가의 본능이 탄성을 내지르게 했다.

“우오오옹!”

오동통한 뺨을 감싸 쥐며 테이블 위를 훑었다.

보육원에서 지냈을 때는 구경하기도 힘들었던 요리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페이스트리 반죽 파이에 양고기와 채소를 넣어 구운 파테.

잘 발라낸 생선 살과 새우를 넣어 끓인 해산물 스튜.

그리고 가장 대박인 건…….

아보카도 연어 샐러드와 각종 향신료를 곁들인 소고기 미트볼!

‘세상에. 무려 소고기로 만든 미트볼이라니!’

이건 의지박약한 아가의 몸으로는 도무지 참을 수 없는 유혹이었다.

그 밖에도 이름 모를 생소한 요리가 줄지어 있었지만 나는 이미 미트볼에 단단히 꽂혀 버렸다.

“누가 보면 굶긴 줄 알겠군.”

잔뜩 흥분한 날 보며 이든은 못마땅한 듯 표정을 구겼다.

음식을 내온 코노미야 백작저의 집사는 차분한 어조로 덧붙였다.

“각하께서 손님들께 먼저 식사를 대접하고 있으라 명하셨습니다.”

“녜, 잘 먹겠슴미다!”

이든과의 비장한 작전 회의가 무색하리만치 나는 무장 해제된 얼굴이었다.

“그렇게 먹고 또 들어가나?”

“맛있써요.”

옆에서 음식 대신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이 있든 말든,

나는 이것저것 맛보기 바빴다.

‘이런 기회가 또 언제 올지 몰라.’

라이언하트 저택에는 아직 따로 요리사가 없었다.

해서 매번 리챠드가 광장에서 사 온 음식들로 끼니를 해결해 온 나로서는 갓 나온 다양한 요리들에 반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했다.

요 며칠 사이 똑같은 메뉴만 먹었다고 금세 질려 버렸다.

입 안 가득 터지는 왕새우의 탱글탱글한 식감에 나는 통통한 볼을 부여잡았다.

‘부잣집 고급 음식 최고다! 짜릿해!’

소설 속에 ‘코노미야 백작가가 에덴 제국의 식자재 대부분을 유통하는 상단을 운영한다’는 설정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코노미야 백작저의 음식은 정말이지 완벽했다.

“콩알만 한 게 유지 비용이 꽤 들겠군.”

“걱정하지 않아도 됨미다. 집에 가서는 쪼끔만 먹을 거에영.”

양 볼이 빵빵해지도록 쑤셔 넣으며 나름 이든을 안심시키려 했다.

“왜.”

“그야, 백쟉밈께 귀찮은 아기가 되지 않기 위해서요.”

음식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씩씩하게 대답했다.

“…….”

어째서인지 이든이 침묵했다.

무심결에 고개를 들었는데, 그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다.

왜지?

의아함도 잠시, 혀 위에서 사르르 녹는 미트볼의 황홀한 육즙에 금방 딴생각은 사라졌다.

‘물론 전속 요리사가 있다면야 좋겠지만, 이든이 오로지 날 위해서 그래 줄 리는 없잖아?’

크게 섭섭하지는 않았다.

난 현실과 타협할 줄 아는 성숙한 아기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음식을 향해 눈을 돌렸다.

어디 보자. 뭘 먹어 보지.

나온 음식을 모두 맛보고 싶은데 이 야속한 아가의 배는 한계가 머지않은 것 같다.

우음, 나중에 남은 거 포장해 달라고 하면 해 주려나.

나름 진지한 고민을 하며 신중하게 다음 음식을 고르고 있는데,

문득 그가 내 포크를 뺏어 갔다.

“내 포크!”

자연히 시선은 그에게 옮겨졌다.

눈가에 커다란 칼자국이 있으면서 얼굴을 찌푸려서일까.

오늘따라 인상이 더없이 험악해 보였다.

우씨, 먹던 푸딩을 뺏어 가는 걸로도 모자라서 포크까지 뺏어 가다니.

‘이래서 악당이로구만.’

사악해도 너무 사악했다.

“돈은 충분히 많다.”

“녜?”

뭐라는 거야.

눈을 깜빡이며 얼뜬 표정을 지으니 그가 다시금 입술을 열었다.

“간에 기별도 안 가는 비상식량을 유지하는 것 정도는 쉽다고.”

못됐어. 잘난 얼굴로 몹쓸 말을 잘도 했다.

이어서 그는 내 포크로 제 앞에 놓인 소고기 미트볼을 찍어 건넸다.

“우오옹!”

못됐다는 거 취소다.

악당이라는 건 단단한 누명인 게 틀림없었다.

소고기 미트볼을 양보하는 사람이 나쁜 놈일 리가 없잖아?

“감사함미다! 백쟉밈 최고!”

그가 양보한 미트볼을 입에 넣자마자 안면 근육이 헤실헤실 풀려 버렸다.

빙의한 몸이 한창 클 나이라서 그런지 어째 맛있는 음식에 약했다.

‘코노미야 백작은 그걸 잘 아는 것 같고.’

어쩌면 그에게 내 또래의 아이가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배가 차오를 때쯤에야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생겼다.

