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정말이지, 지난밤은 무슨 정신으로 보낸 건지 모르겠다.
나는 이든의 집무실에서 혼이 반쯤 나간 얼굴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밖에서는 황궁으로 떠날 마차 준비가 한창이었다.
“에효…….”
나는 한쪽 벽면에 붙어 있는 책장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곳에 놓인, 손바닥만 한 크기의 낡은 액자 속 사진에 자꾸만 시선이 갔다.
라이언하트 부자의 사진이었다.
어린 시절의 이든과 살아생전의 엘베른 라이언하트의 늠름한 모습이 담겨 있었다.
“……백쟉밈.”
“아까부터 자꾸 한숨을 쉬어 대는 걸 보면 내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어서 말해 보라는 듯 이든이 고개를 까닥였다.
“백쟉밈의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서요?”
“…….”
일순 그의 입가에 희미했던 미소가 사라졌다.
“요즘 들어 자주 언급되는군.”
앗. 너무 실례되는 질문이었나?
정신이 번뜩 들었다.
“죄송해요. 곤란한 질문이였쬬?”
뒤늦게 수습해 보려 했는데,
“……존경할 만한 분이셨다.”
나지막한 대답이 돌아왔다.
추억에 젖은 호박색 눈동자는 책장 위 가족사진에 고정되어 있었다.
‘엘베른은 좋은 아버지였나 보네.’
이내 표정을 지운 이든은 사진에서 시선을 거두며, 괜스레 다른 주제로 말문을 돌렸다.
“그건 그렇고 무슨 일 있나? 낯빛이 좋지 않은데.”
“아뇨, 잠을 쪼꼼 설쳐서…….”
“당장 침대를 바꿔야겠군.”
“그러게여.”
그때, 엘베른의 영혼이 딱딱한 바닥을 뚫고 불쑥 나타났다.
【이 고얀 아들놈을 다 봤나. 우리 손녀님에게 감히 잠자리가 불편한 침대를 주다니. 내 가만두지 않겠다.】
……제가 잠을 설친 건 다 할아버지 때문인걸요?
나는 이든의 몸통에 주먹질을 하는 ―물론 닿는 족족 주먹이 이든의 몸을 통과하는 기이한 장면이 연출되는―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나를 아껴 주시는 건 좋다만…….’
어젯밤 내내 엘베른의 호들갑을 받아 주느라 머릿속이 과부하였다.
그 와중에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이든과 똑같은 얼굴로 똑같이 냥냥 펀치를 하는 모습이 웃겨서 헛웃음이 나왔다.
‘이대로면 티 파티에서 노아와 대화는커녕, 적들의 동태를 파악하기도 힘들겠어.’
잠시 엘코어 안에 좀 들어가 계시면 얼마나 좋을까.
무심결에 그런 생각을 했는데,
【음?】
외마디 감탄사와 함께 엘베른이 퐁! 하고 사라졌다.
헉.
이번에야말로 엘베른 님을 천도시켜 버린 걸까?
깜짝 놀라 목에 걸고 있는 엘코어를 움켜쥐었는데, 목걸이 끄트머리에서 작게 축소된 엘베른의 얼굴이 빼꼼 삐져나왔다.
【나 아직 여기 있다.】
뭐야. 휴대용으로도 변신이 가능하셨어?
내 한마디에 엘코어 안으로 흡수된 엘베른의 혼이 끙끙거리며 그 속에서 요동쳤다.
【기다려 봐라, 이 할애비가 다시 나갈 테니…….】
아뇨! 그냥 그 안에서 푹 쉬고 있으셔요.
꾸물꾸물 나오려던 엘베른의 혼이 다시 한번 퐁! 연기처럼 사라졌다.
드디어 엘코어가 잠잠해졌다.
창밖에서 마차 준비가 다 되었음을 알리는 리챠드의 외침이 들려왔다.
* * *
황실 티 파티는 화려하고 성대하게 준비되었다.
한 해의 첫 번째 사교 모임이니만큼 비스에 밀집한 세도가 세력 외에도 전국 각지에서 많은 이들이 참석했다.
앞서 도착한 이들이 타고 온 마차가 중앙 분수대 옆에 일렬로 서 있었다.
‘리아노 가문의 마차다.’
그중, 노아가 입양된 리아노 공작가의 마차가 눈에 들어왔다.
마부가 말을 이끌고 마차 보관대로 향하는 것을 보니, 이미 노아는 파티장 안에 도착해 있는 것 같았다.
‘오늘 만나서 이것저것 물어봐야겠어.’
그 밖에도 여러 가문의 휘장을 내건 마차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마침내 우리를 태운 마차도 입구 앞에 멈춰 섰다.
“내리지.”
“녜.”
먼저 마차에서 내려간 이든이 뒤돌아섰다. 그는 의자에서 폴짝 뛰어내리려는 내 앞을 가로막았다.
‘응?’
멀뚱히 그를 올려 보았다.
잠자코 있던 그가 내게 팔을 벌렸다.
“이리 와.”
