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몽크 오빠?”
몬크 코노미야는 그 자리에서 목석같이 굳어 버렸다.
바른 어른으로 자라라고 물에 빠진 거 건져 놔 줬더니, 옷 마르기 무섭게 기어이 못된 짓을 하고 있었겠다?
화르륵 불꽃이 피어오른 눈을 게슴츠레 뜨며 몬크를 바라봤다.
그는 진땀을 빼며 내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설명이 좀 필요하게써.”
“꼬, 꼬맹아. 그, 그러니까 이건…….”
천만다행인 게, 본인도 동생 보기에 창피한 짓이라는 걸 알고 있는 모양이다.
“뭐야, 몬크. 저 계집애랑 아는 사이야?”
눈치 없는 놈 하나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몬크에게 물었다.
그러자 몬크가 까불거리는 놈의 옆구리를 퍽, 후려쳤다.
“야, 입 닥쳐.”
친구 놈이 으악,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어허. 이것 봐라. 폭력까지 쓰신다?’
나는 더욱더 뚱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야, 야! 오버하지 마. 일어서, 얼른.”
몬크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친구 놈을 힘으로 일으켜 세우며 내 눈치를 살폈다.
그럼에도 내 표정이 누그러들지 않자, 다급히 친구의 바지를 직접 털어 주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몬크의 친구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저 여자애가 누구기에 그래?”
천하의 코노미야 영식을 안절부절못하게 하는 꼬마 애를 봐서 신기한 것 같았다.
하기야. 중앙 세도가와 밀접한 가문인 코노미야 백작가의 후계자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보기 드문 광경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몬크가 굽실거릴 인물이라면 자신들이 모를 리 없다.
그런데 웬 처음 보는 꼬마 애가 몬크를 휘어잡으니 더욱 궁금한 거겠지.
“뭐 대단한 뒷배라도 있는 애야?”
몬크가 내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남자애의 멱살을 잡았다.
“느 그 입 은 드믈면 그믄 은 든다.(너 그 입 안 다물면 가만 안 둔다.)”
“으, 으응. 조용히 있을게.”
또래에 비해서 힘이 월등히 센 몬크는 한순간에 남자애들을 제압했다.
조금 전까지 건방을 떨며 우리에게 시비를 걸던 꼬마들은 쭈글쭈글해진 모습으로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남겨진 사람은 나와 벙찐 노아, 그리고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몬크 세 사람.
이마를 계속 만지작거리며 초조해하던 몬크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저, 저기. 루…… 루나.”
“돼써, 말 걸지 마. 실망이야.”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팽 돌리자, 몬크가 울상이 됐다.
“내게 해명할 기회를 줘, 꼬맹아!”
* * *
잠시 후, 내 부탁으로 인해 노아는 잠시 자리를 비켜 준 상태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됐는지 멀찍이서 발을 동동 구르며 몬크와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몬크의 자초지종을 듣는 내내 꼬고 있었던 다리를 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랬떤 거다?”
“응. 원래 귀족들의 세계에서는 이런 신고식을 다 한 번씩 거치는 거야.”
옆자리에 바짝 의자를 붙이고 앉은 몬크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내게 ‘노아가 귀족식 신고식을 치르고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대충 상황을 알 것 같았다.
본디 귀족들은 보수적인 집단이다.
새로이 등장하는 신흥 세력의 힘을 견제하기 위해서 이런 문화를 만들었을 것이다.
신고식이라는 이름으로 허울 좋게 포장하긴 했다만…….
까놓고 말하자면 그냥 집단 따돌림이지.
“이제 다 말해 줬으니까, 나한테 실망한 거 취소지, 꼬맹아……?”
“아니.”
단호한 대답에 몬크가 양손으로 이마를 부여잡으며 울상을 지었다.
“누가 정한 건뎨?”
“어?”
“처음 보는 애가 나타나면 신고식으로 겁쥬라는 거. 법으로 나와 있는 고야?”
“아니, 그건 아닌데……. 어른들도 다 그렇게 하시니까.”
그래, 그러니까 더 어이가 없다는 거야.
이놈의 제국은 어른들이 얼마나 썩어 빠졌기에 애들이 그런 걸 보고 배워.
나는 뾰족해진 눈으로 몬크를 째려봤다.
“오디서 보고 배웠써?”
