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구름처럼 새하얀 아이가 부엌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나풀나풀.
한 마리의 자유로운 나비가 날아드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안뇽.”
코앞으로 걸어온 콩알만 한 아이는 릴리앙에게 방긋 웃어 보였다.
‘주인님의 손님이시구나.’
단번에 눈치챈 릴리앙은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아, 아, 안녕하세요.”
돌아오는 대답이 없어서 릴리앙은 허리를 펼 수 없었다. 그저 묵묵히 땅만 바라보고 있는데, 혀 짧은 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나 얘랑 같이 놀고 시포.”
“걘 노예인데?”
차분한 발걸음 소리가 뒤이어 부엌으로 들어섰다.
일을 하던 하인들은 놀란 듯 숨을 삼켰다.
‘작은 주인님께선 여긴 왜…….’
놀란 건 릴리앙도 마찬가지였다.
생전 이런 곳까지는 오지도 않는 작은 주인이었으니까.
그렇다고 어느 누구도 나서서 몬크에게 인사를 하는 이는 없었다. 그냥 다들 눈치만 보며 슬쩍 눈만 내리깔 뿐.
“알고 이써.”
“그러지 말고 다른 애를 골라.”
“왜?”
“더 좋은 노예들은 많으니까.”
아이가 고운 미간을 구겼다.
그러더니 감자 같은 주먹을 말아 쥐고서 무어라 중얼거렸다.
“아이참, ……맞꼬 싶은가.”
아이가 뽈뽈뽈 걸음을 옮겼다.
뚫어져라 바닥만 보고 있는 릴리앙의 시야로 조그마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난 얘가 조은뎨? 아니, 반드시 얘여야만 해.”
덥석. 아이가 릴리앙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
이번에도 모두가 놀랐다.
그중 가장 놀란 이는 단연 릴리앙이었다.
“예?!”
어찌나 놀랐던지, 주인의 허락이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말았다.
“난 얘가 필요해.”
“저, 저요?”
“우응, 너요.”
말간 아이가 방긋 웃었다. 햇살을 머금은 미소에 눈이 부셨다.
‘……내가 필요하다고?’
릴리앙은 순간 자신이 꿈을 꾸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제게 저렇게 환히 웃어 주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만약 꿈이라면 이 달콤한 꿈에서 깨고 싶지 않았다.
저 햇살 아래에서 계속해서 살고 싶었다.
“에이 씨.”
그때, 급소를 걷어차이고 쓰러졌던 남자 하인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금방이라도 자신을 쓰러 눕힌 자를 들이박기라도 할 기세로 일어난 하인은 제 앞에 작은 여자아이를 발견했다.
“이건 또 어디서 굴러들어 온 계집애야?”
“굴러들어 온 거 아닌뎨.”
“이걸 확!”
작은 여자아이를 향해 씩씩거리며 다가가는 하인의 앞으로 몬크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만.”
“……뭐야.”
도련님도 있었어?
허공에 어정쩡한 폼으로 굳어진 팔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지척에 서 있던 하녀가 냉큼 다가와서 하인의 옆구리를 툭, 치며 눈치를 줬다.
“……물러서는 게 좋을 것 같아.”
노려보듯 힐끔, 몬크를 훑어본 하인이 고개만 대충 까닥이며 물러섰다.
하녀가 대표로 나서서 물었다.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작은 주인님.”
하인들 대부분이 형식적으로 고개만 조아렸다.
그 누구도 진심에서 우러나와 예의를 갖추는 것 같진 않았다.
“작은 주인님은 개뿔…….”
혼잣말이 들려왔다.
성질 더러운 남자 하인의 삐딱한 반항이었다.
다른 가문 같았으면 매질을 맞고 쫓겨났겠지만, 제 아비에게조차 아들 취급을 못 받는 ‘껍데기뿐인 작은 주인’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부엌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런 상황이 익숙한 듯했다.
심지어 당사자인 몬크조차도.
단 한 사람.
천사 같은 얼굴을 가진 여자 아기만 빼고서.
티끌 하나 없이 깨끗했던 아이의 표정이 구겨졌다.
