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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34/142)

34화

“……아.”

내 심장은 쿵쾅쿵쾅 터질 것만 같은데, 이든이 무덤덤하게 쓰러져 있던 몸을 일으켰다.

후두두둑.

몸 위를 덮고 있던 박살 난 나무 조각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든이 나를 감싸기 위해 몸을 던진 탓에 부서진 상자의 파편들이었다.

“일어설 수는 있나?”

“녜…….”

“다행이네.”

그가 나를 품 안에서 내려 주었다.

심정이 어지러웠다.

좀처럼 그에게서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이든이 나를 구해 줬어.

다칠 걸 알면서도 몸을 날리면서까지…….

왜?

아니, 그보다도 어깨는 괜찮을까?

팔팔 끓였던 소스라서 엄청 뜨거울 텐데.

수많은 생각들로 머릿속이 혼잡했다.

어쩌면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지도, 인상을 찌푸리지도 않는 그의 모습이 마음에 쓰여서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어째서 아픈 내색 하나 하지 않는 거야.’

도리어 미간이 구겨진 건 나였다.

“엉망이 됐군.”

이든이 품속에서 깨끗한 손수건을 꺼내 들어 내 머리카락에 튄 릴까스 소스를 닦아 주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쟈나요…….”

“중요해, 내겐.”

고저 없이 무뚝뚝한 목소리였는데 어째서일까.

내게는 그 여느 때보다 다정하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비상식량이 무사하니 다행이다.”

내 머리카락을 단정히 정리해 준 그가 뒤로 돌아섰다.

한데 미묘하게 땅을 딛는 한쪽 다리가 절뚝거리는 것 같았다.

다리를 삔 걸까?

나는 그가 멀어지기 전에 다급히 옷자락을 붙잡아 세웠다.

“백쟉밈!”

“…….”

이든이 비스듬히 고개만 돌려 나를 바라봤다.

살짝 드러난 그의 목덜미가 새빨갰다.

소스를 뒤집어쓴 곳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게 분명했다.

“다치셨쟈나요. 다리도 그렇코 어깨 쪽도…….”

“이봐, 땅콩.”

천천히 돌아선 그가 허리를 숙여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별것도 아닌 걸로 울지 마라.”

그의 손등이 내 눈가를 부드럽게 스쳐 지나갔다.

그제야 내가 울었다는 걸 깨달았다.

따스한 봄바람에 웅크려 있던 꽃송이가 터지듯, 시큰해진 눈가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던 눈물이 제대로 투둑, 터져 버렸다.

그러자 눈가에 닿던 손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

머리 위로 내려앉는 그의 시선이 무거웠다.

“울지 말라니까.”

참 말을 안 듣는군.

잔잔한 혼잣말이 가슴께를 시큰하게 만들었다.

아마 얼음주머니를 들고 달려오는 리챠드가 아니었더라면, 그만 엉엉 울음을 터트려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어쩌자고 그렇게 앞뒤 생각도 없이 달려드셨습니까?”

“놀란 것 같으니까, 달래 줘.”

이든이 내게 턱짓했다.

나는 냉큼 리챠드의 바지 자락을 부여잡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쿨쩍, 저는 괜챠느니까, 쿨쩍, 백쟉밈부터요.”

“아니, 애부터 봐.”

이든과 나는 서로에게 우선순위를 미뤘다.

우리 둘 사이에 낀 리챠드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의자를 가리켰다.

“일단 두 분 다 여기 앉아 보십시오.”

엄중한 목소리에 우리는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아가님의 상처부터 봐드리겠습니다.”

“하지먄……!”

“쉿. 아가님을 먼저 보호하는 게 어른으로서 당연한 겁니다.”

리챠드는 꼼꼼히 내 상태를 살폈다.

“어디 따끔거리는 곳 있으십니까?”

“아뇨.”

“욱신거린다든가 움직이기 어려운 곳은요?”

“없써여.”

나는 리챠드가 하는 질문마다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그냥 조금 놀랬을 뿐.

이든이 감싸 안아 준 덕분에 나는 작은 생채기 하나도 나지 않았다.