“로얄 클럽에서……. 각하께서 내게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으레 이런 식으로 기선 제압을 먼저 해야 한다고 하셨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쩌면 좋아, 몬크. 네 양아버지는 왜 하필 가르쳐도 네게 그딴 쓰레기 같은 사상만 가르쳤다니?
어떻게 보면 몬크도 안쓰러운 희생양이었다.
코노미야 백작의 눈 밖에 날까 봐 두려워 필사적으로 그렇게 못된 가르침을 따른 걸 테니까.
‘원작에서 지 아빠보다 더한 쓰레기가 됐던 이유가 다 이런 빌드업이 앞서 있었기 때문이구나.’
바로잡아 줄 필요가 있었다.
선과 악에 관한 개념 정리가 필요한 지금 이 시기에 양아버지에게는 제대로 된 교육을 기대할 수 없으니…….
그나마 이 세계 속에서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한 내가 나서서 도와줄 수밖에.
“그럼 나한테도 해야겠녜?”
“뭐?”
“나도 오늘 사교 모임에 처음 참여했쟈나.”
“그건 그렇지만…….”
“따지고 보면 내가 더 신고식 대상이어야 되는 고 아냐? 내가 뇨아보다 더 유명하고 돈도 더 많은뎨?”
어린 나이에 벌써 기르신 신문에도 실린 데다, 황제에게 선물을 받기까지 했다.
게다가 몬크의 아버지인 코노미야 백작은 요리 대회의 일로 우리 가문에게 유감까지 있으니, 먹잇감으로 더없이 좋은 대상이었다.
하지만 몬크는 눈썹을 찌푸리며 질겁하듯 손사래를 쳤다.
“너, 너 같은 꼬맹이한테 어떻게 그래!”
“하지만 몽쿠 오빠의 친구들은 내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은 눈치였는걸?”
“뭐? 누가? 너한테 함부로 대하는 놈들이 있으면 말만 해. 내가 다 혼내 줄 테니까!”
그가 당장에라도 휘두를 것처럼 주먹을 쥐고 멀찍이 떨어진 귀족 남자애들을 째려봤다.
에효. 말이나 못 하면.
그래도 몬크가 마냥 악한 아이는 아니었기에 밉지는 않았다.
“뇨아에게도 함부로 대하지 말았어야지.”
“하지만 저 녀석은 너랑…….”
삐쭉 튀어나온 입술이 불만을 삭이는 모습을 바라보다, 몬크의 주먹을 살포시 붙잡았다.
그러자 말아 쥔 주먹에 바짝 힘이 들어간 게 느껴졌다.
“몽크 오빠.”
“으응?”
“내가 저번에 모라고 했어.”
내 시선을 피하며 데굴데굴 눈을 굴리던 몬크가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를 냈다.
“……난 그냥 몬크고, 내 잘못이 없다고.”
“그래. 뇨아도 똑같아. 뇨아는 그냥 뇨아고, 뇨아 잘못은 없어.”
“…….”
“어떤 뉴구도 사람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돼. 그건 신분 귀천을 떠나서 마찬가지야. 아마 창조신께서도 그런 걸 원치 않으실 꼬야.”
몬크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동그랗게 빚어진 다갈색 동공이 천천히 내리깔렸다.
그간 자신이 맹목적으로 따르려 했던 진리가 부조리하고 정의롭지 못했음을 깨닫고 부끄러움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찌? 나랑 약속해. 그런 어른이 안 되기로.”
몬크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퍼뜩 정신을 차린 몬크가 제 옷에 손을 벅벅 문질러 닦은 뒤, 새끼손가락을 펼쳤다.
아까 전, 대장처럼 또래 남자애들을 호령하던 모습은 어디 가고 달달달, 떨리는 손가락을 겨우 마주 걸었다.
“으, 으응! 약속할게, 꼬맹아!”
옳지.
그렇게 하나씩, 틀린 걸 바로잡아 가며 올바른 어른으로 자라나는 거야.
나는 우렁차게 대답한 몬크가 기특해서 뒤통수를 쓰다듬어 줬다.
그러자 몬크의 얼굴이 잘 익은 석류처럼 새빨갛게 변했다.
“뭐……, 뭐 하는 거야.”
“참 잘 해써요, 칭찬해 쥬는 거야.”
“사내대장부는 그런, 그런 거 필요 없거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몬크는 나를 밀어내지 않았다.
하여튼 간에 부끄러움만 많다니까.
“그럼 이번 한 번만 받아 죠, 알았찌?”
“트…… 특별히 기사도 정신으로 이번 한 번만이다?”