릴리앙은 저 작은 아이가 태어나서 생전 처음 듣는 심한 욕을 듣고 상처를 받았을까 봐 걱정됐다.
혹여나 울면 어떡하지.
아이가 정말 눈물이라도 터트린다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미어질 것 같았다.
* * *
아 놔.
저런 조카 18색 크레파스로 그리다가 만 쌍쌍바 같은 놈을 다 봤나.
‘지 작은 주인이 어리고 입양아라고 무시하는 걸로 모자라, 아기한테 손찌검을 하려 해?’
순간 욱한 걸 겨우 참았다.
최대한 표정을 구기지 않기 위해 눈을 치떴다.
간만에 정신이 확 들었다.
하마터면 잊을 뻔했네.
이곳이 ‘역대급 밤고구마밭’이라는 칭호를 가진 소설 속이라는 걸.
잊고 있던 걸 생각나게 하다못해, 실감 나게까지 해 준 이를 노려봤다.
그러자 지지 않고 하인 놈이 눈을 부라렸다.
화가 치밀었다.
조금 전, 그가 했던 말이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이건 또 어디서 굴러들어 온 계집애야?]
[작은 주인님은 개뿔…….]
내가 여자애고, 몬크가 자신보다 어리고 힘이 없어서 무시한 것이다.
나는 저런 재질의 사람들의 특징을 잘 알고 있다.
비겁한 찌질이들.
‘꼭 열등감으로 똘똘 뭉친 못난 놈들이 약한 상대만 골라서 자신을 입증하려고 한다니까.’
쥐뿔도 아닌 건, 지도 마찬가지면서.
확실히 몬크는 그들에게 좋은 먹잇감이었다.
그의 나이가 아직 어리고, 백작의 피가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입양아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에 가장 큰 공로를 한 것은, 이 집안의 실세인 코노미야 백작의 무관심이었다.
몬크의 주먹이 희게 질려 갔다.
파르르 떨리는 주먹과 잘근 물고 있는 입술에서 그가 애써 참고 있는 화가 엿보였다.
‘멍청이. 또 참기만 하네.’
화산이 끓는다.
그 속이 또 뜨거운 용암으로 서서히 차오르고 있었다.
나는 마침내 마음을 굳혔다.
‘그래. 기왕 못된 놈들 뚝배기 브레이커가 되기로 결심한 거, 중간중간 부실 공사도 좀 해결해 보자고.’
결심을 내린 나는 양 주먹을 쥐고 괘씸한 하인을 향해 돌진했다.
“야!”
“뭐라고?”
“이 왕치사 똥 빤스보다 못한 놈아아아아!”
“!”
기합과 향해 달려드니 하인은 잠시 판단을 잃고 머뭇거렸다.
그가 얼타는 사이, 나는 그의 허벅지에 냅다 들이박아 버렸다.
에라이, 정의의 몸통 박치기나 받아라!
“이야아아아압!”
“크억!”
예고도 없이 부딪혀 오는 충격에 하인은 휘청거렸다.
그에 반해 덩치가 작은 내 쪽은 당연하게도 뒤로 발라당 넘어져서 엉덩방아를 쿵!
“!”
“여, 영애님.”
몬크뿐 아니라, 릴리앙과 주방에 있던 하인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직 놀라긴 일러. 정의 구현은 이제 시작이거든.
“괘, 괘, 괜찮, 괜찮아요?”
어느 틈에 조명 아래로 걸어 나온 릴리앙이 횡설수설 물었다.
릴리앙도 몬크도, 둘 다 어린아이를 대해 보지 못해서 그런지 내게 쉽사리 다가오질 못했다.
안절부절못하는 손길이 내게 닿지도 못하고 흩어졌다.
“흐…….”
난 서서히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오, 안 돼.”
그 표정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본 하녀가 고개를 저었다.
늦었어.
이미 콧구멍을 벌렁대면서 시동을 걸었으니까.
나는 있는 힘껏 울음을 터트렸다.
“흐어어어엉! 아빠아아아아아!”
역시 아이의 몸이라서 그런가.
