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0/142)

40화

“배…… 백쟉밈. 전 아무것또 못 봤슴미다.”

“…….”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기에 슬그머니 벌린 손가락 틈으로 이든을 염탐했다.

어느새 자리를 털고 일어선 그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문 쪽으로 향했다.

“……백쟉밈?”

조심스럽게 부르자,

우당탕탕!

화들짝 놀란 너른 등이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내 방을 빠져나가 버렸다.

‘저러니까 진짜 대형 고양이인 것 같네.’

덩그러니 혼자 남게 됐다.

나는 들고 있던 등불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일렁이는 불빛을 보니 어쩐지 마음속 깊이 잠들어 있던 개구쟁이 자아가 꿈틀꿈틀 고개를 들려 했다.

이거 어쩌면…….

‘사자님을 제대로 조련할 수 있을지도?’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으흥흥, 웃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생존 치트 키가 이렇게 생길 줄이야.’

제2의 츄르가 되어 줄 소중한 발광석이 든 등불을 꼬옥 껴안았다.

순식간에 사자님을 조련하기 위한 레이저 포인터 발명에 관한 계획이 머릿속에서 완성되었다.

시간 날 때 리챠드에게 발광석을 개조해 달라고 부탁해야지.

등불을 조심스럽게 원래 자리에 올려 두고 침대에 누우려는데,

다시금 복도에서 우다다다, 엄청난 소리로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허억, 허억, 허억…….”

이 야밤에 뜬금없이 한바탕 달리기를 시전하신 사자님께서 내 침대로 다가왔다.

얼마나 전속력으로 뛰어온 건지 헉헉, 숨소리가 제법 거칠었다.

“괜찮으세여?”

이불을 덮으려던 손을 가지런히 두 무릎 위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러자 이든이 불쑥 무언가를 들이밀었다.

“내 선물이다.”

……응?

순간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내 눈앞에 있는 것은 엘코어였다.

“이건…… 엘코어자냐요.”

“마음에 안 드는 건가?”

엘코어를 쥔 손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아니, 이건 마음에 들고 안 들고 할 문제가 아니라…….

“엘코어는 백쟉밈에게 엄청 엄청 엄청 소즁한 거 아니여써요?”

“소중해. 내 목숨만큼이나.”

사뭇 진중해진 목소리가 방 안에 은은히 울려 퍼졌다.

그는 기어이 내 목에 자신의 목숨만큼이나 소중하다는 엘코어를 손수 걸어 주기까지 했다.

차가운 감촉이 목덜미에 감겨서일까.

잠이 확 달아났다.

“그러니 너도 소중히 여겨라. 그런 것보다 더.”

이든이 내 머리맡에 놓인 등불을 흘겨보았다.

* * *

……꿈이 아니었다.

나는 눈을 뜨자마자 목 근처를 더듬어 보았다. 내 목에는 변함없이 엘코어가 걸려 있었다.

―짹짹짹.

평화롭게 지저귀는 참새의 노랫말이 아직 잠에서 덜 깨어난 감각을 깨워 주었다.

유난히 아침 햇살은 따스했다.

맙소사…….

맙소사.

맙소사!

벌떡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전신 거울 앞으로 와다다 걸어갔다.

두 번, 세 번 부은 눈을 비벼 가며 다시금 재차 확인해 봐도 내 목에 걸려 있는 것은 이든 라이언하트 부모님의 유품이었다.

‘이렇게 막 줘도 되는 거였어?!’

혼돈, 혼돈, 혼돈 그 자체였다.

이걸 다시 돌려줘야 하나?

돌려주면 또 그것대로 기분 나빠 하시려나.

그렇다고 내가 가지고 있기엔 그 가치가 엄청난 건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발코니 방향이었다.

‘토리인가?’

내 방 발코니 근처를 오가는 이는 토리밖에 없었다.

‘어제 사자님 때문에 못 보낸 답장이나 부탁해야겠다.’

생각난 김에 노아에게 편지를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며 발코니 문을 열었다.