딱히 먼저 부탁한 것도 아닌데, 그가 나를 번쩍 들어 올려 제 어깨 위에 앉혔다.
‘어어?’
그간 목말을 몇 번 태워 봐서 그런지 이제는 제법 안정적이었다.
“그럼, 다녀오십시오.”
리챠드가 웃음을 참으며 뒤로 물러섰다.
‘자, 잠깐만. 목말을 태운 채로 간다고?’
말릴 새도 없이 그가 긴 다리를 뻗어 우아한 걸음걸이로 정원을 가로질렀다.
앞서 걷던 귀족들이 움직임을 멈춘 채 홀린 듯이 우리를 바라봤다.
“어머, 저분은 라이언하트 백작님과 따님 아니야?”
“아아아, 역시나 오늘도…….”
몇 여인들은 간간이 감탄을 뱉어 내기도 했다.
‘완전 주목받고 있네.’
등 뒤로 호기심 어린 시선이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따가운 뒤통수를 의식하지 않기 위해 이든의 머리를 살포시 끌어안았다.
그러자 이든이 보폭을 좁히며 걷는 속도를 늦췄다.
“무서운가?”
“아뇨. 괜챠나요.”
이든의 세밀한 배려 속에서 나는 우리가 이 파티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름 모를 귀족들이 우리를 보고 숙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폐하께서 백작 영애를 눈여겨 보시고 계신다던 소문 들었나?”
“그야 오늘 봐 보면 알겠지.”
“이러다가 요리 대회에 이어서 이번 가정의 달 연회에서도 라이언하트 영애가 올해의 어린이로 선정되는 거 아닌가?”
“쉿. 말조심하시게. 리아노 공작가가 어떤 가문인데.”
“그건 그렇지만…….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일세.”
나보다 훨씬 청각이 뛰어난 이든이라면 충분히 들었을 텐데 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사각형으로 반듯하게 깎인 정원수를 따라 걸을 뿐이었다.
‘이 정도면 모리스 대신관도 우리를 주의 깊게 보고 있겠지?’
최종 적수가 어디선가 눈에 불을 켜고 우리를 보고 있을 거란 생각에 바짝 긴장됐다.
‘기다려라, 이 못된 놈아. 뚝배기 브레이커님께서 왔으니까.’
속으로 의지를 활활 불태우는 사이, 야외 파티장과 점점 가까워졌다.
아치형으로 핀 꽃이 터널처럼 이어진 입구를 반쯤 지나쳤을 때 이든에게 속삭였다.
“이제 그만 내려 쥬셔도 돼여.”
“그러도록 하지.”
그는 왠지 모르게 조금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닥에 내려 주었다.
내가 이든과 떨어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주변으로 귀족들이 몰려들었다.
“라이언하트 백작님, 이곳에서 뵐 줄은 몰랐습니다. 그간 잘 지내셨나요?”
“처음 뵙겠습니다, 각하. 저와 와인 한잔은 어떠신지.”
“…….”
이든은 곧바로 허락이라도 구하듯 나를 바라봤다.
‘아니, 나를 신경 쓰는 거라고 봐야 하나?’
그의 관심이 온통 내게 쏠려 있었다. 그건 아무리 눈치가 없는 사람이 보더라도 모를 수가 없을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덕분에 와인 잔을 내민 상대는 물론, 사심을 품고 접근한 여인들은 민망함을 이기지 못하고 큼큼, 헛기침을 뱉었다.
‘애초에 백작님이 귀족들에게 살갑게 대하리라고는 생각도 안 했다만…….’
계속해서 지금처럼 쌀쌀맞게 굴었다가는 괜스레 이상한 소문만 퍼질 것 같았다.
원래 사교계란 그런 곳이었다.
‘애써 쌓아 놓은 명성 다 망가지겠네.’
이쯤 빠져 주는 것이 우리에게 도움되는 행동이라는 걸 깨달았다.
내가 계속 이든의 시선이 닿는 곳에 있었다가는, 종일 나만 신경 쓸 게 뻔했다.
“말씀 천천히 나누세여. 근처에서 얌전히 놀고 있을께여.”
이든이 나를 붙잡기 전에 포르르 그곳을 벗어났다.
‘그나저나 노아는 어디 있지?’
나는 넓은 정원을 돌아다니며 노아를 찾아 헤맸다.
그러던 중, 곱게 차려입은 내 또래의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을 발견했다.
이윽고 멀찍이 귀족 영식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익숙한 연노란빛 뒤통수가 보였다.
‘저기서 뭘 하는 거야?’
가만 보니, 시비가 걸린 것 같기도 했다.
“뇨아!”
내 부름에 한 마리 토끼처럼 어깨를 들썩인 노아가 획 뒤돌아섰다.
이내 나를 발견한 그가 귀족 영식들 사이를 빠져나와 내게로 달려왔다.
“루나!”
“잘 지내써?”
괴롭히는 사람은 없었고? 리아노 공작이 혹시 못된 실험을 하지 않았어?
노아를 만나기 전 그에게 물어볼 것이 한가득이었는데, 막상 마주하니 물어볼 것도 없이 그 답을 알 것 같았다.