쥐어짜 낸 닭똥 같은 눈물이 금방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주방은 물론, 복도까지 쩌렁쩌렁 내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의 백마 탄 사자님의 귀에 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어, 어떡, 어떡하죠. 자, 작은 주인님.”
“뭐야. 왜 갑자기 우는 거야?”
당황한 릴리앙과 몬크가 나를 달래려고 해 봤지만, 나는 아예 바닥에 드러누웠다.
“흐아아아앙!”
“라, 라이언하트 백작님을 모시고 오겠습니다.”
이대로 두면 일이 더 커지겠다고 생각한 하녀가 재빨리 주방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코노미야 백작이 들이닥쳤다.
굴곡진 얼굴 위로 어둑한 그림자를 가득 담고 있는 이든과 함께!
“이게 무슨 소란이냐?!”
“가, 각하!”
황급히 고개를 조아리는 하인들 사이를 뚫고 가장 먼저 내게 다가온 것은 이든이었다.
‘좋았어, 이든도 왔네. 그럼 이제부터 불꽃 연기를 시작해 볼까.’
속으로 음흉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무서운 표정으로 다가온 이든이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누가 울린 거지.”
갑자기 안기게 된 그의 가슴팍이 너무 뜨거워서였을까.
순간 놀라 울음을 뚝 멈췄다.
‘으응?’
눈만 댕그랗게 뜬 채로 멀뚱멀뚱 안겨 있으니, 하녀가 냉큼 말을 붙인다.
“배…… 백작님의 손길이 닿으니 따님이 울음을 딱 그치네요. 역시 아버지이십니다.”
혹여 내가 울음을 터트린 일이 제 주인과 이든의 싸움으로 번질까 두려워 한 말일 것이다.
그래 봤자 냉혈한 이든에게는 씨알도 안 먹힐 말이겠지만.
“아버지, 라…….”
곱씹듯이 짓이겨진 이든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아버지라고 불리는 호칭이 마음에 안 든 건가.’
입가에 하도 힘을 줘서 부르르 떨리는 걸 보니, 역시나 가당치도 않은 말이겠거니 생각했다.
눈이 마주치자 아니나 다를까 그는 눈을 샐쭉하게 만들었다.
‘언제는 본인 입으로 아빠랬으면서.’
입술을 삐쭉 내밀고 싶었지만, 일단 저 괘씸한 하인 놈을 혼내 주는 게 먼저였다.
나는 얼른 이든의 가슴팍에 볼을 비볐다.
“아빠가 와서 죠아. 뚝 해써요.”
흠칫.
이든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제자리에서 껑충 뛰었다.
‘아니, 내 애교가 몸서리칠 정도야?’
하마터면 이든의 멱살을 붙잡을 뻔한 충동을 겨우 억눌렀다.
‘우씨, 사자님. 상황이 이러니까 한 번만 봐드리는 거예요.’
나는 서운한 마음을 뒤로하고, 못된 놈을 물 먹여 주기 위해 하인을 가리키며 고자질했다.
“저 아조씨가 나 때렸써요.”
“뭐? 내, 내가 언제!”
이든과 코노미야의 시선이 하인에게로 향하자, 그가 발끈하며 언성을 높였다.
“그리구 주인님은 개뿔이라구 해써요.”
“말은 똑바로 해야지! 그, 그건 각하가 아니라 작은 주인께……!”
교묘하게 말을 바꿔 먹은 내 증언에 하인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만.”
코노미야 백작이 손을 들었다.
아무리 정 붙이지 않은 양자라지만, 일개 하인이 무시하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겠지.
그것도 한창 기 싸움 중인 남 앞이니까.
“가, 각하. 그게 아니라……. 오, 오해십니다.”
“그만 듣고 싶다고 말했을 텐데.”
별수 없이 입을 꾹 다문 하인은 가자미눈을 하고서 날 노려보았다.
어쭈. 눈 안 깔지?
아직도 뻔뻔하게 구는 하인이 너무나도 괘씸했다.
‘자꾸 그러면 필살기를 보여 줘야지.’
나는 사악한 미소를 띠며 천천히 입을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