“그래 그래. 알아써.”
나는 몬크에게 마저 쓰담쓰담해 준 뒤, 우리 쪽을 힐끔거리는 귀족 자제들을 바라봤다.
‘으음. 이로써 노아를 괴롭히는 애들은 잠잠해지는 거겠지?’
거지 같은 신고식 문화도 일단락시키고, 노아도 구해 줬으니 나름 쏠쏠한 수확이라 생각했다.
이제 남은 게 뭐가 있더라…….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는데,
철퍽―!
무언가 무른 덩어리가 내 등을 강타했다.
“!”
갑작스러운 충격에 휘청거린 나를 몬크가 붙잡아 주었다.
하마터면 그대로 넘어져서 다칠 뻔한 상황에 그의 언성이 높아졌다.
“꼬맹아!”
“루나!”
줄곧 멀찍이서 이쪽을 보고 있던 노아도 순식간에 내 앞으로 달려왔다.
‘뭐야?’
질퍽한 물체가 등을 타고 치맛단까지 내려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돌아보니 누군가 내게 던진 물체는 티 파티를 위해 황실에서 준비한 디저트 케이크였다.
노아가 심각해진 얼굴로 물었다.
“루나, 괜찮아?”
“응. 다치진 않았는데…….”
생크림 때문에 드레스가 엉망이 되었다.
노아는 제 손이 더러워지는 것을 개의치 않으며 내 옷을 직접 털어 주었다.
“생크림이라서 자국이 그대로 남았네. 갈아입을 옷 있어?”
“리챠드한톄 물어봐야 돼.”
에효. 이 꼴로 돌아가면 분명 잔소리를 들을 텐데.
저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침울한 내 표정을 본 몬크가 어딘가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저 자식……. 감히 꼬맹이한테.”
“누가 그런 쥴 알아?”
나는 몬크가 째려보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여자애?’
커다란 화환 뒤, 생크림을 손에 묻힌 채 우리 쪽을 노려보는 여자애가 서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여자애는 땅바닥에 ‘퉤!’ 침을 뱉었다.
‘귀족 영애인 거 같은데…….’
여느 귀족 영애들과는 달리, 고상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누구인지는 모르겠다만.
아무튼 간에 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저 여자애는 누규야?”
“셀리.”
몬크에게 한 질문인데, 대답이 노아에게서 돌아왔다.
셀리?
‘리아노 공작의 사생아, 그 셀리?’
커다래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붉은빛이 도는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묶어 올린 그녀가 테이블 위에 세팅된 사과파이를 집어 냅다 내 쪽으로 던졌다.
퍼억!
이번에는 제법 큰 소리가 났다.
다행히 바로 발 앞에 떨어져서 신발에 조금 사과잼이 튀었을 뿐, 맞지는 않았다.
“저게 또……!”
“쟘깐.”
참지 못하고 발끈한 몬크를 붙잡았다.
멀찍이 그녀의 입술이 벙긋벙긋하는 게 보였다.
‘뭘 봐.’
나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반대쪽 손에는 당장에라도 던질 기세로 생크림 케이크를 하나 더 쥐고 있었다.
아무래도 지금 쟤……. 날 울리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철퍽―!
또 한 번 생크림 케이크가 날아왔다.
“내가 가서 말하고 올게.”
나를 보호하기 위해 내 어깨를 감싸 안은 노아가 보기 드물게 화난 얼굴로 셀리 쪽으로 향했다.
그대로 뒀다가는 싸움이 날 것 같았다.
다급히 노아의 앞을 막아섰다.
“뇨아, 내가 가따올게.”
“루나.”
“나만 믿구 딱 기다료.”
나는 셀리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양팔을 걷어붙였다.
‘해보자는 거지, 셀리?’
그러자 그녀가 주춤거리는 게 보였다.
보통 아기라면 네 행패에 와아앙 울음을 터트렸겠지만…….
미안한데 난 보통 아기가 아니라서 말이야.
나는 생크림으로 지저분해진 치맛단 아래를 힘껏 잡아당겼다.
부드러운 재질의 아이용 드레스는 손쉽게 부욱! 찢어졌다.
“!”
멀리서도 셀리의 초록색 눈동자가 커다래진 게 보였다.
양 주먹을 야무지게 말아 쥐고서 큰 기합과 함께 셀리 쪽을 향해 달려들었다.
“야아아아!”
셀리의 손에 들려 있던 생크림 케이크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