“응?”

한데 토리가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기다란 그림자가 발코니 아래의 풀숲으로 쏙 사라지는 장면을 보았다.

“백쟉밈?”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이든이었다.

‘저쪽은 온실 방향 아닌가?’

왜 하필 이 타이밍에 이든과 나눴던 예전 대화가 떠오르는 걸까.

[상관없다고. ……아주 가끔은.]

한 달도 더 된 일인데, 바로 어제 겪은 것처럼 생생하게 기억났다.

그때 그가 지었던 표정이라든가, 목소리의 온도 같은 것들이.

스르륵.

내가 홀린 듯이 방을 나선 것은 어쩌면 그 때문일지도 몰랐다.

신발도 제대로 신지 않은 채 계단을 허겁지겁 내려가, 창문 끄트머리 너머로 사라진 그림자를 쫓았다.

‘무슨 일 있나?’

나도 모르게 걸음이 다급해졌다.

걱정이 됐다.

그가 온실을 방문할 때는 심경에 큰 변화가 있을 때였으니까.

‘부디, 별일 없게 해 주세요.’

어느 순간부터 걸음이 반쯤 뜀박질로 바뀌었다.

구름에 걸린 커다란 태양이 내가 향하는 길마다 햇살을 뿌려 주었다.

땅 위로 내려앉은 반짝이는 빛의 조각을 따라 나는 마침내 온실이 있는 뒤뜰에 도착했다.

“하아, 하아, 하아…….”

벅차오른 숨을 골랐다.

온실의 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게 보였다. 그게 마치 내게 어서 들어와 보라고 손짓하는 것 같았다.

잠시 망설임이 스쳤다.

‘정말 들어가도 될까?’

뺨을 간지럽히고 도망간 살랑바람이 온실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또다시 괜한 것이 떠올랐다.

[여긴 내 집이니 이곳에 있는 모든 것은 다 내 것이다.]

[그럼 뭐! 저도 이 집에 있으니까 백쟉밈 꼬에여?]

[당연하지. 너도 내 거다.]

어쩌다가 잘못 나온 헛말일 뿐일 텐데.

왠지 모르게 용기가 생겼다.

“잠시만 실례하겠슴미다.”

조심스레 온실로 들어섰다.

그 안은 밖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

푸릇푸릇한 숲속의 한 부분을 오려다가 옮겨 놓은 것만 같았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푸른 잎사귀 사이로 오색 꽃이 찬란히 빛났다.

나는 작게 난 샛길을 따라 천천히 온실의 중심부로 걸어 들어갔다.

‘어디 계신 거지?’

꽤 깊은 곳까지 들어왔는데도 이든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백쟉밈.”

속삭이듯이 그를 불러 보았다.

찌르르르.

새 우는 소리만 들릴 뿐. 찾는 이의 대답은 어디에도 없었다.

‘길을 잘못 들었나?’

곤란했다.

아무리 이든이 지나가는 말로 허락 비슷한 것을 해 줬다고 한들.

주인이 없을 때 몰래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으니, 이곳에 오래 머물기가 미안했다.

‘다시 돌아가야겠다.’

온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보면 나오시겠지.

그럼 그때 여쭤보면 되는 거야.

그리 생각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그렇게 왔던 길을 따라 다시 되돌아 걷기 시작했다.

“으음, 이쪽 길이었나?”

중간중간 비슷하게 생긴 나무들이 많아 조금 헷갈리긴 했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기억을 더듬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나는 부지런히 움직이던 두 다리를 멈춰 세울 수밖에 없었다.

뜻밖의 풍경 때문이었다.

순간 두 눈을 의심했다.

내가 잘못 본 건 아닐까, 눈꺼풀을 느리게 감았다 떠도 눈앞의 그것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건…….”

누군가의 묘비였다.

나도 모르게 그 앞으로 걸어갔다.

마치 어떤 힘에 이끌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네모반듯한 비석과 점점 가까워질수록 감각이 무뎌지는 것 같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세상과 분리된 것처럼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귓가에는 오로지 터질 듯한 내 심장 소리만 가득 찼다.

