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언제부터 이든의 신뢰를 이만큼이나 얻게 된 거지?
나는 프로스트 남작이 떠난 후에도 한참 동안 볼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겨우 손가락이 하나 닿은 것뿐인데, 온 세계가 울렁거렸다.
‘이러니까 마치…… 진짜 아빠랑 딸 같잖아.’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거센 물살이 머릿속으로 들이치는 것만 같았다.
속이 시끄러웠다.
‘요즘 들어 분위기가 달라져서 그럴까?’
전에는 이든이 나를 대할 때 뾰족하게 날이 서 있었다면, 지금은 모서리 없는 원처럼 둥글둥글했다.
특히, 지금처럼 이따금 멈춰 서서 나를 쳐다볼 때.
그런 느낌이 더 강했다.
“백쟉밈?”
깊은 생각에 잠긴 이든을 조용히 불렀다.
윤이 나는 호박색 동공이 번뜩 빛나더니 그가 내 앞에 섰다.
‘응?’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이든이 나를 들어 올리는 게 먼저였다.
‘어어어?’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어깨에 두 다리를 걸치게 됐다.
“흐엇!”
비명이 절로 터져 나왔다.
느닷없이 눈높이가 높아지니 심장이 절로 벌렁벌렁 뛰었다.
“어떤가?”
“노…… 놀랬쟈나요!”
목말을 타다 뒤로 떨어질까 무서워, 그의 머리를 생명줄처럼 꼬옥 부여잡았다.
그러자 그가 곧바로 나를 땅에 내려 주었다.
“이번엔 아닌가 보군.”
알 수 없는 말을 혼자 중얼거린 그가 어쩐지 아쉬워 보이는 표정으로 앞서 복도를 걸어갔다.
‘뭐가 아니라는 거지?’
나는 여전히 진정되지 않는 심장을 부여잡고 멀어지는 그의 등을 바라봤다.
대체 사자님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 * *
사자님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 그것 말고도 더 있었다.
아니, 최근 들어서 바뀐 점이라고 해야 하나?
생전 가도 다이닝 룸에서 식사하는 법이 없었던 이든이 꼬박꼬박 내 식사 시간에 맞춰 다이닝 룸에 행차했다.
“내 것도 내와.”
한 손에 신문을 들고 등장한 이든이 리챠드에게 명령했다.
컵에 물을 따르던 리챠드의 손이 멈췄다.
“요즘 웬일로 각하께서 아침을 다 챙기십니까?”
“원래 챙겨 먹었다. ……종종.”
이든이 내 반대편 식탁에 의자를 끌어다 앉으며 답했다.
그러자 리챠드가 키득거리며 내게 속삭였다.
“아가님, 우리 각하께서는 종종의 의미를 모르시나 봅니다.”
그러게요. 저 양반이 요새 왜 안 하던 짓을 한답니까?
“크흠. 흠…….”
이든이 괜히 헛기침을 하며 신문을 펼쳐 들었다.
‘오늘은 정말 배가 고프셨나?’
나는 미트볼을 깨작거리며 이든을 힐끗 살폈다.
스윽.
돌연, 그가 자신의 접시에 놓인 미트볼을 슬그머니 내게 밀어 주었다.
‘어……?’
눈꺼풀을 들어 올려 그를 올려다봤다.
그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며 신문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이럴 때마다 난, 포근한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을 느꼈다.
잠자코 우리를 보고 있던 리챠드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요즘 두 분께서 부쩍 친해지신 것 같아서 보기 좋습니다.”
“시끄럽다, 리챠드.”
예전 같았으면 인상을 팍 쓰고서 ‘장례식을 준비하느니 마느니’ 했을 텐데.
리챠드는 아침 식사 내내 쫓겨나지 않고 무사히 밥그릇을 비울 수 있었다.
참으로 이상한 변화였다.
나는 평소보다 더 많아진 내 몫의 미트볼을 보고 있기가 왠지 부끄러워 괜히 주제를 바꿨다.
“리챠드. 릴까스 가게 오픈 준비는 어또케 되고 있어요?”
“자리는 일전에 말씀드린 대로 츄르 가게 옆자리로 잡아 두었습니다.”
츄르 가게 옆이면 홍보 걱정은 덜었다.
굳이 따로 돈이나 시간을 들여 홍보하지 않더라도 낙수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테니까.
