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9/142)

29화

누가 내 얘기라도 하나? 어째 귀가 간질간질하네.

토리가 귓바퀴를 만지작거리는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아가님, 어디 불편하신 곳이 있습니까?”

“우응? 아냐. 툐리, 이번에도 믿고 맡길게.”

“소인만 믿으십시오!”

그는 내게 건네받은 편지를 들고 곧장 방 밖으로 사라졌다.

‘이로써 노아에게 안부 편지도 보냈고. 어디 보자, 다음 할 일이…….’

종이에 적어 둔 해야 할 일 리스트를 살펴보았다.

‘로얄 클럽 추천서는 기다리기만 하면 곧 우리 손에 들어올 테고. 메인 요리사가 되어 줄 릴리앙도 구출해 왔으니까, 이제 남은 건…….’

단 하나뿐이었다.

‘신년제 요리 대회의 재료 공급 문제를 해결하는 것.’

코노미야 백작가의 연승 행진을 끊어 내려면, 일방적으로 코노미야 백작저에게만 유리한 구조를 바꿔야만 한다.

“흐음, 어똔 방법이 좋으려나.”

날로 수직 상승 하는 츄르 상점의 매출표를 들여다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개인이 각자 재료를 준비해 와서, 하고 싶은 요리를 선보인다면 참 공평한 승부가 될 텐데.’

그렇게 된다면 자신이 없다.

“질 자신이.”

본격적으로 반종이 위에 목탄을 쥔 손으로 꼬물꼬물 다음 에피소드의 타개 작전을 짜내려 갔다.

“죠아써. 이렇게 하고, 이렇게 하면 되겠따.”

막힘없이 술술술 계획을 써 내려가던 내 손은 특정 구간에서 막히고 말았다.

‘역시 이게 제일 난관이네.’

재료 공급 문제.

이건 백 번 찔러 봐도 코노미야 백작이 허락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방법은, 코노미야도 어쩔 수 없이 물러서야만 하는 필연적인 이유를 만드는 건데.’

머리를 부여잡고 이래저래 파해법을 궁리하고 있을 때, 손님이 찾아왔다.

똑똑.

수줍게 방문을 두들긴 이는 나흘 전 일로 라이언하트가의 사용인이 된 릴리앙이었다.

“릴리앙 안뇽!”

“아, 아, 안녕하세요. 아가님.”

“부엌에 적응은 잘 하구 이써요?”

“네. 아가, 아가님 덕분, 덕분이에요.”

쭈뼛대는 건 여전했다.

그래도 예전보다 표정은 밝아서 다행이었다.

“꿈꾸던 요리사 일은 어때요? 잘 맞는 거 같아여?”

“그게…….”

릴리앙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머뭇거렸다.

“아이 챰, 내가 말했쬬.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남 눈치 보지 말고 하고 살라구.”

“그렇, 그렇지만, 이번에도 제가 다 망쳐, 망쳐 놓을까 봐요.”

“부엌 좀 부수면 좀 어때. 괜챠냐요, 우리 백쟉밈 돈 짱 많아.”

“하지만…….”

습관이 되어 버린 릴리앙의 입버릇이 마음 아팠다.

나도 한때 대한민국의 청년이었을 적, 릴리앙처럼 주눅 들어 산 적이 있었다.

‘작은 실수라도 하면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알았지.’

지금 생각해 보면 바보 같았다.

원래 삶은 처음의 연속이다.

우리는 무수한 처음들을 딛고 살아간다.

“처음이니까 서툰 게 당연한 거야. 그깟 실수, 하면 좀 오때. 그렇게 조금씩 배우고 성쟝하는 거지.”

실수가 두려워서 스스로를 최악으로 규명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그러니 누구든, 실수해도 괜찮다.

서툴다는 건 잘못이 아니니까.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다.

나는 마지막 남은 종이에 글자를 적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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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뚤빼뚤한 글씨지만 제법 마음에 들었다.

종이를 반으로 접어 그녀에게 건넸다.

“자.”

“제게, 제게 주시는 겁니까?”

“맨날 아침마다 보고 세 번씩 읽어야 뎨. 큰 소리로.”

