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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39/142)

39화

한편, 비스 메인 스트리트의 던버르레 공작저.

가장 호화롭기로 소문난 던버르레 살롱에서는 로얄 클럽의 정기 모임이 한창이었다.

“이번에 리아노 공작께서 또 구제 활동을 했다고 들었소.”

던버르레 공작이 열 손가락 가득 끼워진 금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넌지시 운을 뗐다. 맞은편의 리아노 공작을 떠보는 말이었다.

“별일 아니오. 그저 우연히 눈에 띄었을 뿐.”

“별일이 아니긴. 꽤 쓰일 법한 양자를 들이셨다고 들었네만.”

리아노 공작이 테이블 위의 찻잔을 사뿐히 들어 올렸다.

‘이름이 노아라고 했던가.’

그는 얼마 전, 자신의 호적에 들인 아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다듬으면 효용 가치가 있을 애지. 그 나이 때 마나 구현을 할 수 있는 애는 드무니까.’

잘 교육시킨다면, 대대로 위대한 마법사들을 배출한 리아노 공작가에 걸맞은 마법사로 성장할 터.

리아노는 입가에 피어오른 미소를 감추기 위해 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쌉싸름한 맛이 혀끝을 맴돌았다.

“마법에 재능이 있던 아이인지라 내 학자로서 그 재능을 그냥 썩히기에는 안타까운 마음에…….”

“뭘 노리는 건 아니고?”

본질을 꿰뚫는 예리한 질문에 찻잔을 쥔 리아노의 손가락이 새하얗게 변했다.

“…….”

“하하하! 이 친구 표정 좀 보세. 내 농담이오.”

과연 농담이었을까?

정말 대수롭지 않게 사과파이를 뒤적거리는 던버르레를 보며 리아노는 천천히 깊은 숨을 내뱉었다.

“차가 입맛에 잘 맞나 보오.”

힐끗, 리아노의 빈 잔을 보고 던버르레가 피식 웃으며 기르신 신문을 펼쳐 들었다.

“지난번 츄릅츄릅병의 치료제를 개발한 아이도 그렇고, 공작께서 입양한 아이도 그렇고 둘 다 니드 보육원 출신이라기에 농 한번 쳐 봤소.”

“그것참 우연이로군.”

그는 곁에 선 시종이 빈 찻잔을 채워 줄 때까지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지만, 속은 타들어 가고 있었다.

달갑지 않은 얼굴이 떠올랐다.

루나 라이언하트.

신문에서는 물론, 비스 전체가 그녀에 대해 떠드는 탓에 굳이 기억하고 싶지 않아도 뇌리에 남아 버린 이름이었다.

‘그 꼬마, 뭔가 있어.’

츄릅츄릅병은 리아노 자신이 직접 만들어 낸 질병이었다. 해서 치료제 역시 자신이 개발했어야 했다.

한데…….

고작 네다섯 살쯤 되는 철부지 어린아이한테 선수를 뺏겼다.

‘정체가 뭐지?’

자존심이 상한 것과 동시에 묘한 승부욕이 느껴졌다.

“그 별 볼 일 없는 보육원에 그리 돈 되는 아이가 있는 줄 알았더라면 내 먼저 후원을 하는 거였는데. 쯧.”

아쉬운 건 던버르레 쪽도 마찬가지였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내 호적에 먼저 들였어야 했는데.’

그는 아이가 단기간에 벌어들인 수익을 생각하며 콧김을 내뱉었다.

“참, 다들 그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근처에 앉은 이가 애매해진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모두의 주의를 끌었다.

“무엇 말인가.”

“어젯밤, 로얄 클럽에 추천서가 들어왔다 합니다.”

추천서라고?

단번에 로얄 클럽 멤버들의 관심이 쏠렸다.

“어느 가문이지?”

“그 가문은…….”

마침내 입에 오른 가문의 이름에 로얄 클럽은 떠들썩해졌다.

* * *

원래라면 진즉 꿈나라로 갈 시간이었다. 하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하아.”

오늘따라 머릿속이 복잡했다.

멍하니 누워 캄캄한 천장만 보고 있던 나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서 침대맡에 놓인 등불을 켰다.

탁.

황제에게 받은 발광석 등불이 방 안을 훤히 비췄다.

