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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28/142)

28화

나는 뻔뻔스럽고도 태연하게 치트 키를 꺼냈다.

“막, 몽쿠 오빠가 재밌게 놀아 줘서, 신문사 아조씨한테는 쉿! 하려고 했는데. 그냥 말해야겠다.”

곧장 코노미야의 고개가 몬크에게로 돌아갔다.

갑작스러운 관심에 몬크는 몸을 움츠렸다.

“사실이느냐.”

“……그게.”

으휴, 바보. 밥상을 다 차려 줬는데도 떠먹지도 못하네.

적당히 거짓으로 말을 맞추면 될 건데, 미련할 정도로 착해 빠졌다.

나는 쓸데없이 물러 터진 몬크와 다르다.

내게 이런 거짓말쯤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정직하게 산다 해서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마냥 착하다는 건 이용당하기 쉽다는 걸 뼈저리게 알고 있어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런 못된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고 싶으니까.’

맹세컨대, 나 하나 거짓말해서 두 영혼을 시궁창 속에서 구해 낼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나는 언제든, 기꺼이, 거짓말을 할 것이다.

“녜! 사실임미다. 몽쿠 오빠랑 약속했써요. 신문사 아조씨한테 아무 말 안 하고 쉿! 하기로.”

이든에게 안긴 채 조잘거렸다.

이든과 코노미야 백작, 몬크와 릴리앙의 시선이 내게 집중됐다.

“거래 조건은 무엇이냐.”

“친구끼리 한 약속인뎨요?”

“그거 말고, 네가 요구한 조건이 또 있었을 거라 생각이 드는데.”

금괴에도 넘어가지 않았던 아기이니 분명 노리는 게 따로 있을 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의심이 거두어지지 않는 눈빛에 활짝 웃었다.

“아, 맞따. 요리 보조사 릴리앙을 내게 준대써요! 그치, 오빠?”

“어? 어, 으응.”

내게 몰린 시선을 옮겨 받은 몬크는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몬크가 관심에 목마른 아이라 다행이었다.

다루기 참 쉬웠으니까.

그동안 원했던 만큼의 관심을 몰아주면, 부끄러워서 빈틈을 마구마구 보이게 된다.

“그게 금괴보다 더 가치 있다는 것이냐?”

릴리앙이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게 느껴졌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그 대신 아이다운 해맑음을 얼굴에 담으려 애썼다.

“목숨보다 더 가치 있는 게 있나여?”

“…….”

멋모르는 어린애의 선택에 코노미야의 입매가 비틀렸다.

분명 그는 지금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최소의 손해로 최대의 이득을 보았다고.’

아니나 다를까, 몬크를 바라보는 눈빛이 유해졌다.

“좋은 협상을 했구나.”

몬크가 경직됐다.

아마 제 아비라는 사람에게 태어나 처음으로 들어 본 칭찬일 테지.

몬크가 나를 바라봤다.

나는 여느 때보다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몽쿠 오빠가 최고임미다!”

그는 그동안 제 속을 채웠던 용암 대신, 날 빤히 눈에 담았다.

‘……100%.’

굳히기 성공이다.

“협상을 했으니 기르신 신문사 쪽과는 만나지 않는 거겠지?”

코노미야 백작이 재차 확인하듯 내게 물었다.

“우음, 그러려고 했지만 저 아조씨 때문에 취소하고 싶어졌는걸여.”

나는 하인을 콕 집어 가리켰다.

코노미야의 눈동자가 빠르게 굴러갔다.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들겨 보는 게 틀림없었다.

곧이어 두꺼운 입술이 움직였다.

“내 무례하게 군 것에 대해 사과를 시키도록 할 터이니, 마음을 풀었으면 하는구나.”

“하, 하지만 각하, 억울합니다! 아이가 거짓을 고하는…….”

여태껏 하인 주제에 어디를 가든 백작가의 기세를 등에 업고 거들먹거렸을 게 뻔한 인사였다.

제 지위도 아닌 걸로 다른 이들에게 갑질을 했겠지.

하는 짓거리를 봤을 때 안 봐도 뻔했다.

그때, 나지막한 음성이 깔렸다.

“루나 라이언하트.”

“예?”

“저 애, 따위가 아니라고.”

가뜩이나 쌀쌀맞은 금안이 유난히도 겨울을 담고 있었다.

살벌한 인상에 하인은 주눅 들었다.

“……그, 그래요. 아무튼 간에 어린아이가 하는 거짓말인데 어찌 속아 주시는 겁니까.”

강한 자 앞에서만 눈을 내리까는 꼴이 참 밉상이었다.