“크, 큰 소리로요?”

“우응, 약속.”

“야, 약속.”

그녀와 새끼손가락을 걸고서 도장 콩 찍었다.

“아가, 아가님께서 주신 이 편지는 소, 소중히 간직할게요.”

그래그래, 이 은혜는 꼭 잊지 말고 최고의 요리사가 되어 맛난 미트볼로 갚아 줘, 릴리앙.

나는 흐흐흥, 웃으며 만찬에 둘러싸인 상상을 했다.

동시에 벌컥! 문이 열렸다.

느닷없이 내 방에 쳐들어온 이는 이든이었다.

‘아이코, 깜짝이야!’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있는데 시시각각 그의 안면 근육이 변했다.

성큼성큼 방 안으로 들어온 리챠드가 릴리앙을 노려봤다.

“히끅!”

릴리앙은 석상처럼 굳었다.

한참 죄 없는 릴리앙을 쏘아보던 이든이 내게 손을 뻗었다.

응?

“…….”

그가 인상을 팍 쓰며 고개를 까닥였다.

좋은 말로 할 때 어서 내놓으라는 눈빛이었다.

눈치를 살피던 나는 그의 시선이 내 손에 닿아 있다는 걸 깨달았다.

‘설마 이거?’

나는 들고 있던 짜리몽땅한 목탄을 얌전히 그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뭐 하자는 거지?”

“목탄 달라는 거 아니였써요?”

“……”

짧은 침묵이 흘렀다.

“리챠드에게 새 목탄 달라고 해 보까요?”

“아니, 그거 말고. 다른 건 없냐고.”

“녜?”

“난?”

이든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뭘 말하고 싶으신 거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아니다.”

그가 두 눈을 끔뻑이고 있는 내게서 시선을 휙 돌렸다.

왠지 모르게 퉁명스러워진 얼굴로 그가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요리 대회 준비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나, 물으러 온 것이다.”

“릴리앙이 대회 나갈 음식을 연구하고 이써요!”

나는 나흘 동안 릴리앙이 부엌을 드나들며 열심히 노력한 걸 알았기에 자신감 있게 대답했다.

“내와 보도록.”

“네, 이, 일단, 만들어 보긴 했는데…….”

주춤거리며 방을 나선 릴리앙이 잠시 후, 리챠드와 함께 돌아왔다.

그들이 들고 온 은쟁반은 총, 다섯 개.

리챠드는 준비한 요리를 차례대로 내려놓으며 덧붙였다.

“아가님, 평가는 냉정하게 하셔야 합니다.”

“녜, 당근 방구임미다! 승부의 세계는 냉정하니까여.”

결의에 찬 내 끄덕거림을 보고서 리챠드가 싱긋 미소 지었다.

“그럼, 공개하겠습니다.”

쟁반 덮개가 거둬지자 가려져 있던 음식이 나타났다. 동시에 기대로 초롱거리던 모두의 눈빛이 까맣게 죽어 버렸다.

“……으응?”

나는 눈을 느릿하게 끔뻑였다.

내가 잘못 보는 건가 싶어 두 눈을 비벼 봐도 변함이 없었다.

‘정체가 뭐지?’

리챠드와 나는 다섯 가지 음식을 가운데 두고 눈빛을 교환했다.

그 역시 당황한 눈치였다.

아무도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는데, 이든이 불쑥 입을 열었다.

“이게 요리라고?”

직설적인 음성에 릴리앙의 어깨가 아래로 추욱 쳐졌다.

“아이고.”

안타까운 탄성을 뱉은 리챠드가 슬며시 고개를 묻었다.

어…….

그러니까, 이걸 어떻게 포장한다?

나는 어떻게든 정체를 알 수 없는 죽사발들을 보며 할 말을 떠올리려고 했지만, 무리였다.

입만 뻥긋거리는 나를 대신해 이든이 거침없이 질문하기 시작했다.

“대체 뭐로 만든 거지?”

“지, 집사님께서 준비해 주신 식재료로…….”

“이 정체불명의 것과 나머지는?”

“그것, 그것들도 다…….”

