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여기요, 주문할게요.”
“한 접시 더 추가해 주세요.”
“여기 포장도 되나요?”
순식간에 주문이 밀려들었다.
이든이 목말을 태워 준 덕분에 나는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손님들을 맞이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내 쪽에 있는 게 아니었다.
우당탕탕.
덜커덕, 퉁!
챙그랑!
조리대 쪽이 난리였다.
리챠드의 활약 덕에 손님이 몰리자 요리를 맡은 릴리앙 쪽에서 곤란한 상황이 생긴 듯했다.
얼핏 보니 그녀 혼자서 밀린 주문을 처리하기에는 벅차 보였다.
“백쟉밈. 잠시만 내려 쥬세요.”
이든의 머리를 꼬옥 끌어안은 채로 속삭였다.
“……흠!”
잠시 움찔거린 그가 나를 조심히 땅에 내려 주었다.
“백쟉밈이 저 대신에 손님들 오면 맞이해 쥬실 수 있쬬?”
“어디 가려는 거지?”
“저는 잠시 릴리앙 쪽을 봐줘야 할 것 같아서여.”
괜히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며 입술을 뻐끔거리는 그를 뒤로하고, 곧장 릴리앙에게로 달려갔다.
“릴리앙, 괜챠나요?”
“주문이 열 개나 밀렸는데, 어떡, 어떡하죠?”
집게를 쥔 릴리앙이 울먹였다.
갑자기 몰린 손님에 당황하고 페이스를 잃은 모양이다.
조리대 위는 그야말로 전투 현장이 따로 없었다.
깨진 접시며 힘 조절 실패로 구부러진 국자가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아가님! 소인, 아가님께서 맡겨 주신 홍보지 전달 임무를 완료했습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토리가 텅 빈 도토리 가방을 흔들며 저 멀리서 달려오고 있었다.
등 뒤로는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손님이 줄줄이 따라왔다.
밀린 주문서 위로 또 다시 주문이 쌓이기 시작했다.
‘이대로 릴리앙에게만 음식을 맡겨서는 안 되겠어.’
빠르게 판단이 섰다.
나는 아기용 앞치마를 잽싸게 목에 걸고 집게를 들었다.
“내가 계란물이랑 빵가루를 묻혀 줄 톄니까, 릴리앙은 튀기기만 해여.”
“아, 아가님…….”
“같이 하면 해낼 수 이써요!”
야무지게 말아 쥔 양 주먹을 허공에 붕붕 흔들어 보였다.
그게 위로가 됐는지, 무참히 흔들리던 릴리앙의 새카만 눈동자에 잔잔한 평화가 찾아왔다.
“다시 집중……, 집중해서 침착히 해 볼게요.”
“죠아써!”
다진 고기를 밀가루 위에 퐁퐁퐁, 계란물에 퐁당, 빵가루에 데굴데굴.
퐁퐁퐁, 퐁당, 데굴데굴.
몇 번을 반복했을까.
합심해서 하다 보니 어느덧 쌓여 있는 주문이 하나둘씩 줄어 갔다.
나는 제일 마지막에 주문한 손님을 위한 빵가루 묻힌 고기를 릴리앙에게 건네며 주문서를 확인했다.
“이것까지만 나가면 일단 급한 불은 끈 거져?”
“네. 도와주셔서 감사, 감사해요.”
그녀가 내게서 건네받은 고기를 달궈진 기름 속으로 쏘옥 담갔다.
치이이익!
맛있게 튀겨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휴, 진짜 폭풍이 한차례 몰고 간 것 같네.’
노릇노릇 익어가는 기름 속 릴까스를 보며 조용히 한숨을 돌렸다.
때마침 두 번째 호객 행위를 마치고 돌아온 리챠드가 조리대로 다가와 내가 쥐고 있는 집게를 가져갔다.
“이제부터는 제가 도와드릴 테니 아가님께서는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직 끝난 게 아니쟈나요.”
저만 쉴 수 없죠.