기왕 이든을 등에 업었으니, 한 번쯤은 기세등등하게 굴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냥 어린애 아닌뎨.”

“……예?”

“백쟉님이 초대한 손님에게 무례하게 하는 건 백쟉님을 무사히는 거랬써.”

“아, 아닙니다! 제가 어찌,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그제야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렸다.

“죄송합니다, 영애님. 부디 선처해 주십시오.”

“시룬데.”

“예? 하지만 사과를 하면 마음을 푸신다고 하셨…….”

“내가 언졔? 그건 백쟉님이 한 말이고. 난 용서해 준다고 안 했는뎨.”

“아, 아니. 이렇게 나오시면…….”

“후음, 코노미야 백쟉밈이 로얄 클럽 추천서까지 써 주신다면…… 마음이 풀릴 것 같기도 하구.”

코노미야의 입술이 짓이겨지자, 하인의 낯빛은 더욱 창백해졌다.

이로써 하인은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을 키운 대가를 톡톡히 치를 것이다.

게다가 나는 원하던 바를 모두 얻게 될 테고.

‘로얄 클럽의 추천서, 코노미야 백작가 차기 가주의 신임, 그리고 훌륭한 요리사가 되어 줄 릴리앙까지.’

그야말로 완벽한 외출이었다.

“그리고 사과 대상이 잘못됐짜나.”

나는 마지막까지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친히 하인에게 몬크와 릴리앙을 올려다보게 하여 말했다.

“용서는 내가 아니라 몽쿠 오빠랑 릴리앙한테 빌어야지.”

* * *

간만에 구름 사이로 아침 태양이 낯을 드러냈다.

덕분에 라이언하트 백작저의 창에 내리 삼일을 전세 놓던 성에가 서서히 사라져 갔다.

이든은 이른 아침부터 집무실에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다시는 수인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시하고 괴롭히지 않겠습니다.]

코노미야 백작저 하인이 싹싹 빌던 목소리가 귓가에 환청처럼 맴돌았다.

그 일이 있은 지도 벌써 나흘이 지났다.

그런데도 이든에게는 방금 겪은 것처럼 생생하기만 했다.

‘……괜한 오지랖이었다.’

그냥 자신에게 무례하게 대한 행동에 사과나 받을 줄 알았건만.

아이는 제 예상을 벗어났다.

하인이 코노미야의 아들에게 사과를 한 것에도 만족하지 않았다.

기어코 노예 신분인 수인족에게까지 사과하게끔 만들었다.

‘쓸데없는 짓을 했어.’

인상을 쓰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않으면 저도 모르게 마음이 유하게 풀어질 것 같았다.

‘인간들은 죄다 이기적인 놈들이다. 제 이익을 위해서라면 남의 고통 따위 안중에도 없어 하는 잔혹한 것들.’

늘 되뇌던 말로 스스로를 세뇌하듯 되풀이해 봐도 소용없었다.

눈을 감으면 자꾸만 그 작고 싱그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벌써 나흘째다.

햇볕을 머금은 푸르른 생기가 가득한 바다가 찰랑찰랑 시선을 자꾸만 앗아 가는 것이.

웃을 때마다 이상한 소리를 내며 반쯤 접히는 눈매가 자꾸만 눈앞을 아른거렸다.

애써 지워 내려 해 보지만, 파도처럼 다시 밀려들어 왔다.

“미쳤군.”

머리칼을 헝클어트렸다.

늘 깔끔하게 정돈됐던 머리가 흐트러졌다.

빈틈이 생겨 버린 제 마음 같았다.

아까부터 눈에 들어오지 않아 괜스레 뒤적거렸던 신문을 책상 위로 내팽개치듯 던졌다.

하아.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줄곧 괴롭히던 두통은 없었음에도 일부러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렇게라도 하면 머릿속에 제멋대로 침투하는 불청객을 몰아낼 수 있을 것만 같아서였다.

“다시 두통이 도지신 겁니까?”

때마침 집무실로 들어서던 리챠드가 물었다.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다니는 건지.

단정하게 차려입은 옷이 온통 흙투성이였다.

몸이 지저분해지는 꼴은 죽어도 못 보는 이든은 인상을 팍, 구겼다.

“꼴이 그게 뭐지. 개똥밭에 구르다 와도 그것보단 낫겠군.”

“그 말, ……굉장히 수치스럽습니다만.”

뭐, 안 봐도 뻔했다.

어디서 또 엉뚱한 짓을 꾸미면서 개구멍이나 파다가 온 걸 테니.

이든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종종 저렇게 멀쩡한 땅을 파헤쳐 놓느라,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리챠드였으니까.

다만 평소 정갈한 매무새를 고집하는 이든에게는 흙바닥에서 뒹굴며 노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아니, 딱 질색이었다.

