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새카만 구름 뒤를 걷는 달빛의 흔적이 이리저리 얼룩져 있는 밤이었다.
‘여긴 어디지?’
누군가의 방 안은 어두웠다. 촛불 하나가 은은한 빛을 주변에 뿌렸다.
‘얼마 동안 기절해 있었던 거야.’
으, 머리야.
띵한 머리를 부여잡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다 문득, 누군가 내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놀랍게도 이든이었다.
“……백쟉밈?”
“!”
막 선잠에서 깨어난 맹수의 금빛 동공이 보기 드물게 요동쳤다.
그가 급히 설렁줄로 손을 뻗었다.
“의사……!”
“안 부르셔도 돼여.”
옷자락을 부여잡아 그를 말렸다.
그러자 반듯했던 안면 근육의 배열이 흐트러졌다. 그 모습이 마치 무언가를 꾹 눌러 참는 것처럼 보였다.
이내 이든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다녀간 의사 놈이 네가 그저 잠시 잠든 것뿐이라더군. 내 눈앞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진 걸 똑똑히 봤는데 말이야.”
내 걱정이라도 한 걸까?
쉬지 않고 뱉어 낸 숨결 마디마디에서 뜨거운 응어리가 느껴졌다.
“저 진짜 괜챠나요.”
“그 판단은, 의사가 해.”
딸랑 딸랑.
기어이 설렁줄 끄트머리에 달린 종소리가 저택 안을 청아하게 울려 퍼졌다.
“이미 치료는 충분히 받은 거 같은뎨…….”
침대 옆 작은 협탁 위에 대야와 물수건, 여러 약재들이 가득했다.
내가 모르는 시간 동안 타인이 남겨 놓은 감정의 조각들이 내 마음에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속이 울렁였다.
이따금씩 마주치는 조금 화난 듯, 그리고 동시에 안심한 듯 한 금빛 눈동자가 나를 더 그렇게 만들었다.
“하루 반나절을 꼬박 쓰러져 있었다.”
“……놀라게 만들어서 죄송해여.”
“마침 내가 그곳에 있어서 망정이었다. 도대체 언제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혼자 돌아다닌 거지?”
“백쟉밈을 따라간 거예요.”
“나를 왜?”
“온실에 가셨으니까…….”
혹시 내 행동이 심기를 건드리지는 않았을까, 힐끔 눈치 보며 살그머니 말을 덧붙였다.
“백쟉밈이 심란할 때 찾는 곳이쟈나요, 거긴.”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싶어서.
뒷말은 언어의 형태라기보다는 숨결에 가까운 모양으로 입술 사이로 흩어졌다.
“…….”
“졔송해요, 온실에 함부로 들어가서.”
“그것 때문에 화가 난 거 아니다.”
“녜?”
“지난번에 말했잖아. 네게는 허락한다고.”
그럼 왜 화나신 거예요?
머뭇거리며 그를 올려다보니, 그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매번 네 몸 상태를 생각하지 않고 무리하는 거지?”
……아. 아직 움직이면 안 된다고 했는데 말을 안 들어서 화가 나셨구나.
그가 보인 감정은 호의가 맞았고 그것은 걱정의 형태였다.
“몸이 아팠던 건 아니에여. 백쟉밈이 주신 엘코어에서 빛이 나더니 갑자기 어떤 기억이 보였고, 정신을 차려 보니까 이로케 된 거예요.”
“엘코어에서 빛이 나고 무언가를 봤다고?”
“녜. 아마도 제가 본 분이 백쟉밈의 아버지이신 거 같아여.”
“…….”
내 입에서 뱉어진 ‘아버지’라는 단어 때문에 찰나 동안 이든의 몸이 굳었다.
우리의 대화에서 언급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뜻밖의 인물에 놀란 것처럼 보였다.
곧 평정을 되찾은 그가 물었다.
“그것도 예지몽의 일종인가?”
나는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그의 가족에 관한 일로는 거짓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아닌 거 같아요. 엘코어를 통해 백쟉밈의 기억을 본 것 같은데,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어여.”
“지금은.”
“지금은 안 보여요. 어지럽거나 쓰러질 것 같은 것듀 없구요.”
더는 걱정시키기 미안해서 부러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럼 됐다.”
“녜?”
도리어 당황한 건 나였다.
혹여나 내가 놓친 건 아닐까, 싶어서 아무 질문도 올리지 않는 그의 입술에 시선을 고정했다.
“……제가 무엇을 봤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여?”
부드러운 곡선이 달싹였다.
그가 어떤 대답을 내뱉으려는 그때, 문밖에서 리챠드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각하. 의사가 도착했습니다.”
* * *
새벽 어스름이 시간에 깊이 스몄다.
나는 여전히 이든과 함께였다.
‘내 방에서 자도 되는데.’
의사가 다녀간 후, 이든은 나를 도로 자신의 침대에 눕혔다. 얼떨결에 나는 남의 침대를 떡하니 차지하게 된 셈이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침실을 맴도는 미미한 약재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이러다가 밤을 꼴딱 새겠네.’