요리 대회가 끝나려면 아직 두 시간이나 남았다.
손님이 얼마나 더 올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일손이 부족한 마당에 쉴 수는 없었다.
‘그리고 또, 이쯤 되면 슬슬 악당들이 방해 공작을 펼치러 올 테니까.’
남 잘되는 꼴 못 보는 자들이야 널리고도 널렸으니 언제든 개수작을 부리러 올 수도 있었다.
다 된 밥상에 재 뿌려지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는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만 했다.
“그렇게 무리하시다가는 크게 탈 납니다.”
그러고 보니, 슬슬 팔다리가 후들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정신없이 도와줬다는 것이 실감 났다.
“그렇지만, 혼자서 쉬는 건 미안한뎨…….”
리챠드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염려는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히려, 제 목이 날아가게 생겼다는 걸 걱정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만.”
“리챠드 목이 왜여?”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내게 리챠드가 작게 속삭였다.
“저기 저 멀리서 맹수 한 마리가 저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 게 보이시지 않습니까?”
“……백쟉밈이요?”
흘끔, 이든 쪽을 살피니 그가 입술을 굳게 닫고서 손님을 상대하고 있었다.
뭐야. 언제부터 보고 계셨대.
무심코 피로감에 팔뚝을 주물럭거리다 멀찍이 떨어져 있는 이든과 시선이 얽혀들었다.
그의 반듯한 미간 사이가 구겨지는 게 어렴풋이 보였다.
왠지 모르게 짜증을 꾹 눌러 참는 것만 같았다.
일이 너무 고돼서 화가 난 걸까?
“왜 저러시는 거에여?”
“아마 아가님께서 무리하고 계신 것 때문에 심기가 불편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절…… 걱정하시는 거라구여?”
내 걱정을 이든이 왜?
나는 팔을 주무르던 것도 까먹은 채로 그를 바라봤다.
“그냥 걱정이 아니라 딸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라 해 두죠.”
낯간지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윙윙 울렸다.
‘아버지의…… 사랑?’
누군가 내 뒷머리를 둔기로 내려치기라도 한 것만 같았다.
생경한 기분에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그러다가 덜컥, 뜨거운 릴까스 소스가 들어 있는 웍을 잘못 건드려 버리고 말았다.
덜커덕!
눈앞의 모든 것이 슬로 모션으로 움직였다.
기우뚱 기울어 조리대 아래로 떨어지는 웍은 나를 향해 있었다.
아, 이런.
“아가니이이이임!”
릴리앙의 찢어질 듯한 비명에 내 쪽을 바라본 손님들의 표정이 서서히 경악으로 물들어 갔다.
그 순간 든 생각은 하나밖에 없었다.
‘더럽게 뜨겁고 아프겠다.’
나는 곧이어 덮칠 통증을 각오하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 * *
그다지 일이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다만 머리 아픈 향수 냄새와 호시탐탐 자신을 노리는 뱀 같은 눈동자들이 진절머리 날 뿐이었다.
음식을 먹으러 왔으면 곱게 음식만 먹고 갈 것이지.
여인들의 은근슬쩍 꺼내는 흑심은 이든에게 그저 귀찮기만 했다.
“호호. 음식이 참으로 맛있습니다.”
“…….”
“보통 다른 가문들은 모두 사람을 고용해서 하던데, 라이언하트 백작가는 조금 특이하군요.”
“…….”
“맞아요. 혹, 따님과의 추억을 만들기 위해서 그러신 건가요? 참으로 다정하신 아버지시네요.”
“……그런가?”
내내 침묵으로 일관하던 이든이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그가 굳이 인간을 고용하지 않은 건 딱히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였다.
인간 귀족들처럼 고상이나 떨면서 아랫것들을 입으로만 부리고 싶지는 않았다.
또, 루나와 함께 대회를 준비하고, 직접 참여하는 과정들이 그리 나쁘지 않기도 했고.
‘……오히려 나름 즐거운 편이었지.’