“아가님은 다행히 아무 곳도 다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무사하다는 결론이 내려지자 비로소 굳어 있던 호박색 눈동자가 누그러들었다.

훌쩍.

훌쩍 훌쩍.

훌쩍 훌쩍 훌쩍…….

삐쭉 나온 코를 훔치는 내게 리챠드가 막대 사탕을 건넸다.

“눈물 뚝 하셔야지 각하를 치료해 드릴 겁니다.”

“녜, 뚜욱.”

“잘하셨습니다.”

나는 리챠드가 까 준 막대 사탕을 얌전히 입에 물고 이든을 바라봤다.

이제 사자님의 차례였다.

“이제 각하의 상처를 좀 봐야겠습니다.”

“됐다니까.”

“한 번만 더 거절하셨다가는 아가님의 눈물보가 다시 터질 것 같습니다만.”

“…….”

이든의 입술이 다물렸다.

그가 시선을 내려 나를 바라봤다.

나는 혹여나 치료를 거절할까 봐서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볼을 부풀리고 콧구멍을 벌렁거렸다.

그러자 이든의 입술 새로 허, 하고 짧은 숨이 터져 나왔다.

“직접 벗으시렵니까? 아님 제가 벗겨 드리는 방법도 있고.”

“쓸데없는 짓을…….”

“저런, 제가 벗겨 드리는 쪽을 택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너……!”

막을 새도 없이 리챠드가 이든의 두터운 겉옷을 벗겨 내고, 순식간에 셔츠의 단추까지 풀었다.

감춰져 있던 목덜미와 어깨 라인이 눈앞에 드러났다.

피부 겉면이 빨갛게 익어 있었다.

“저런.”

“어또캐…….”

눈썹이 절로 팔(八)자로 기울었다.

저거 나중에 흉 남는 거 아니야?

가뜩이나 눈가에 난 칼자국 때문에 사나워 보이는 양반인데, 목덜미에 화상까지 생겼다가는 괜한 소문만 더 늘어날 것 같았다.

내 표정을 읽은 리챠드가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빵빵한 얼음주머니를 흔들어 보였다.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행히 겉옷이 두꺼워 화상을 입은 면적이 크지는 않습니다.”

“정말여?”

“얼음찜질을 하면 금방 가라앉을 겁니다. 이것 보십시…….”

의욕이 너무 앞섰던 걸까.

퐁!

열심히 문지르던 얼음주머니가 그만 터져 버리고 말았다.

덕분에 이든의 어깨 위로 얼음 덩어리와 차가운 물이 촤르륵 쏟아졌다.

……뚝.

……뚝.

얼음물을 뒤집어쓴 이든의 주먹이 조용히 말아 쥐어졌다.

“…….”

“이런.”

그대로 석상처럼 굳어 버린 이든에게 리챠드가 귓속말을 속삭였다.

“절대로 고의는 아니었습니다만.”

“리챠드. 그 얼음주머니처럼 터지고 싶나?”

“사랑합니다, 각하.”

“퇴직금으로 관짝을 만들어 주지.”

리챠드의 머리 위로 만들어진 하트를 견디지 못한 이든이 벌떡 일어섰다.

축축이 젖은 옷자락이 몸에 달라붙어 본의 아니게 그의 어깨와 가슴 근육이 부각됐다.

“어머머…….”

아까부터 이 사태를 관전하고 있던 여인들이 탄성을 집어삼켰다.

어째 구경꾼들이 더 몰리는 것 같았다.

“…….”

“으음. 아무래도 나머지 치료는 따로 마차에서 하고 오는 게 좋겠습니다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든이 마차가 있는 방향으로 휙 돌아섰다.

그가 리챠드의 말대로 고분고분히 움직인 것은 오랜만이었다.

* * *

이든과 리챠드가 치료를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두 남자의 빈자리를 대신해 토리가 두 배는 열심히 뛰어 주어 대회를 계속할 수 있었다.

비록 소스는 없었으나, 릴까스의 인기는 식지 않았다.

