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올해의 우승 가문은…… 코노미야 백작가다.”
결과 발표와 함께 탄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안 돼.’
열심히 준비했건만.
정정당당한 승부로는 비겁한 자들을 이길 수 없는 걸까?
묵직한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멍했다.
“역시 이번에도 코노미야 백작가에서 승리를 거머쥐는구려.”
“이변이 있을 줄 알았는데, 아쉽게 되었구먼.”
“그러게. 그 올해 새로 참가한 가문의 음식도 꽤 괜찮았는데.”
“꽤가 뭔가. 그 맛을 대체할 수 없다니까!”
몇몇 이들은 결과가 아쉬웠는지 웅성거리며 우리 쪽을 힐끔 바라봤다.
“여, 역시 제가 요리를, 요리를 맡아서 진 건가 봐요.”
우리 중에 단연 가장 상심이 컸을 릴리앙이 커다란 어깨를 추욱 늘어트렸다.
그녀에게 위로의 말을 건넬 새도 없이, 다페 남작의 호명이 이어졌다.
“코노미야 백작은 단상 위로 나와 폐하께서 내리시는 상을 받들라.”
코노미야 백작이 단상 위로 올랐다.
얼핏 스친 눈빛에는 우리를 향한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
‘너희가 아무리 날고 기어 봤자, 이 제국은 내 발아래 있다’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일찍이 새로운 세력에 대해서 견제하는 것이었다.
“젠장, 이렇게 된 이상 다른 방법으로 회수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리챠드가 이든에게 속삭였다.
이든은 시선을 엘코어에 고정한 채로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달그림자들을 대기시켜.”
……뭐? 달그림자를?
나는 화들짝 놀라 이든을 바라봤다.
달그림자는 라이언하트 산하의 직속 암살단이었다.
이든은 기어코 피를 봐서라도 엘코어를 회수할 생각인 것 같았다.
‘돈버르레 공작 쪽 사람을 건드리면 위험해.’
당장에 엘코어를 회수할 수는 있더라도 향후 위험 요소가 컸다.
그들이 유혈 사태를 그냥 덮을 리가 없었다.
‘황궁 쪽의 경비가 더 강화되고 수색까지 이뤄지겠지.’
엘코어를 빼돌린 것을 들키는 건 시간문제다.
‘……그럼 모든 게 물거품이 돼.’
이든의 복수는 물론, 생존을 위한 내 노력까지도.
가문 전체가 멸족이 되는 상황까지 치닫게 할 수는 없었다.
다른 방법을 떠올려야 했다.
‘차라리 과정이 조금 위험하더라도, 미래를 위한 걸 선택한다면?’
도박수이긴 해도 걸어볼 만했다.
아니, 걸어야 했다.
최악보다는 차악의 선택지를 고르는 게 지금 상황에서는 최선이었으니까.
‘믿자, 지켜 줄 거야.’
심호흡 끝에 입술을 뗐다.
“다른 방법이 있어여, 백쟉밈.”
리챠드와 이든의 시선이 나에게로 옮겨졌다.
“저를 믿으시져?”
“…….”
이든은 대답이 없었다. 그 대신에 시선을 떼지 않으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좋아, 그거면 됐어.
나는 주먹을 말아 쥐며 단상으로 눈길을 돌렸다.
마침 황제가 엘코어를 보석함에서 꺼내 코노미야 백작의 목에 걸어 주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지금이다!
손을 번쩍 들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이의 있슴미다!”
“!”
일대에 파장이 일었다.
경악하는 자, 흥미로워하는 자, 역정을 내는 자…… 등등.
반응은 모두 제각각이었다.
“이의라니!”
“저런 건방진……!”
나를 알아본 다페 남작이 발끈하며 나섰으나, 황제의 손이 높이 들렸다.
“폐하! 저 법도에 어긋나는 무엄한 자들을 당장에다가 꿇려 바치겠습니다!”
다페가 ‘법도’를 운운하다니.
지나가던 개가 비웃을 일이었다.
내 코웃음 소리를 들은 다페 남작의 눈에서 불길이 화르륵 피어올랐다.
“저, 저것이!”
“물러서라. 짐이 직접 얘기해 볼 터이니.”
“!”
황제가 한 발짝 나섰다.
아무리 다혈질의 다페라고 한들, 감히 황명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이 판정에 문제라도 있다는 것이냐?”
권위적인 시선이 나를 짓눌렀다.
하지만 나는 굴하지 않고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녜, 완전 있슴미다!”
다시금 광장은 시끄러워졌다.
감히 황제의 결정에 반박을 놓는 네 살짜리 계집애는 역사상 없었기 때문이었다.
웅성거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코노미야 백작까지 나섰다.
“많은 이들이 시상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린애 장난 따위 무시하고 어서 시상을 진행하시지요.”
코노미야의 재촉에도 황제는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흥미로운 눈동자로 나를 관찰하며 뒷짐을 졌다.
“귀여운 아이가 말하지 않느냐. 옛 선조들께서 말씀하시길, 이런 어린아이들이 곧 나라의 미래라 하셨다.”
황제가 나를 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짐은 우리 제국의 미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예, 폐하.”