‘배는 충분히 불렀으니, 이제 슬슬 코노미야 백작을 맞이할 준비 좀 해 볼까.’

백작저의 응접실을 둘러봤다.

벽에는 전쟁 그림이 눈에 띄게 많이 걸려 있었다.

‘아주 자랑처럼 늘어놓았네.’

그도 그럴 것이 코노미야 백작의 인생에 있어 터닝 포인트가 된 것이 전쟁이었기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이든이 낮게 읊조린 분노가 나에게까지 전해졌다.

그도 그림을 본 모양이었다.

그의 윗입술이 뒤틀리고 마른 경련이 일어났다.

들끓는 감정들이 황금빛 눈동자 속에서 사그라지지 못하고 있었다.

얼마나 슬펐을까.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걸 무력하게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을 텐데.’

하루아침에 가족과 친구, 사랑하는 이들을 모두 잃은 상실감이란.

그가 그 당시 느꼈을 비통한 감정을 차마 가늠할 수도 없었다.

비록 내가 그 전부를 헤아릴 순 없더라도, 조금은 위로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되는 법이랬다.

나는 살짝 그의 손끝을 잡았다.

“괜챠나요.”

“…….”

“괜챠냐. 반드시 복수할 꼬니까.”

손등을 차분히 토닥였다.

내게 고정된 성난 황금빛 파도가 잔잔해지고 있었다.

“같이 나쁜 놈들 뚝배기 깨 주기로 했자냐요. 그쵸?”

그의 눈동자에서 머물던 수많은 상념들이 거두어졌다.

찰나였지만 분명, 미소가 머물렀다.

“……그래.”

나는 다시 그림으로 눈을 돌렸다.

수백 년의 전쟁, 수많은 희생, 끊임없는 착취로 이룩한 나라, 에덴 제국.

이곳에서 코노미야가 권력을 잡은 것은 순전히 운이 좋아서였다.

‘30년 전, 이든의 부모님이 죽은 수인족과의 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면…….’

그날의 배신과 기습은 수인족들의 허를 찔렀다.

최후의 순간.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에덴 대륙을 놓고 수인족과 대치를 했다.

버티기만 하면 인간의 승리였다.

전쟁의 승리를 좌우하는 것은 단연, 물자 보급.

나라와 나라를 떠도는 교역상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다.

‘엄청난 양의 식량을 코노미야에게 보급받지 못했더라면, 지금의 에덴 제국은 없었을 거야.’

전쟁 영웅이 된 그는 공로를 인정받고 ‘백작’ 작위를 하사받았다.

평민 출신 교역상에 불과했던 그가 ‘코노미야 백작’으로 인생 역전을 하는 순간이었다.

‘그 후로 에덴 제국에 정착하면서 식자재 유통 상단을 맡아 유세를 떨고 살고 있지.’

원작의 내용을 복기하며 이를 갈았다.

‘오늘 날 부른 건 기르신 남작을 견제하기 위해서일 텐데. 이 기회를 어떻게 역으로 이용한담.’

곰곰이 생각에 잠긴 사이, 응접실 안으로 코노미야 백작이 들어섰다.

머리카락이 새하얗게 샌 그는 살짝 후덕한 체구였다.

“입맛에 맞는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되겠구나.”

코노미야가 비어 있는 접시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는 곧바로 상석으로 가서 앉았다.

“신년제 준비로 회의가 조금 길어졌네.”

초대한 상대를 기다리게 하는 것은 결례였지만, 코노미야는 의연한 표정이었다.

마치 아랫사람을 대하는 것 같은 당당한 태도였다.

“에덴 제국으로 귀화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자네가 알지는 모르겠지만, 내 신년제에서 꽤 중요한 행사를 맡고 있는지라.”

은근한 과시는 상대방의 기를 죽이려는 것이 분명했다.

물론 이든은 전혀 타격이 없는 것 같지만.

“자네도 알지 모르겠…….”

“매년 황실에서 연다는 요리 대회를 말하는 건가.”

이든이 냉랭하게 잘라 낸 탓에 다이닝 룸에는 잠시 침묵이 돌았다.

‘으음, 너무 척지면 곤란한데.’

물론 나 역시도 사근사근하게 굴기 싫은 상대였다.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로 위장한 노인의 시커먼 속내를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다음에 이어질 에피소드와 로얄 클럽의 추천서를 생각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다음 에피소드의 승패를 좌지우지할 열쇠가 될 수도 있는 자야.’

적당히 가까이 지내서 나쁠 건 없었다.

‘내 기억으로 이다음 에피소드는…… 신년제를 맞이하여 황실에서 개최하는 요리 대회였지, 아마?’

그것은 한 해를 대표하는 가문을 뽑는 대회이기도 했다.

연례행사가 된 요리 대회에서 식자재 유통 상단을 운영하는 코노미야의 영향력은 클 것이다.

고로, 틀어지면 힘들다는 뜻.

콕.

이든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무신경한 눈동자가 내게로 옮겨졌다. ‘왜’냐고 묻는 듯한 그에게 조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백작저에 오기 전에 했던 작전 회의, 잊지 않으셨죠?”

이든에게 산뜻하게 했던 거짓말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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