릴리앙은 심문이라도 하는 것처럼 질문 공세를 하는 이든에게 잔뜩 주눅 들었다.

점점 목소리가 기어들어 가더니 이제는 아예 울락 말락 했다.

헉. 어떡해.

저러다가 울음바다가 될까 싶어서 냉큼 수저로 수프가 되어 버린 비운의 생선 스테이크를 떠먹었다.

“새, 생긴 게 무슨 상관이야. 일단 맛만 있으면 돼찌!”

리챠드도 덩달아 생선 죽(?)을 한술 떴다.

“하하. 하하하. 맞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음식은 맛이 중요하…….”

우에에에.

우리는 입에 넣었던 걸 동시에 도로 뱉어 버렸다.

큰일이다.

이게 무슨 맛이람.

우리 두 사람을 본 릴리앙의 눈이 그렁그렁해졌다.

“여, 역시 저는 틀렸어요.”

아, 이걸 어째.

겨우 자신감을 조금 찾았던 릴리앙이 다시 시무룩해졌다.

‘릴리앙의 엄청난 힘을 간과하고 있었네.’

큰일이었다.

주방 식기만 튼실한 쇠로 바꿔 버리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식재료들이 그녀의 힘을 버티지 못했다.

형체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죽사발이 된 음식이 그 증거였다.

“이걸 어쩌죠.”

“진짜 오또카지.”

리챠드와 나는 심각해졌다.

그 와중에 이든은 홀로 평화로웠다.

“대책은 식사를 하면서 생각하도록 하지.”

“오늘까지는 미리 사 둔 걸로 해결하도록 하죠. 미안합니다, 릴리앙.”

“아, 아니. 아니에요. 당연, 당연한걸요.”

바보 같은 릴리앙은 그렇게 열심히 준비해 놓고도 불만 하나 없었다.

그녀의 손가락에 덕지덕지 붙은 밴드들이 신경 쓰였다.

정작 이든은 무심한 얼굴이었다.

“올 때 신문도 챙겨 오도록.”

얄미워.

누구는 지금 누구를 위해 계획 짜느라 머리가 터지겠는데.

“걱정 안 뎨요? 우리 일등 해야 하는뎨.”

“정 안 되면 사람을 매수하도록 하지. 그럴 만한 자금은 얼마든 있으니.”

무뚝뚝한 누구 덕분에, 릴리앙의 어깨가 한껏 처졌다.

에효. 한숨이 푹 쉬어졌다.

그래, 현금 박치기 좋지. 나라고 그걸 왜 생각 안 해 봤겠어.

문제는 그렇게 해 버리면 릴리앙이라는 캐릭터는 영영 트라우마를 못 이기게 된다는 거다.

‘내 깊은 속도 모르면서.’

얄미운 얼굴을 몰래 노려보았다.

그러든지 말든지, 이든은 리챠드가 가져온 신문을 펼쳐 들었다.

금세 신문을 읽어 내려가는 그를 샐쭉 노려보았다.

“아가님, 오늘은 쉬림프 파이입니다.”

리챠드가 따뜻하게 데워진 음식을 내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차례대로 릴리앙에게는 바나나 다발을.

이든 앞에는 츄르와 함께 정체불명의 고깃덩어리를 내려놓았다.

‘오잉? 저건 무슨 음식이지?’

난생처음 보는 생김새에 시선이 끌렸다.

그러니까, 마치 비유를 하자면 반려동물에게 가끔 특식으로 챙겨 주던 생닭처럼 생겼다.

“그건 모예요?”

“꼬꼬몬입니다.”

“꼬꼬몬?”

내가 특이한 음식에 관심을 갖자 리챠드가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인간들이 자주 먹는 ‘닭’과 비슷하게 생긴 마물이죠. 수인족에겐 몸보신 요리이기도 하고요. 각하께서 요즘 몸보신이 필요하신 것 같기에.”

“쓸데없는 짓을 했군.”

이든이 무심한 말투와 함께 신문을 다음 장으로 넘겼다.

그리고 우연처럼 가장 첫 줄에 적힌 기사가 내 두 눈을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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