이든의 입가에 희미하게 피어난 미소를 본 여인들이 냉큼 그를 둘러싸고 재잘거렸다.
“부녀 사이가 참 보기 좋습니다. 한데 말입니다. 아이에게 엄마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러게 말입니다. 엄연히 엄마와의 유대감이라는 것도 있으니까요.”
“아직 라이언하트가의 안주인 자리가 비어 있다던데, 백작님의 이상형은 어떻게 되시는지……, 호호호.”
뻔히 보이는 속내였다.
겉으로는 아이를 위하는 척하지만 실은 자신의 금고를 노리는 것일 터.
세간에 그가 코노미야 백작가에 맞먹는 재산을 가진 졸부라는 소문도 돌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딜 가나 쓰레기들은 꼭 있군.’
이든은 피곤한 눈가를 지그시 누르며 속을 가라앉혔다.
성질 같았으면 당장에라도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꾸욱 눌러 참았다.
‘이 모든 것이 엘코어를 찾기 위함이라 했으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딸이 말했으니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며 시선을 돌렸다.
자연스럽게 호박색 동공 속에 곱게 양 갈래를 묶어 올린 자신의 딸아이가 담겼다.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건가.’
조그마한 손으로 팔을 조몰락거리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또 무리했나 보군.’
조금 쉬엄쉬엄할 것이지.
옆에서 흑심 품은 여인네들이 무어라 떠드는 것은 들리지도 않았다.
이든은 아이의 표정을 자세히 읽기 위해 미간 사이를 좁혔다.
그때 리챠드가 루나에게 다정히 귀엣말로 속삭이는 장면을 떡하니 목격하고 말았다.
어쭈?
반듯하게 누워 있던 이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내 화들짝 놀란 아이가 이든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리챠드 이 자식. 또 뭐라고 떠들었기에…….’
아무래도 가서 한 소리 해야겠어.
그리 생각한 순간, 릴리앙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아가니이이이임!”
짧은 찰나, 이든은 뛰어난 동체 시력으로 파악을 마쳤다.
아직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소스가 담긴 웍이 아이 위로 떨어지려는 상황이었다.
‘젠장.’
몸이 앞섰다.
늘 행동하기에 앞서 거듭 생각에 생각을 더한 후, 신중히 움직이는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본능이 먼저였다.
들고 있던 행주와 쟁반을 내팽개치고 아이를 향해 달렸다.
타다다닷, 타앗!
늘 발걸음 소리를 줄이고 사뿐사뿐 달리던 그가 그런 것도 신경 쓸 겨를 없이 무작정 몸을 날렸다.
그 순간 그는 전혀 제 몸을 아끼지 않았다.
덥석!
아이를 품에 안음과 동시에 뜨거운 웍이 그 위를 덮쳤다.
터어어엉!
이든의 등을 맞고 튕겨 나간 웍이 땅 위를 나뒹굴었다.
“각하!”
리챠드가 그들에게로 달려왔다.
뜨겁게 달궈진 소스를 뒤집어쓴 이든은 가장 먼저 자신의 품속 아이를 내려다봤다.
“배…… 백쟉밈…….”
아이의 눈가가 붉다.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못하는 푸른 동공 위로 스멀스멀 물기가 차올랐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톡 하고 떨어질 것만 같았다.
어쩐지 조급해진 금빛 눈동자가 아이의 몸을 구석구석을 훑고 지나갔다.
“어디 다쳤나?”
“오…… 오또케.”
조그마한 손이 그에게 뻗어졌다.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을 좇아 그의 시선이 움직였다.
대체 어디가, 얼마나, 어떻게 다쳐서 아프기에.
물어보고 싶은 질문들이 소용돌이처럼 입가에 맴돌았다.
“저는 괜찮은뎨, 백쟉밈이…….”
아이의 손이 그의 어깨에 닿았다.
……아.
그제야 이든은 제 등이 축축하게 젖어 있다는 걸, 그리고 욱신거린다는 것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