초저녁, 노아에게서 온 편지를 다시 꺼내 보았다. 봉투 겉면에 리아노 공작가의 인장이 선명했다.

‘왜 하필 여기야.’

확인 사살이라도 당한 것처럼 가슴이 먹먹했다.

전개가 달라졌다.

‘그것도 하필이면 가장 최악의 방향으로.’

원작에서 노아가 리아노 공작과 얽히게 되는 시점은 그가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였다.

한데, 그보다 더 빠른 시기에 두 사람이 만나게 됐다.

이건 생각보다 더욱 위험한 전개였다.

원작에서 리아노 공작은…….

‘성인이 된 노아에게 접근해 불법 마법 실험을 했었으니까.’

두 사람이 예정보다 일찍 만나게 됐으니, 그 일도 더 빨리 일어날지도 몰랐다.

그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게다가 거긴, ‘그 아이’도 있는 곳이잖아.’

나는 리아노가 숨겨 둔 자식이 있다는 걸 떠올렸다.

그 어떤 가치보다 명예를 중시하는 리아노에게는 콤플렉스나 다름없는 존재가 하나 있었다.

제 부인을 수발드는 평민 출신 하녀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

‘그 아이의 이름은, 셀리.’

본부인이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라 셀리를 거두기는 했다만, 적통 후계자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셀리는 생모도 원치 않았고, 의모 역시 달가워하지 않는 아이였다.

심지어 마법에 재능도 없어 아버지에게 ‘리아노’라는 성도 부여받지 못했다.

‘그렇게 불안정한 아이 앞에 덜컥 노아가 나타나 버린다면…….’

셀리가 노아를 어떻게 대할지는 불 보듯 뻔했다.

‘마법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이는 노아를 질투하고 괴롭히겠지.’

둘을 중재할 사람이 필요했다.

노아를 위해서도, 그리고 셀리의 외로운 영혼을 위해서도.

“뇨아랑 얼른 만나 봐야게써.”

나의 두 번째 사망 플래그이자, 다음 에피소드인 ‘황실 티 파티’.

그 이야기의 메인 빌런이 리아노 공작이기에 더더욱 미뤄서는 안 될 일이었다.

나는 발광석 등불 아래서 노아에게 보낼 답장을 적어 내려갔다.

‘토리에게 부탁하면 내일 동이 틀 때까지 전해 주겠지?’

딸랑, 딸랑.

도토리가 달린 ―토리 전용 호출―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호출에 응한 이는 뜻밖에도 토리가 아니라, 이든이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온 이든이 실핏줄이 선연한 눈을 부릅떴다.

“이 늦은 시간에 토리 무크는 왜 호출한 거지?”

……그러는 사자님이야말로 이 야심한 시간에 내 방에 무슨 일로 오신 걸까.

나는 반듯이 접은 편지를 만지작거리며 답했다.

“편지를 보낼 때가 있어서여.”

“그 꼬맹이한테?”

곱지 않은 시선이 편지 위에 내려앉았다.

“녜. 뇨아가 이번에 리아노 공쟉가에 입양 갔다고 편지가 와서 답쟝을 해야 하고든요.”

“잘됐군. 당분간 후계자 교육이니 뭐니 받는다고 바쁠 테니까.”

팔짱을 끼며 코웃음을 치는 모습을 보아하니, 내가 리아노 공작가에 놀러 가겠다고 하면 순순히 허락해 주지 않을 것 같았다.

‘이거 아무래도…… 몰래 외출할 계획을 세워야겠는데?’

아치형으로 생긴 등불 위를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한데, 말이다.”

이든의 고개가 삐딱이 기울었다.

말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기 무섭게, 그가 내 손에 들려 있던 등불을 빼앗아 갔다.

……어?

“이게 그렇게 소중한가?”

“녜?”

등불을 가까이 들여다보는 호박색 동공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허전해진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으로 선물 받은 거니까 당연히 소즁하져.”

그것도 무려 황제 폐하에게 받은 것이니 말이다.

이든은 별로 관심이 없는 듯했지만, 아마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대대손손 가보로 보관하겠다고 호들갑을 떨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간에.

그런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등불을 보면서 사자님은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걸까.