“한데 걱정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리챠드가 사뭇 진지하게 아래턱을 쓸어내렸다.
“몬뎨요?”
“릴까스의 재료 공급을 어찌 해결할지가 고민입니다.”
“드래곤 고기 말하는 거져?”
“네. 그리 쉽게 구할 수 있는 식재료는 아니지 않습니까.”
리챠드 말이 맞다.
흔한 돼지고기, 닭고기와는 달리 드래곤 고기는 따로 납품 업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여태까지 몬스터 고기가 식재료로 쓰인 적이 없었으니 어쩌면 당연했다.
리챠드가 고민하는 것도 아마, 어느 경로로 어떻게 드래곤 고기를 공급받을지 고민하는 것일 터.
다행히도 그 답은 내가 잘 알고 있었다.
“간단해요. 몬스터 용병 길드랑 협업을 맺으면 됨미다.”
“용병 길드랑 말입니까?”
“녜. 지난번에 편지도 왔었쟈나요. 드래곤 고기를 사겠다고 해 보세여.”
몬스터 용병 길드에게는 드래곤 레이드 후, 남은 고깃덩이 처리가 큰 골칫거리였다.
특별한 레시피로 조리되지 않은 드래곤 고기는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돌덩이나 다름없었다.
“협업을 맺는다고 한들, 공급량이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오. 몬스터 고기는 잘 썩지도 않자냐요.”
“그렇다고는 알고 있으나…….”
“용병 길드에는 예전부터 대대손손 물려쥬던 지하 창고가 있거든요.”
걱정하는 리챠드에게 비밀을 슬쩍 흘려 주었다.
“!”
그들의 조상들은 아무짝에 쓸모도 없고 썩지도 않는 몬스터 고기를 창고에 보관해 두었다.
땅에 묻어서 처리했다가는 환경 보호 단체 길드에서 들고 일어나는 탓에 그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 관습은 대대손손 이어졌고, 지금까지도 몬스터 고기는 창고에 쌓이고 있었다.
“아마 창고에 있는 걸 다 사 간다고 하면 엄청 죠아할걸요?”
“한쪽은 공간만 차지하는 짐을 처리할 수 있어서 좋고, 한쪽은 재료 공급 걱정을 덜 수 있으니 상부상조겠군요. 역시 아가님이십니다!”
리챠드가 수첩에 메모를 하며 연신 감탄했다.
막상 칭찬받으니까, 조금 쑥스럽네.
코끝을 스윽 매만지는데 열렬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아가님께서 참으로 현명하시군요!”
손뼉을 치며 다이닝 룸으로 들어선 이는 프로스트 남작이었다.
서로 안면이 있기도 했고, 이제는 한배를 탄 거나 다름없는 사람이니 반갑게 손을 흔들어 줬다.
“안뇽하세요, 프로스트 남쟉밈!”
“기쁘게 반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가님.”
가볍게 목례를 하고 다가온 프로스트가 내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크흠.”
맞은편에서 목을 가다듬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언짢음을 표현하는 소리라고 해야 더 정확할까?
이든이 몹시 불쾌한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프로스트는 수다 보따리를 풀어 놓느라 바빴다.
“아아. 제게도 아가님 같은 딸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참으로 각하가 부럽습니다.”
“냠쟉밈도 나중에 좋은 아빠가 되실 꼬에요.”
“정말 그래 보입니까?”
그가 금방 퍼 담은 미트볼이 든 접시를 내려놓으며 의구심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나는 자신감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작에서 프로스트의 결혼 생활에 관한 구절을 본 기억이 있어서였다.
“녜!”
“하하하하, 말씀만으로도 기분 좋습니다.”
“진짠뎨…….”
“저는 제가 이러다가 장가를 가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있거든요.”
확실히 프로스트는 결혼 적령기를 벗어나긴 했다.
‘그래도 서른네 살이면 아직 창창하지!’
나는 그의 팔을 토닥여 주었다.
“올해 안에는 갈 꼬에요.”
“참으로 그럴 수 있을까요?”
측은하게 처진 눈매를 보자니 어쩐지 위로를 해 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 기분이다!
나는 촉촉한 미트볼을 한입 크게 베어 물며 충동적으로 말했다.
“녜! 만약 안 되면, 제가 대신 아빠라고 불러 드릴께여!”
