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7/142)

37화

신년제 요리 대회 이후, 나는 몸져누웠다.

내내 츄르 사업에 대회 준비까지 도맡아서 하느라 몸에 무리가 온 탓이었다.

이든은 내게 강제로 휴식을 명령했다.

그 덕분에 나는 일주일 동안 꼼짝없이 침실에서 먹고 자고 싸고만 반복했다.

몸 상태는 빠르게 회복됐다.

“백쟉밈, 저 이제 괜차냐요.”

나는 7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줄곧 내 방에 출석 도장을 찍으러 온 이든에게 말했다.

‘이제 다시 바깥 활동을 해도 될 것 같은데…….’

몸살 기운도 깔끔하게 사라져서 전보다 더 쌩쌩했다.

한데, 이놈의 사자님은 내 침대맡 의자에 앉아 묵묵히 신문만 볼 뿐. 내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백쟉밈?”

“…….”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자, 그제야 내게 시선이 닿았다.

“이제 그만 휴식 끝 하면 안 뎨요?”

“안 돼, 누워.”

단호하게 대답한 그가 이불을 내 목 끝까지 덮어 준 뒤, 다시금 신문으로 눈을 돌렸다.

……이건 새로운 괴롭힘 방법인 걸까?

진지하게 고민됐다.

똑똑.

노크 소리 후 열린 방문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민 리챠드의 얼굴에는 턱 밑까지 내려온 다크서클이 짙게 자리 잡고 있었다.

“아가님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안뇽, 리챠드. 미안해오…….”

리챠드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가뜩이나 업무도 많은데, 일주일간 나를 대신해 츄르 사업까지 몽땅 도맡아 하느라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닙니다, 미안하실 것 없습니다. 전혀요.”

그가 손까지 휘저으며 부정해 보였지만, 퀭한 눈 밑과 푸석푸석한 피부 탓에 더 안쓰러워 보였다.

“그건 츄르 매출표에여?”

나는 리챠드의 손에 들려 있는 종이를 가리켰다.

그러자 리챠드의 방문에 관심도 없던 이든이 신문을 구길 듯이 덮었다.

“당분간 일에 관한 얘기는 일절 꺼내지 말라고 했을 텐데.”

괜히 왜 리챠드에게 승질이래.

나는 그가 리챠드를 쫓아낼세라 침대에서 폴짝 뛰어내려, 호다닥 달려갔다.

“아뇨. 쥬세요, 궁금해요.”

매출표를 확인하니 전보다 눈에 띄게 상승 곡선을 이루고 있었다.

‘요즘 어딜 가나 우리 가문에 관한 얘기가 끊이지 않는다더니.’

츄르 사업은 날개 돋친 듯이 고공 행진이었다.

으흥흥, 만족의 미소를 짓고 있는데.

등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커다란 손이 매출표를 쏘옥 빼앗아 갔다.

“확인했으니까, 다시 누워.”

이든은 내게서 뺏어 간 매출표를 주머니에 넣으며 침대를 가리켰다.

‘이제 진짜 그만 쉬고 싶은데.’

자꾸만 내게 일을 맡기지 않으려는 걸 보면, ……내가 못 미더운 건가?

울상이 된 나를 보고 리챠드가 파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각하께서 아가님을 걱정하셔서 그런 겁니다.”

……걱정?

신년제 요리 대회 이후부터 시도 때도 없이 간질거리던 왼쪽 가슴이 또 말썽이었다.

꽃가루 알레르기라도 생긴 걸까.

“아무튼, 츄르 사업은 당분간 제가 계속 맡을 테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안 돼요. 리챠드는 집샤님이자냐요.”

그는 이든의 보좌관 역할도 도맡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바빴다.

여기서 더 짐을 지워 줄 수는 없었다.

‘사업을 전반적으로 관리하고 맡아 줄 이가 있으면 좋을 텐데.’

역할 분담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누가 좋을까.’

곰곰이 잠겨 해결책을 고안하던 중, 불현듯 떠오른 이가 있었다.

“아!”

맞아. 내가 왜 그 캐릭터를 잊고 있었지?

일찍이 도움받은 적도 있었는데!

“전에 츄릅츄릅병의 치료제에 관한 소문을 퍼트리는 데 도움을 주신 분을 만나고 시포요!”