황제의 뜻이 완강하니 코노미야 백작도 별수 없이 물러섰다.
“앞으로 나오거라, 아가야.”
나는 이든의 품에서 벗어나 총총총 황제에게로 걸어 나가 인사했다.
“황졔 폐하를 뵈옵니댜. 라이언하트 백작가의 루나 라이언하트 임미다.”
“그래, 백작가의 아기 영애께서 이 결과에 불만이 있는 모양이로구나.”
“녜. 아무리 생각해도 결과가 이상함미다.”
“무엇이 말이냐?”
“우리 장사가 엄청 엄청 엄청 잘 됐꼬든요.”
“물론 라이언하트 백작가의 매출액도 높았지. 하지만 결과적으로 코노미야 백작가의 매출이 140만 달란 더 높았다.”
황제의 시중이 우리에게 결과표를 가져다주었다.
종이에는 매출 총합이 한눈에 보기 쉽게 정리되어 있었다.
▶ 코노미야 백작가 총 판매 금액 : 460만 달란
▶ 라이언하트 백작가 총 판매 금액 : 320만 달란
황제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합계로 봤을 때, 압도적인 차이로 코노미야 백작가의 승리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는 결과표를 직접 봤음에도 절대 주눅 들지 않았다.
“폐하. 분명 일등은 가장 인기 있는 음식을 만든 가문에게 쥰다 하지 않으셔써요?”
“그러하다.”
“그런데 그 기준이 너무 애매한 거 아닌가여?”
“어째서지? 판매 총액이 높다는 것은 가장 많이 팔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곧 인기가 가장 높았다는 뜻이지.”
나는 주머니 속에서 하나 남아 있던 홍보용 전단지를 꺼내 보였다.
“애초에 판매 금액이 다르면여?”
“!”
주름진 눈매가 펴지면서 확장된 동공 속에는 놀라움이 깃들어 있었다.
“우리 릴까스는 한 접시에 5,000달란이여써요. 코노미야 백쟉밈네 음식은 20,000달란이던뎨.”
코노미야를 보며 씨익 웃었다.
“금액으로는 코노미야 백쟉밈이 이겼찌만, 접시 수로 따지면 우리가 더 많이 많이 팔았는걸여?”
“!”
애당초 판매 금액에서 차이가 있으니, 잘못된 결과였다.
우리의 판매 금액이 낮았으니, 더 많이 팔았음에도 코노미야 백작가보다 합계가 낮을 수밖에 없었다.
“총액을 ‘개당’ 금액으로 나눠서 따지면…… 코노미야 백작가가 총 230 그릇을, 라이언하트 백작가가 총 640 그릇을 팔았습니다. 폐하.”
황제의 시종이 재빨리 셈을 헤아려 황제에게 아뢰었다.
“……하 ……하하하하!”
조용한 장내에 황제의 웃음소리가 널리 울려 퍼졌다.
모두가 숨을 죽인 채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짐의 말을 정정하도록 하지. 올해의 우승은 라이언하트 백작가다.”
황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
“한 판의 역전승 같구먼!”
사람들은 이례적인 상황에 열광했다.
주요 세도가 가문도 아닌 데다가, 타지 출신에 추종 세력도 마땅히 없는 가문이 역전극을 보인 건 그들에게 자극적인 화젯거리였다.
‘해냈다!’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에, 입술을 짓이기는 코노미야 백작과 눈이 마주쳤다.
굉장히 분한 듯, 멀리서도 그의 흉부가 씩씩거리며 오르내리는 게 보였다.
‘엘코어 하나 뺏겼다고 벌써부터 그렇게 분해하지 마. 아직 우리한테 줄 게 있으니까.’
때마침 코노미야의 심복이 그에게 편지를 건네고 있었다.
신경질적으로 봉투를 열어 본 그의 낯빛이 차츰 새하얗게 질렸다.
‘역시 리챠드가 일 처리 하나는 빠르고 정확하다니까.’
표정만 봐도 추측할 수 있었다.
코노미야가 방금 읽은 것이 내가 리챠드에게 미리 부탁한 협박 편지라는 걸.
[리챠드. 보육원 화재 사건과 코노미야 백작의 시종이 대회를 망치려고 했던 것을 빌미로 협박 편지를 쓰세여. 오늘 결과에 불만을 갖거나, 로얄 클럽 추천서를 보내지 않으면 기르신 신문사에 모두 폭로해 버린다구여.]
한 시간 전, 내가 고안해 낸 꾀가 먹혀들었다.
코노미야 백작이 꽁지 빠지게 자리를 뜨는 것을 보니 확신이 섰다.
이번 에피소드도 우리가 승리했음을.
“영특한 아이로구나.”
“감사함니다, 폐하.”
나는 다시 어리숙한 아이를 흉내 내며 황제에게 정중하게 배꼽 인사를 했다.
“라이언하트 백작가의 부녀는 함께 단상 위로 올라오도록.”
황제의 부름에 우리는 단상 위로 올랐다.
내가 슬그머니 손을 잡자, 이든의 시선이 아주 잠시 내게 머물다가 스치듯 떠났다.