그래서 리챠드가 등 뒤로 수상한 망태기 같은 것을 둘러멘 것을 봤음에도 그저, ‘또 이상한 것을 주워 왔군.’ 생각하고 말았다.

“정 불편하시면 주치의를 불러들일까요?”

“됐다. 피곤할 일 만들 생각 하지 마라.”

“그래도 계속 참기만 하시면 고질병 됩니다.”

“시끄러운 건 너 하나로도 족해.”

리챠드의 도톰한 입술이 삐쭉 튀어나왔다.

그 모습에 불현듯 또, 그 아이가 떠올라 버렸다.

양 볼을 빵빵하게 불리고서 입술을 내미는 새초롬한 모습이 자꾸만 계속해서, 막을 새도 없이.

동글동글한 눈 코 입이 하릴없이 밀려들어 왔다.

또 무심코 빠져 버리고 말았다.

‘젠장, 또 생각해 버렸군.’

이든은 제 머릿속을 또 다시 내어 주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 표정, 금지다.”

“이제는 하다 하다 표정까지 통제하시는 겁니까?”

“시끄러워, 리챠드.”

억울한 표정의 리챠드를 뒤로하고 이든은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손에 닿은 뺨이 뜨거웠다.

그제야 제 얼굴에 열기가 올랐다는 것을 알아챘다.

“정말 어디 편찮으신 건 아닌지.”

멍하니 넋이 나간 이든을 보며 리챠드가 짐짓 걱정스럽게 물었다.

감기 기운인 건가.

그럴 리는 없다.

자질구레한 잔병치레는 어릴 때 이후 겪어 본 적이 없으니까.

한데, 왜 이렇게 얼굴이 화끈거리는 거지.

자꾸만 헛생각에나 빠지게 되고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 곰곰이 되짚었다.

마침내 이든은 결론을 내렸다.

“……아무래도.”

“아무래도?”

무언가 기대하는 듯, 리챠드의 까만 눈동자가 반짝였다.

“더위를 먹은 것 같다.”

“예?”

데엥.

리챠드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했다.

창틀에는 아직 덜 녹은 성에의 흔적이 선명하게 얼룩져 있었다.

하지만 리챠드는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흐음, 이거야 원…….’

어느 때보다 진지한 이든의 표정 탓이었다.

‘특별히 이번만 모르는 척해 드리겠습니다, 각하.’

그는 웃음을 속으로 참아 넘겼다.

“……루나는.”

“그건 왜 물으시는 겁니까?”

표정 관리를 하고 싶었는데,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자꾸만 콧구멍을 씰룩거리는 리챠드를 보며 이든이 똥 밟은 표정을 지었다.

“뭐지, 그 더러운 표정은.”

“흐흐……. 그런 걸 보통 걱정과 관심이라고 합니다.”

“관짝 짜고 싶은 거 아니면, 하려던 보고나 마저 해.”

“아가님께서는 편지를 보낼 데가 있어서 토리 무크랑 함께 방에 계십니다.”

그 뒤로도 리챠드가 무어라 재잘거렸지만, 이든의 귀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편지를 쓴다고? 누구에게.’

이든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구겼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이마 정중앙에 깊게 팬 주름을 보며 리챠드는 미소 지었다.

“슬쩍 폐하께도 써 보는 게 어떻겠냐고 언질을 줘 볼까요?”

“쓸데없는 편지 따위 무엇 하러.”

“얼핏 듣기에는 남자아이에게 쓴다는 것 같던데…….”

설마, K 어쩌고한테?

저도 모르게 떠올린 이름이었다.

이든은 이를 갈며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빙고.’

리챠드가 휘파람을 불렀다.

어째 상황이 점점 재밌어졌다.

“어디 가십니까, 폐하?”

리챠드는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 대신 부술 기세로 문을 박차고 뛰쳐나간 이든의 뒷모습만 멀찍이 볼 수 있었다.

“제 예상은 틀리지 않는다니까요.”

리챠드의 콧노래가 이어졌다.

그는 등에 메고 있던 보따리를 내려놨다.

흙으로 범벅된 보따리 안을 슬며시 열자, 가방 속에는 도토리 마도구가 한가득이었다.

“흐흐, 아가님. 저는 개코라고요. 이 라이언하트 저택 내에서 제 코를 피해 숨길 곳은 없답니다.”

음흉하게 혼잣말을 주절거린 리챠드가 양손을 비볐다.

도토리 마도구의 뚜껑을 여니, 둥글게 말린 신문들이 우수수 밀려 나왔다.

자, 이제 각하께 얼마나 삥을 뜯을지 한번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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