“좋습니다! 아가님처럼 사랑스럽고 영민한 딸이 생기는 게 저의 오랜 꿈이었거든요, 하하하하!”
서로 덕담을 주고받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는데,
쾅!
큰 소리와 함께 눈앞으로 구겨진 신문이 떨어졌다.
“…….”
“…….”
깜짝 놀란 우리는 그대로 얼음이 되었다.
눈썹 사이를 무시무시하게 구긴 이든이 프로스트를 노려보며 천천히 입술을 뗐다.
“그렇게 놀고먹으라고 봉급을 주는 건 아닐 텐데.”
어째서인지 분노의 화살은 프로스트에게 향해 있었다.
이든의 아랫입술에 선명히 남은 잇자국이 자꾸만 시선을 앗아갔다.
“하…… 하하……. 이제 다 쉬었으니 그만 일을 하러 가 보겠습니다. 아가님, 다음에 뵙겠습니다.”
네?
남작님 아직 한 수저도 뜨지 못하셨는데.
붙잡을 새도 없이 프로스트 남작이 다이닝 룸을 빠져나갔다.
‘나름 말이 잘 통하는 것 같았는데.’
나는 신데렐라처럼 사라져 버린 프로스트의 빈자리를 보고 쩝 입맛을 다셨다.
“아쉽녜…….”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날 잡고 수다나 진득하게 떨어야겠다며 혼잣말을 하고 있는데, 이든의 꽉 쥔 주먹 위로 핏줄이 불거졌다.
“왜 나한테는 아ㅃ…… 라고 안 부르는 거지?”
“녜?”
중간에 그가 말을 흐린 바람에 제대로 듣지 못했다.
“아니다.”
무엇이 아니라는 걸까.
“프로스트 남작의 업무 강도를 높여야겠군.”
그렇게 덧붙이는 목소리가 참으로 사나웠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프로스트 남작이 이든에게 엄청나게 미운털이 박힌 게 틀림없었다.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이든이 저렇게 화내는 걸까.
* * *
오늘따라 우리 사자님께서 한가하신 모양이다.
원래 같았으면 아침 식사 후 집무실로 바로 향했을 텐데, 오늘은 저녁때까지 나와 같이 있기를 고집했다.
뭐, 딱히 불편한 것은 없었다.
그가 서류를 보는 중간중간마다 눈을 마주쳐 주는 거라든가, 무언가를 물으면 대답한다든가― 하는 아주 평범하고도 사소한 일상을 나눴다.
애먼 리챠드만 계속 내 방을 들락날락해야 하는 게 미안했지만,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아. 이 평화가 깨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라고.
그렇게 단조로운 하루가 마무리되는가 싶을 즈음.
리챠드가 새 소식을 들고 내 방을 찾아왔다.
“각하. 초대장이 왔습니다.”
“무슨 초대장?”
이든과 내가 동시에 리챠드를 바라봤다.
“황실에서 온 티 파티 초대장입니다.”
“무엇 하러.”
리챠드가 초대장을 넘기며 덧붙였다.
“신년제의 요리 대회에서 우승을 한 가문은 원래 그다음 달 열리는 황실 티 파티에 필히 참석하게 되어 있다 합니다.”
평화로운 일상에 금이 가는 소리였다.
황금색 촛농을 녹여 지장을 찍어 놓은 초대장을 펼치니 리챠드가 말한 그대로였다.
이든이 나를 바라봤다.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묻는 눈빛이었다.
나는 이미 ‘황실 초대장’이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것은 두 번째 메인 에피소드였으니까.’
그 말인즉슨, 나의 두 번째 사망 플래그가 다가왔다는 소리였다.
‘쉴 틈을 안 주네.’
나는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하도록 해라.”
곧장 이든이 리챠드에게 명령했다.
깨지지 않길 바랐던 평화가 깨졌으니, 다시금 평화를 되찾기 위해 싸울 때가 됐다.
‘다음 에피소드는 리아노 공작만 특히 조심하면 되니까. 최대한 엮이지 말자.’
그렇게 다짐을 하는 내 앞으로, 또 하나의 편지가 내밀어졌다.
“아가님 앞으로도 편지가 왔습니다.”
“나한테?”
“네, 발신인이 어디 보자……, 노아라고 쓰여 있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