그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황제 쪽을 바라봤고, 때마침 황제가 나에게 다가와서 나는 금세 그 미묘한 시선을 머릿속에서 지워 냈다.
“네가 그 아이로구나.”
황제가 살갑게 말을 건넸다.
……나를 아나?
보육원 출신인 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황제를 직접 대면해 본 적이 없었다.
한데, 황제는 마치 나를 알고 있는 듯한 말투였다.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전염병이 퍼졌을 때, 가장 먼저 치료제를 개발했다지?”
황제의 얼굴로 피어오른 너그러운 미소 덕분에 긴장이 조금은 풀렸다.
‘츄르를 말하는 건가?’
뒤늦게 그가 나를 어찌 알고 있는지 깨달았다.
‘신문에 나온 걸 보셨구나.’
경계심이 차츰 누그러들었다.
황제는 내 미묘한 표정을 세밀히 살피며 입술을 열었다.
“혹시 짐에게 원하는 것이 있느냐? 적당한 것이면 들어주마.”
“녜?”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나는 두 눈을 빠르게 끔뻑였다.
뜬금없이 그런 질문을 하는 황제의 속을 조금도 알 수 없었다.
‘혹시 이것도 일종의 시험인가?’
내 나름대로 머리를 골똘히 싸매는 걸 본 황제가 하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전염병 당시 네 재능 덕에 제국이 무사할 수 있었으니, 짐이 네게 은혜를 입은 거나 다름없다. 그저 그것을 조금 갚고자 묻는 것이다.”
“어…….”
이런 건 계획에 없었는데.
이든을 붙들고 있는 손에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뭐를 달라고 해야 해?’
적당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잘 생각해 보거라.”
황제는 우물쭈물하는 내가 입을 열 때까지 침착히 기다려 주었지만, 보는 눈과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다.
뭐라도 좋으니 아무거나 빨리 말해야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적당한 것을 고민하다가, 문득 황제의 시종이 들고 있는 등불이 눈에 들어왔다.
아, 모르겠다.
“그럼 저걸 쥬세요.”
“저 등불을 말이냐?”
“녜.”
“고작 저 등불로는 짐이 네게 진 큰 신세를 갚기 부족하다.”
“등불 안에 든 발광석이 귀한 거라고 들어써요.”
촛불 없이도 빛을 낼 수 있는 발광석은 비스 특산품으로 주로 황실에서만 쓰이는 용품이다.
가져가서 딱히 쓸 데는 없겠지만, ‘황제에게 직접 하사받았다’는 의미가 있으니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한참은 부족한 대가인 거 같은데…….”
“전 이걸로도 충분히 죠아요. 폐하께서 직접 주신 거자냐요! 감사함미다, 폐하!”
등불을 소중한 것 대하듯이 꼬옥 안은 채로 꾸벅 인사를 하니, 황제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라이언하트 백작, 그대는 참으로 사랑스럽고 영특한 딸을 두었군그래.”
이든은 대답 대신 가볍게 묵례했다.
“조만간 짐이 초대장을 보내도록 하겠다.”
황제가 시종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시종은 회수해 온 엘코어를 황제에게 내밀었다.
“매년 신년제의 요리 대회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올해의 가문’ 칭호는 라이언하트 백작가에게 부여됐음을 공표한다.”
마침내 엘코어가 이든에게로 돌아온 순간이었다.
동시에 터져 나온 사람들의 우레와 같은 함성 소리 때문일까.
목 언저리로 소름이 돋아났다.
괜스레 울컥해서 코끝이 시큰거리는 게, 마치 내 부모님의 유품을 되찾기라도 한 것만 같았다.
‘모두가 노력해 준 덕분이야…….’
나는 사람들 틈에서 함께 소리 지르고 있는 이들을 바라봤다.
리챠드, 릴리앙, 토리.
차례차례 그들이 기뻐하는 표정을 눈에 담았다.
속이,
……속이 자꾸만 뜨거워진다.
“우리가 해내써!”
시큰해진 코끝을 부여잡은 채로 그들을 향해 손을 붕붕 흔들었다.
내게는 여러모로 이득이 많아 뛰어든 에피소드였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매 순간이 도박이었다.
그래도 잘 풀려서 속이 후련했다.
‘이로써 조금 생존 확률이 높아졌겠네.’
엘코어를 무사히 회수했으니 이든에게 점수를 조금이나마 땄을 거라고 생각하던 찰나,
툭.
머리에 묵직한 것이 얹어졌다.
“……?”
올려다보니 내 머리를 덮은 것은 이든의 커다란 손바닥이었다.
동그랗게 빚어진 맹수의 두 눈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얼굴로, 한참을 응시하던 그가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 움직임을 따라 눈을 옮겼다.
이든이 손에 든 엘코어를 내 목에 걸어 주었다.
“모든 영광은 내 딸에게 돌리겠습니다.”
귓가를 간지럽히는 낮은 목소리가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이어서 부드러운 입술이 내 이마에 닿았다.
……쪽.
“!”
누군가 부추겨서 한 게 아닌, 이든 스스로 행한 일이었다.
‘생존 확률…….’
어쩌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높아진 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