정가운데 누워 있는 나 때문에 침대 끄트머리에 구부정하게 누워 있는 이든이 신경 쓰였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편히 눕혀 드리고 내 방으로 가서 자야지.
이대로라면 내일 아침 그의 척추들이 비명을 지를 것 같기에 슬며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려고.”
뭐야. 잠든 줄 알았는데.
어둠 속에서도 형형한 눈동자가 내게 또렷이 향해 있었다.
“괜히 저 때문에 백쟉밈이 불편하게 주무시는 것 같아서…….”
“됐어, 누워.”
“하지만.”
그가 상체를 반쯤 일으켰다.
“정 옆에서 자는 게 불편하면 내가 소파에서 잘 테니까.”
“녜? 아뇨. 백쟉밈이 불편하거나 그런 건 아니에여.”
하는 수 없이 얌전히 누웠다.
“…….”
“…….”
그와 나란히 누워 있는 공간에 차곡차곡 어색한 침묵이 쌓여 갔다.
“그게 아니라면 어서 자.”
으아아아.
그렇게 말하니까 더 신경 쓰여서 못 자겠는걸?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곁눈질로 그를 훔쳤다.
규칙적으로 눈꺼풀 뒤로 사라졌다가 나타나길 반복하는 금빛 구슬은 컴컴한 천장에 고정되어 있었다.
“잠이 안 오는 건가?”
……우리 사자님, 눈치 빠르신 것 좀 봐.
내 침묵을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인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상체를 일으켰다.
“어쩔 수 없군.”
제법 큰소리로 중얼거린 그가 이내 사자로 변했다.
“!”
수인화한 모습은 오랜만에 보는 거라 나도 모르게 놀란 기색이 그대로 드러났다.
내 표정을 보고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조심스레 커다란 앞발을 내밀었다.
“……?”
“……허락하지.”
“녜?”
갑작스레 재회한 거대 핑크 젤리를 보자 동공이 미친 듯이 떨렸다.
“잠이 안 오면 만져도 된다. ……조금은.”
아니 이게 웬 떡이람.
“……정말여?”
“정말로.”
앞뒤 전후 다 접어 두고, 다시는 없을 기회인 것 같아서 냉큼 사자의 커다란 앞발을 잡았다.
“흐어어어어어어.”
저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아, 이 젤리의 감촉.
정말 간만이었다.
또다시 내 손은 본능적으로 젤리를 조물조물, 킁가킁가 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나를 빤히 보는 호박색 동공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헙! 죄…… 죄송해요. 조금만 만지라고 하셨는뎨.”
“상관없다. 그 정도는.”
그는 한쪽 발은 내게 내어 주고, 한쪽으로는 턱을 괸 채로 나를 관찰했다.
‘그러시다면 마음 놓고 조물조물을!’
나는 금세 헤실헤실 풀어진 얼굴로 본격적으로 젤리의 감촉을 느끼기 시작했다.
말랑말랑 쫀득쫀득, 이 중독성을 어쩌면 좋아.
감촉에 잔뜩 취해 있는 나를 가만히 관찰하던 그가 입술을 뗐다.
“그게 그렇게 좋나?”
“우응, 완전 최고 완전 짱. 진짜 세상에서 제일제일제일제일루 죠아요.”
피식, 작게 새어 나온 웃음소리가 내 청각을 사로잡았다.
‘……어? 사자님께서…….’
웃으셨어.
짧게 스쳐 간 소리였지만, 그건 분명 사자님의 웃음소리였다.
……우와.
나는 속으로 감탄을 삼켰다.
사자님이 이렇게 웃으시는 건 처음 보는 거 같아.
금방 원래의 무표정으로 돌아간 그였지만, 여전히 내 마음은 콩닥거렸다.
“가끔씩 허락해 주도록 하지.”
“……제게요?”
“그래. 너한테만.”
“왜요……?”
이든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백쟉밈은 싫어하시쟈나요.”
“내가, 널?”
“인간을 별로 안 죠아하시니까.”
“안 해.”
고요를 품은 새벽은 낮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를 더욱 선명하게끔 만들었다.
“넌 안 싫어한다고.”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당황한 내가 “어, 어어…….” 하며 눈을 굴리자 그가 커다란 앞발로 내 머리칼을 흩트려 놓았다.
“부모가 제 자식을 싫어할 리가.”
반듯한 눈썹, 차분한 눈빛, 고른 숨결까지.
그의 모든 움직임이 말해 줬다.
제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을 깨닫자마자 숨을 덜컥 집어삼켜 버렸다.
‘어…… 어떡해.’
시선 둘 곳이 없었다.
“엘코어는 다시 돌려줘도 좋다.”
“아니에요. 백쟉밈이 제게 처음으로 주신 거쟈나요.”
그는 혹여나 오늘 같은 일이 생길까 봐 걱정하는 듯했다.
‘백작님 때문에 쓰러진 게 아닌데.’