‘잘 지내지 못했구나.’
얼굴에 피로가 가득했다.
‘아까 둘러싸고 있던 애들은 입양된 노아에게 텃세를 부리는 귀족 영식들인 걸까?’
힐끔 그의 등 뒤를 바라봤다.
멀리 떨어져 있어 얼굴을 잘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어렴풋이 우리 쪽을 보며 수군거리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 부모에 그 자식들 아니랄까 봐.
한 명을 상대로 몇 명이 편을 먹은 거야? 유치해 죽겠네.
“난 잘 적응하고 있지. 루나 넌?”
“거짓말쟁이 뇨아. 얼굴에 다 쓰여 있는뎨. 피곤하다고.”
“이것저것 배우느라고 조금 바쁘긴 해도 괜찮아.”
“뭘 배우는뎨?”
설마, 벌써 이상한 흑마법이라도 가르친 건 아니겠지?
불안함과 함께 원작이 떠올랐다.
리아노 공작은 성인이 된 노아에게 불법 마법 실험을 한 것은 물론, 흑마법을 가르치려고 했다.
흑마법은 일반 마법보다 강력한 대신 시전자의 목숨을 갉아먹었다.
때문에 법적으로 금기된 영역이었지만, 리아노는 흑마법에 관한 욕망을 버리지 못했다.
‘누구보다 마법을 오래 연구해 온 가문이니까 더더욱 흑마법을 손에 넣고 싶었겠지.’
문제는 그 흑마법이 건장한 성인에게도 위험 부담이 크다는 건데, 하물며 아직 어린 노아에게는 치명적일 것이다.
제발 아니길 바라는 마음으로 재차 물었다.
“뭘 배웠써? 이상한 걸 알려 준 곤 아니지?”
“그냥 귀족식 예절이라든가, 그런 것들.”
노아가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다행이다. 아직 리아노 공작이 개수작을 부리기 전이라서.
나는 노아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혹쉬 저번에 내가 알려 준 거, 리아노 공쟉밈한테도 보여 줘써?”
“사람들 치료해 주는 거?”
“응, 그거.”
“보여 드리긴 했는데, 왜?”
“공쟉밈 반응은 어땠써?”
내 다급한 물음에 노아는 눈썹을 아래로 기울였다.
“별말씀 없이 그냥 마법 관련된 서적을 읽어 보라 주셨는데……. 혹시 내가 뭔가 잘못한 거야?”
“아냐.”
그냥 내가 불안해서 그랬어.
뒷말을 조용히 삼켰다.
아직은 노아가 어려서 그런지 리아노가 손대지 않은 것 같았지만, 이대로 마냥 안심할 수는 없었다.
“앞으로 공쟉밈이 이것저것 해 보라고 시키면 무조건 잘 못 하는 척해. 알아찌?”
“할 수 있는 거라도?”
“웅, 할 수 있는 거라도.”
노아가 마법에 천재적인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가는 당장에라도 실험을 강행하려 할 테니까.
‘언제까지 속일 순 없는 거지만, 최대한 그 시기를 미뤄야 해.’
노아를 지킬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내게도 쑥쑥 자랄 시간이 필요했다.
“알았어, 네 말대로 할게. 그런데 있잖아…….”
“응?”
“나 어쩌면 리아노 공작가의 차기 후계자가 될 것 같아.”
“뭐어?”
하마터면 노아에게 ‘셀리는 어쩌고?!’ 하고 물을 뻔했다.
셀리는 리아노 공작가의 사람이 아닌 이상 알 수 없는 인물이었기에 입 밖으로 내서는 안 됐다.
“공작님이 다음 달에 열리는 연회에 나랑 같이 참여하실 생각이신 것 같거든. 혹시 루나 너도 참여…….”
“야! 가짜!”
멀찍이서 날아든 누군가의 외침이 노아의 질문을 싹둑 잘라먹어 버렸다.
‘뭐야?’
돌아보니 조금 전, 노아에게 시비를 걸던 남자애들이었다.
“꼴에 여자애 앞이라고 멋있는 척하고 있네.”
“평민 출신 주제에. 기사도를 흉내 내고 싶었나 봐.”
그들은 자기들끼리 낄낄거리면서 우리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이런 예의라고는 우유에 말아먹은 놈들을 다 봤나.
‘그래, 치사하게 한 명만 따돌리는 놈들의 상판대기 좀 보자.’
나는 짝다리를 짚고 서서 다가오는 무리들을 뾰족하게 바라보았다.
“너, 말하다 말고 어딜 가는 거야?”
“아무래도 우리가 귀족식 예의를 가르쳐 줘야겠네.”
껄렁껄렁 다가오는 무리들 틈에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어? 쟤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제일 앞에서 걸어오던 꼬마의 눈이 점점 커다랗게 변했다.
이내 우뚝 멈춰 선 그가 내게 손가락을 뻗으며 입을 떡 벌렸다.
“뭐……, 뭐야, 꼬맹이.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몽크 오빠?”
그러는 너야말로 왜 여기서 나오는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