금방 내 생각을 눈치챈 리챠드가 무릎을 턱! 내리쳤다.

“혹시, 피헨느에게 츄르 사업을 맡기시려는 겁니까?”

“녜! 가능할까여?”

허락을 구하기 위해서 초롱초롱한 눈으로 이든을 바라봤다.

갑작스러운 눈빛 공세에 잠시 머뭇거린 이든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도록 해.”

“와아, 백쟉밈 최고!”

기분이 좋아져 와락 그를 끌어안으니, 이든은 전기라도 찌릿찌릿 통한 사람처럼 흠칫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감사합니다, 아가님. 덕분에 전 한숨 돌릴 수 있게 됐습니다.”

“별말씀을여.”

리챠드는 이든의 눈 흘김에도 기죽지 않고 눈물을 찍어 내는 시늉을 해 보였다.

“참, 아가님. 릴까스 가게 오픈에 관한 문의가 끊이지 않는 건 어찌할까요?”

리챠드가 이때다 싶어 편지를 주섬주섬 꺼내 놓았다.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편지 양이 제법 상당했다.

“한번 직접 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이게 다 릴까스 관련돼서 온 편지라구여?”

“요식업에 투자하고 싶어 하는 자들, 환경 보호 단체, 미식가 길드, 드래곤 용병 길드 등 다양한 곳에서 러브콜을 보내왔습니다.”

일전에 츄르 사업 때보다 몇 배는 많은 수였다.

‘확실히 황실배 대회라서 그런지 파급력이 엄청나네.’

그 말인즉, 릴까스가 츄르만큼이나 돈 되는 사업이 될 거란 뜻이었다.

“일전에 목이 좋은 자리를 알아 두었습니다. 인테리어와 내부 공사만 하면 2주 내로 바로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리챠드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인지, 미리 준비한 서류들을 내게 보여 주었다.

그가 내민 서류를 살펴보니 츄르 가게와 비슷하게 입지 조건이 좋은 자리였다.

‘하지만…….’

사자님께서 허락하지 않을 게 뻔했다.

릴까스 사업을 시작하게 되면 또 다시 내가 전반적으로 맡게 될 테니까.

슬그머니 이든의 눈치를 보는데, 아니나 다를까 내 생각을 꿰뚫은 그가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쓸데없이 무리하다가 또 쓰러질 생각 하지 마라.”

“그렇다고 쉽게 포기하기에는 아까운 기회라고 생각됩니다만.”

역시 내 편을 들어 주는 건 리챠드밖에 없었다.

황실의 관심까지 더해져 있으니, 릴까스 아이템을 일회성으로 버리기 아까웠다.

“그럼 츄르 사업처럼 전적으로 맡아 줄 담당자를 구하면여?”

“고려해 보도록 하지.”

“헙! 정말여?”

의외로 순순히 떨어진 허락에 제자리에서 껑충 뛰었다.

이든은 폴짝폴짝 뛸 때마다 함께 흔들리는 내 양 갈래 머리칼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덧붙였다.

“그런 자를 구할 수 있다면 말이지.”

……아, 맞다.

바람 빠진 공처럼 푸시시, 급격히 어깨가 아래로 처졌다.

‘적임자를 구하는 게 문제네.’

설사 그런 자를 구한다고 하더라도 이든이 허락할지가 큰 난관이었다.

이든은 기본적으로 인간을 쉽게 신뢰하지 않으니까.

‘이걸 어쩐다…….’

철옹성 같은 이든 라이언하트의 마음을 녹일 만한 자가 하늘에서 뚝 떨어져 줬으면 좋겠건만.

마땅히 떠오르는 인물이 더는 없었다.

데굴데굴 눈을 굴리던 나는 우연히 특이한 장식이 된 편지 봉투 하나를 발견했다.

묘하게 낯이 익고 끌림이 있는 편지였다.

‘이게 어떤 가문의 인장이더라.’

나는 홀린 듯이 그 편지를 집어 들었다.

<남쪽 변방에서 지내는 프로스트 남작입니다. 라이언하트 백작가에 충성을 다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화려한 필기체로 기교를 부리지도, 우쭐거리며 제 자랑 늘어놓기 바쁜 내용도 아니었다.