“백쟉밈.”

슬금슬금 방문을 향해 가고 있던 그를 불러 세웠다.

“뭐.”

“그거 들고 어디 가시려고여?”

“……알 것 없다.”

알 것 없기는!

등불을 노려보는 두 눈에 다 쓰여 있었다.

“혹쉬, 부술 생각은 아니시져?”

“…….”

헉. 우리 사자님께서 진짜 단단히 미치셨나 보다.

황제가 하사한 물건을 멋대로 부술 생각을 하다니.

누가 본다면 반역이라며 핏대를 올리고 떠들어 댈지도 몰랐다.

나는 내 목숨 줄을 위해서 다급히 그의 바지 자락을 잡았다.

“돌려쥬세요.”

“싫다.”

“제가 받았으니, 제 것이자냐요.”

“네 것?”

이든이 우월한 키를 이용해서 등불을 높이 들어 올리며 코웃음 쳤다.

“여긴 내 집이니 이곳에 있는 모든 것은 다 내 것이다.”

그렇게 유치하게 나오시기예요?

깡충깡충 온 힘을 다해 뛰어 봐도 그의 허리쯤에 겨우 손이 닿을까 말까였다.

그가 승자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씨.

괜히 울컥해서 빽 소리를 지르며 솜방망이 주먹으로 그의 허벅지를 툭, 때렸다.

“그럼 뭐! 저도 이 집에 있으니까 백쟉밈 꼬에여?”

“당연하지. 너도 내 거다!”

“녜?”

“뭐?”

내가 방금 뭘 들은 거지.

허공에 들어 올리고 있던 팔이 서서히 내려왔다.

그런데 어째 나보다 그가 더 충격을 먹은 얼굴이었다.

“…….”

“…….”

등불을 쥐고 있는 그의 손가락에 스르륵 힘이 풀렸다.

‘어어어? 등불!’

정신을 번뜩 차린 나는 순발력 있게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등불을 낚아챘다.

탓!

나이스 캐치.

하마터면 황제께 받은 등불이 와장창 깨질 뻔한 대참사를 막아 냈다.

“방금 내가 무슨 말을 했지?”

내게 질문하는 이든의 표정이며 목소리, 움직임 하나하나가 고장 난 장난감처럼 어색했다.

“그건 오히려 제가 묻고 싶은 곤뎨.”

“…….”

정적이 흘렀다.

이게 대체 뭔 상황일까.

우리는 함께 멍하니 등불의 불빛을 바라봤다. 크게 흔들렸던 발광석이 등불 안에서 정신없이 뱅글뱅글 돌았다.

휙, 휘익. 휙.

덩달아 바닥에 비추는 둥그런 빛 조각도 좌우로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이든이 혼잣말을 했다.

“……참을 수 없다.”

무엇을요?

그리 묻기도 전에 이든의 이상 행동이 시작됐다.

처음에는 엉덩이를 아주 미세하게 씰룩거리더니, 이내 쭉 뻗은 다리로 땅을 딛고 날렵하게 뛰어올랐다.

타앗!

우아한 자태로 점프한 그의 몸이 곡선을 그리며 착지한 곳은…….

덥석!

……응?

이든이 바닥 위에 생긴, 발광석에서부터 흘러나온 동그란 빛 덩어리를 양손으로 부여잡으려 하고 있었다.

‘……설마 불빛에 반응한 건가?’

마치 레이저 포인트를 본능적으로 쫓는 고양이들처럼.

설마 하는 마음으로 품에 안고 있는 등불을 스리슬쩍 기울였다.

둥그런 빛이 그의 손등 위를 벗어나 옆으로 움직이기 무섭게,

탑!

이든이 반대 손으로 불빛을 쫓았다.

……맙소사.

나도 모르게 큰 숨을 “헛!” 하고 들이켜고 말았다.

“…….”

“…….”

그제야 이성이 되돌아온 걸까.

정적 속에 어색한 숨소리가 쌓여 갈수록 이든의 목덜미가 점점 붉게 변했다.

“배…… 백쟉밈. 전 아무것또 못 봤슴미다.”

조용히 양손으로 눈을 가렸다.

나는 사자님의 억장이 와르르 맨션이 되길 바라지 않는 착한 아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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