쿵쿵쿵쿵!

누군가 내 가슴 속에서 커다란 북을 울리고 있었다.

이름 없는 묘비였다.

분명 이름 모를 묘비였다.

하지만 나는 그 묘비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았다.

‘……라이언하트…….’

그 이름을 떠올리자 가슴속에 작은 파동이 일었다.

동시에 목에 걸고 있던 엘코어가 공명하기 시작했다.

우우웅―.

“!”

당황한 나는 엘코어를 내려 봤다.

‘뭐지?’

땅 위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던 햇살의 잔 조각들이 엘코어 주변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묘비에 적힌 글귀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어?’

당황한 내가 뒷걸음질쳤을 때,

“루나!”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이든의 목소리가 들렸던 것 같기도 하다.

―기억이 거기서 끊겼다.

* * *

커다란 빛이 있었다.

손을 뻗어 잡으니, 빛이 몸속으로 흡수되었다.

따뜻한 기운과 함께 누군가의 기억이 내 머릿속으로 스며들었다.

눈앞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이든과 몹시 닮은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다르게 생긴 사내였다.

빛 너머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든, 네 엄마는 내 거다.]

익숙한 이름에 잠시 멈칫했다.

‘……이든의 기억인가?’

이든과 닮은 그 남자가 제 허리춤에 오는 남자아이를 보며 개구쟁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이든은 아니었다. 그가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은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까.

[어머니는 제 것입니다, 아버지.]

꼬마의 얼굴이 보였다.

‘!’

나는 그 꼬마가 누군지 한 번에 알아봤다.

‘이든의 어린 시절이구나.’

엘코어 속에 깃들어 있던 이든의 꼬꼬마 시절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그럼 저 남자는…… 이든의 아버지?’

덩치가 커다란 사내가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이든 또한 지지 않고 턱을 치켜들었다.

두 부자는 참 많이 닮아 있었다.

[네 엄마이기 전에 내 여자였다니까?]

[아버지, 그건 과거형입니다. 이제 어머니는 제 것이죠.]

[오호라. 해보자는 건가, 아들?]

[더는 아버지의 도발에 울지 않습니다.]

두 남자는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신경전을 벌였다. 무척이나 따뜻하고 화목해 보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 모습이 천천히 흐려졌다.

어둠이 잠식했다.

쉬이이익.

어디선가 날아온 불화살이 어둠을 반으로 갈랐다.

하나로 시작한 불화살이 두 개, 세 개로 늘어나더니 단숨에 수천 개로 늘어났다.

파바바밧!

셀 수 없이 많은 불화살이 발아래 꽂혔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비명과 함께 장소는 아비규환이 된 전쟁터로 바뀌었다.

[인간들이 우리를 배신했다!]

[싸우자! 가족과 친구를 지키기 위해 맞서 싸워!]

뜻을 분간할 수 없는 수많은 비명 속, 더는 행복한 부자의 모습 따위 없었다.

전쟁터의 한복판에서 피칠갑이 된 이든과 그의 아비만 있을 뿐.

아비는 치명상을 입은 상태로 적군을 상대하고 있었다.

위기에 빠져 있던 제 어린 아들을 막 구해 낸 순간이었다.

[가서 네 엄마와 백성들을 지켜라! 할 수 있겠지?]

[아버지……! 아버지도 같이 가셔야 합니다. 지금 함께 도망간다면…….]

[난 도망가지 않는다. 내가 여길 비우면 내 백성들은 그대로 다 개죽음이 돼.]

[하지만…….]

[반드시 살아서 돌아간다고 약속하마.]

어린 이든이 망설이는 사이 적군의 칼날이 날아들었다.

채앵!

가까스로 막아선 아비가 제 아들의 등을 떠밀었다.

[어서 가!]

[아버지!]

[할 수 있을 거다. 넌 내 아들이니까.]

그것이 내가 읽은 누군가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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