소탈한 글씨로 간결하게 전하고자 하는 것만 담겨 있었다.

누군가 본다면 대수롭지 않게 넘길 편지였지만, 내게는 어느 러브 콜보다 강렬한 이끌림이었다.

“프로스트 남쟉?!”

“아가님께서 아시는 분입니까?”

알다마다!

프로스트 남작은 돈 냄새를 잘 맡는 자였다.

작위가 낮은 탓에 돈버르레 공작가에 무시당하며 배척당했을 뿐.

‘선견지명이 좋은 편이라, 확실히 밀어주는 뒷배만 있다면 크게 될 인재라고 알고 있어.’

원작에서 깊지는 않지만, 이든과는 나름대로 우호적인 관계였다.

본문에 언급되길.

훗날 수인족 여자와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하게 되는 프로스트 남작은 먼 훗날, 이든이 계획하는 수인족 구조 사업에 자금을 보태기도 한다.

그런 이가 우리 가문에게 러브 콜을 보냈다.

이것은 손쉽게 충실한 수하를 만들, 넝쿨째 굴러온 기회였다.

“프로스트 남쟉을 초대해 쥬세요.”

* * *

프로스트 남작은 답신을 보낸 지 하루 만에 라이언하트 저택을 방문했다.

이든은 자신과 동행한다는 조건에서 프로스트와의 접견을 허락했다.

……그런데 언제부터 ‘동행’의 의미가 ‘품에 꼭 안는다’는 의미로 변질된 걸까.

이든은 프로스트가 휘둥그런 눈으로 쳐다보든 말든, 나를 품에 꼭 안은 채로 응접실에 들어섰다.

그리고는 대화 내내 죄 없는 내 양 갈래 머리칼만 만지작거렸다.

그게 또 나름대로 시선을 끌었나 보다.

어느 순간부터 프로스트도 사업에 관한 얘기를 하다 말고 멍하니 나와 이든을 응시했다.

“신경 쓰지 말고 하던 말 계속해.”

“……아!”

퍼뜩 정신을 차린 프로스트는 다시 제 의견을 피력하기 시작했다.

“하여, 관심을 가진 투자자들이 꽤 많습니다. 투자해 두시면 자금 마련의 발판은 물론, 가문의 인지도를 쌓으시는 데도 도움이 되실 겁니다.”

그가 준비해 온 자료들을 이든 앞에 내려놓았다.

이든은 그것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품 안의 내게 물었다.

“어떠냐. 네가 보기엔.”

처음부터 끝까지 같이 들어 놓고서 왜 나한테 물어보는 거람.

‘혹시, 프로스트 남작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돌려 거절하는 건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덜컥 걱정이 앞섰다.

‘그러면 안 되는데.’

내 입장에서 프로스트 남작은 훌륭한 사업 투자자였다.

보는 눈도 있고, 제법 사업 수완도 좋으니 아군으로 둔다면 든든할 것이다.

나는 세도가와는 달리 신분 귀천이며 작위 따위를 따지지 않으니, 프로스트에게 내가 좋은 뒷배가 되어 줄 수 있었다.

‘게다가 프로스트는 남쪽 지방에서 꽤 힘 있는 자인걸?’

곁에 두면 여러모로 좋을 자였다.

라이언하트 가문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든을 지지하는 가신’이 없다는 것이었다.

‘귀족들의 세계에서 가신이 없다는 건, 세력이 약하다는 걸 뜻해.’

그런 의미에서 프로스트는 우리에게 좋은 카드였다.

“받아들이시는 게 어때요? 만약 백쟉밈이 못 믿으시겠따면 어쩔 수 없긴 한뎨…….”

덤덤하게 말했지만, 초조한 마음으로 이어질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도록 해.”

“……진쨔요?”

믿을 수 없어서 되물었다.

혹시라도 프로스트 남작을 마음에 안 들어 하면, 계략이라도 펼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허락이 떨어질 줄이야.

비스듬히 소파 손잡이에 턱을 괸 이든이 손가락을 뻗어 내 말랑말랑한 볼을 콕, 찌르며 대답했다.

“네가 그러자고 했으니까.”

그렇게 프로스트 남작은 라이언하트 가문의 일원이 되었다.

고작 내 한마디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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