그가 가진 걱정과 미안함을 덜어 주고 싶어서 목에 걸린 엘코어를 소중히 감싸 쥐었다.
“이젠 괜찮을 거에여.”
내 진심이 전해지길 바랐다.
엘코어가 내게 이든의 기억을 보여 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다시 이런 기이한 경험은 하지 않으리라는 것만큼은 알았다.
그저 우연이었을 거야.
나는 이 이야기의 흔한 엑스트라였으니 그게 당연했다.
“틀렸다.”
문맥을 끊어 낸 그에게로 자연히 시선이 옮겨졌다.
“아빠로서 준 거다.”
“……녜?”
“백작이 아니라 네 아빠로서 준 거라고.”
……아빠라 불러도 된다는 뜻일까?
“불러.”
그가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쓸데없이 애먼 놈한테 부르지 말고.”
적당한 단어를 찾아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데,
갑자기 복도 쪽에서 우당탕탕 엄청난 발소리가 들리더니 침실 문이 벌컥 열렸다.
“오늘은 역사적인 날이군요!”
잠옷 차림으로 뒷머리에 까치집을 지은 리챠드가 등장하자, 이든이 인상을 팍 구겼다.
“리챠드.”
“두 분이 그러고 있는 모습을 보니…….”
리챠드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아, 저 개구쟁이 표정.
불안함이 스쳤다.
동시에 리챠드가 용수철처럼 튕기듯 뛰어올랐다.
“!”
“저도 두 분 사이에 끼고 싶어졌습니다!”
땅을 구르고 높이 떠오른 리챠드의 몸이 나와 이든 사이로 날아들었다.
하지만 이든의 반사 신경이 더 빨랐다.
퍽!
기어코 이든에게 걷어차인 리챠드가 침대 밑에서 뒹굴었다.
“하하하, 역시 제 예상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리챠드는 마냥 좋다고 웃었다.
“좋은 말로 할 때 떨어져라, 리챠드.”
“예, 저도 압니다. 각하와 아가님께서도 저를 좋아하신다는 것을.”
“얼마 전에 개똥밭에서 구르더니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이군.”
“누누이 말씀드립니다만, 개똥 발언은 제게는 좀 수치스럽습니다.”
아, 창과 방패의 대결이 따로 없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이 대환장 파티 대화 속에서 나는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시끄럽다, 리챠드. 얼른 나가기나 해.”
“아가님께서는 저와 같이 계시길 원하실 겁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군.”
이든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자 리챠드가 눈을 빛냈다.
“그럼 저랑 내기하는 게 어떠십니까, 각하.”
“무엇으로.”
“아가님께서 저를 쫓아내실지, 말지를 두고 말입니다.”
“해 보나 마나다. 불 보듯 뻔한 결과일 텐데.”
“과연 그럴까요?”
……응?
왜 갑자기 상황이 이렇게 흐르는 걸까.
두 남자 사이에 껴서 눈을 끔뻑이는데, 리챠드가 모습을 변신했다.
약간 금빛이 도는 크림색 털.
앙증맞고 촉촉한 까만 콩 세 개.
리챠드의 수인화한 모습은 처음 보는 거였다.
“우오옹.”
늠름한 대형견이 꼬리를 프로펠러처럼 흔들며 다가왔다.
“이런 말씀 드리기 뭣하지만……, 꼬순내는 누가 뭐래도 제가 일인자입니다. 물론 이건 아가님께만 말씀드리는 일급 비밀이고요.”
“흐어! 진쨔?”
“원하신다면 각하와 비교해 보셔도 좋습니다.”
리챠드가 자신 있게 제 앞발을 척, 내밀었다.
“그 발바닥에 개똥으로 찜질을 하고 싶지 않으면 당장 거두는 게 좋을 거다.”
잠자코 보고 있던 이든이 으르렁거렸다.
“이번만큼은 저도 자존심이 걸린 문제입니다. 그리고 각하, 개똥에 대한 모독은…….”
“시끄럽다, 똥개.”
“후……. 이런 말까진 안 하려고 했지만, 오늘 이기는 사람이 아가님과 단둘이 자는 걸로 합시다.”
“바라던 바다.”
두 남자의 신경전에 다시 한번 불이 붙었다.
“누가 일등이냐.”
“아가님, 역시 제 꼬순내가 최고죠?”
두 남자의 시선이 집중됐다.
양손에 하나씩 각각의 핑크 젤리와 검은 패드를 쥔 나는 가슴이 웅장해졌다.
……그럼 마음 놓고 편히 만지고 맡아 보며 즐기겠습니다.
말랑말랑, 킁킁킁.
두 발바닥의 쫀득쫀득한 촉감과 중독성 있는 냄새의 콜라보는 완벽했다.
“정했나?”
“저와 각하 중, 누구의 발바닥이 더 좋으십니까?”
이게 대체 뭐라고 진지한지는 모르겠다만.
나는 산만 한 덩치에 그렇지 못한 발바닥을 가진 두 남자를 번갈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둘 다 못 잃오.”
이대로 쭉 내 인생은 평화로 가득 찰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