금방 만든 바삭바삭한 튀김이 맛없을 리 없으니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눈물을 그친 나는 커다란 의자에 앉아 정신없이 주문을 받고 있었다.

“루나!”

누군가 나를 불렀다.

돌아보니 보육원 식구들이 내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뇨아! 수녀밈! 언니 오빠들두 왔녜!”

너무 오랜만에 봐서 반가운 얼굴들이었다.

“이번 요리 대회에 네가 참가한다고 해서 왔단다.”

“감사함미다, 수녀밈.”

주문을 마친 보육원 식구들이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개구쟁이 톰이 콧방귀를 뀌며 내게 말을 붙였다.

“흥, 파리 날릴 줄 알았는데. 땅꼬마 주제에 제법이네!”

“그래도 와 줘서 고마오, 톰.”

말은 얄미워도 나쁜 애가 아니라는 걸 알아서 그냥 웃어 주었다.

“루나. 혹시……, 울었어?”

어느 틈에 내 옆으로 다가온 노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눈가가 아직 빨간가?’

눈두덩을 매만지며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냐. 눈에 뭐가 좀 들어가서 비벼써.”

“…….”

“진쨔 괜챠나.”

노아는 내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분위기가 어색해질 즈음, 노수녀님이 박수를 치며 주위를 환기시켰다.

“자, 노아의 굿바이 파티 식사를 그럼 시작해 볼까?”

“굿바이 파티여?”

나는 오동통하게 부은 눈매를 치켜뜨며 되물었다.

‘전에 말했던 입양이 확정된 걸까?’

괜스레 손에 땀이 나는 것 같았다.

“루나에게 말하는 걸 잊었구나. 이번에 노아가 귀족가에 입양 가게 되었단다.”

언젠가 직면하게 될 일이라는 건 알았지만, 막상 닥치니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내 심란한 속도 모르고, 노아가 슬며시 손을 잡았다.

“입양 가게 되면 널…… 집으로 초대해도 될까?”

“우응, 언제든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차라리 그게 나았다.

어느 가문에 가서, 네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두 눈으로 봐야만 안심될 것 같았으니까.

‘만약 위기에 빠진다면 내가 도움 주기도 쉬워질 것 같기도 하고.’

나름대로의 대책을 세우고 있는데, 내 머리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쾅!

이어서 큰 소리와 함께 릴까스가 상 위에 놓였다.

누구인가 싶어서 뒤돌아보니 왠지 성난 표정을 짓고 있는 이든이 서 있었다.

“백쟉밈……!”

언제 온 거지?

릴까스 소스와 얼음물로 인해 엉망이었던 셔츠가 멀끔한 옷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옷깃 사이로 붕대가 보이는 걸 보니 치료도 무사히 마친 모양이다.

그런데…….

치료가 많이 아프기라도 했던 걸까?

금방이라도 불꽃이 튀어나올 것처럼 황금빛 눈동자가 이글이글했다.

“뭐, 뭐야.”

달그락.

이든이 풍기는 압도적인 분위기에 톰이 들고 있던 포크를 떨어트렸다.

“히, 히끅! 무…… 무서워.”

보육원의 언니 오빠들도 덜컥 겁을 먹고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든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곳만 보고 있었다.

내 손등 위에 겹쳐진 노아의 손.

묘하게 그곳에만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다.

쾅!

이어서 노아의 앞에도 접시를 내려놓았다.

“주문한, 릴까스, 나왔다.”

한 글자씩 끊어 말하는 게 어째 이를 부득부득 가는 것 같다.

나는 혹여나 저번처럼 싸움이 붙을까 봐서 냉큼 이든의 다리를 콕 찔렀다.

“백쟉밈, 손님에게는 친절하게 말해야지요.”

“나가는 곳은 저기다. 손님.”

삐딱하게 시선을 내리깐 이든이 출구를 가리켰다.

음식을 내려놓은 지 30초도 되지 않았는데…….

우리 사자님께서는 무조건 ‘손님’이라는 말만 붙이면 다 친절한 건 줄 아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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