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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45/142)

45화

모두가 고상 떨기 바쁜 황실 티 파티에서 때아닌 추격전이 벌어졌다.

나는 생크림과 온갖 잼을 덕지덕지 묻힌 손을 마구 휘저으며 도망가는 아이 뒤를 죽어라 쫓았다.

“거기 서어어어!”

“따라오지 마!”

“시로! 너가 멈쵸!”

“내가 미쳤냐?”

셀리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달렸다.

나 역시도 포기하지 않았다.

밑단이 반쯤 뜯긴 내 드레스는 끈질긴 추격전으로 인해 흙먼지로 금방 더러워졌다.

단연 우리만 튀었다.

우아하게 둘러앉아 쿠키나 먹으며 미래의 신랑감을 물색하기 바빴던 어린 귀족 영애들은 우리를 보고 적잖이 충격을 먹은 표정들이었다.

어느덧 어린 귀족들이 모여 있는 곳을 지나 어른들이 모여 있는 곳에 다다랐다.

셀리의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이대로 놓칠 순 없지.

“지나갈께여!”

나는 논알코올 칵테일을 들고 모여 있는 어른들 틈을 가로질렀다.

“어머멋!”

그제야 대화에 심취해 있던 어른들이 우리가 추격전을 벌이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도대체 어느 가문의 자제들인 거요?”

“가서 말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

“세상에, 저런 망측한……!”

그들의 수군거림이 커졌다.

앞서 달리고 있던 셀리가 욕지거리를 내뱉더니 방향을 바꿨다.

미로 정원 쪽이었다.

‘설마 저기로 도망칠 생각인 거야?’

허억 허억. 잠시 멈춰 서서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골랐다.

“자네가 나서서 좀 뭐라고 다그쳐 보게.”

“어느 집 자제인 줄 알고……. 그러는 자네가 나서 보게.”

주변 어른들이 차마 나서지 못하고, 부채로 입을 가린 채 서로에게 책임을 미루는 소리가 들렸다.

그 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아가님?”

여인들 틈에서 어렵사리 고개를 내민 것은 리챠드였다.

그는 내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팔뚝에 달라붙은 여인들을 내팽개치다시피 하고서 내게 한달음에 다가왔다.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친구랑 놀다가 올께여!”

대충 얼버무려서 리챠드에게 미안했지만, 급한 대로 다시 셀리를 뒤쫓기 시작했다.

“아가님!”

다급한 외침이 점점 멀어졌다.

나는 달리는 내내 셀리의 뒷모습을 놓치지 않으려고 집중했다.

머지않아 그녀가 미로 정원으로 쏙 들어가는 게 보였다.

나 역시 망설임 없이 그 뒤를 따랐다.

* * *

한 치의 오차 없이 일직선으로 잘린 사각 정원수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또 잘못 왔녜.”

벌써 다섯 번째 막다른 길이었다.

곧바로 따라온답시고 따라왔는데, 셀리를 놓치고 말았다.

게다가…….

‘길까지 잃어버렸어.’

주변을 찬찬히 돌아보았다.

사방이 온통 초록색 직선으로만 이뤄져 있었다.

이대로면 셀리는커녕 출구도 못 찾겠네.

그랬다가는 이든과 리챠드에게 엄청난 민폐일 테니 부지런히 출구를 찾을 필요가 있었다.

나는 빙글 뒤돌아 벽을 등지고 섰다.

미로 정원의 정원수는 성인 남자의 키를 훨씬 웃도는 높이라서 내가 어디쯤 있는지도 확인해 볼 수가 없었다.

‘보통 이런 미로는 한쪽 벽만 따라서 걷다 보면 출구가 나온다던데.’

한쪽 벽에 손을 짚은 채로 벽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얼마쯤 그렇게 헤맸을까.

나는 여전히 미로 정원의 어딘가에 갇혀 있었다.

아…….

“여기가 어디야아!”

애처로운 외침이 미로 정원에 울려 퍼졌다.

‘내가 진짜 이 방법만큼은 안 쓰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지.

꾸물거리는 손을 목에 걸고 있는 엘코어에 얹었다.

그리고 조용히 마음속으로 할아버님을 불렀다.

……저 좀 도와주세요.

【할애비 여기 있다!】

엘코어에서 반투명한 기체 덩어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곧 사람의 형상을 갖춘 엘베른의 혼이 허공에 큰 원을 그린 후 내 앞에 가볍게 착지했다.

【잠시만 기다려 다오. 이 할애비가 아직 마취가 덜 풀린 것 같아서…….】

“마취여?”

혹시 무슨 일이 있었나 싶어서 표정을 살폈다.

그러자 그가 이마를 짚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오늘따라 창백한 얼굴이 유독 새하얗게 질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순간 엘코어 안에 갇혀 있는 동안 악영향이라도 받은 건 아닐까 걱정됐다.

【우리 손녀 알럽쏘마취!】

……아. 진짜 괜히 불렀어.

엘코어를 붙잡는 시늉을 하자, 엘베른이 양 손바닥을 딱 붙이며 처연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할애비가 사과하마!】

아이고, 내 머리야.

【어디가 아픈 것이냐?】

심각하게 묻는 그에게 ‘할아버지 때문’이라고 말했다가는 온종일 시무룩하실 것 같아서 말을 아끼기로 했다.

에휴. 내가 참아야지 뭐.

나는 입술을 끌어 올리며 물었다.

“출구 좀 찾아 쥬실 수 있어요?”

【출구?】

“어쩌다 보니 여기에 갇혔꼬든요.”

【감히 누가 내 손녀님을 괴롭히는 것이냐?】

그제야 내 몰골을 제대로 확인한 엘베른이 촘촘히 짜인 나무 벽을 통과해 내게 다가왔다.

주변의 기온이 갑자기 뚝 떨어졌다.

분노가 이글거리는 눈은 복수를 위해서 지옥에서 돌아온 사자 같았다.

나는 치사하게 셀리와의 일에 할아버지 찬스를 쓸 생각이 없었기에 조용히 엘코어 위로 손을 얹었다.

“못 찾으실 것 같으면 말구여.”

【이 할애비만 믿어라!】

폭죽처럼 하늘로 솟아오른 엘베른이 주변을 살펴보더니 금방 내게 돌아왔다.

【이쪽 방향이다!】

“이쪽이여?”

【그다음은 오른쪽으로 쭉 가다가, 갈림길이 나오면 왼쪽으로! 그다음 갈림길에서는 오른쪽으로!】

엘베른은 미로 정원 위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길을 안내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나보다 앞서가던 그가 우뚝 멈춰 섰다.

【흐음?】

“왜여?”

무슨 문제가 있나?

덩달아 멈춰 선 나는 엘베른이 보고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내가 있는 곳의 벽 너머를 보고 있었다.

【저기 웬 놈들이 있는데?】

“어디여?”

키가 작은 나는 정원수 너머 그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돌연, 엘베른이 그곳을 향해 날아갔다.

‘어어? 할아버지!’

나는 갑자기 어딘가로 향하기 시작한 엘베른의 뒤를 쫓았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이었다.

“……께서 지시하신 대로…….”

가까이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왔다.

엘베른은 자신이 남들 눈에 보이지 않는 상태라는 것도 잊은 듯, 사각수 뒤에 몸을 숨긴 채 상대방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나도 덩달아 입 밖으로 소리를 내지 않고, 생각으로 말을 붙였다.

‘대체 누구기에 그래요?’

【쉿!】

엘베른은 검지를 입술 끝에 가져다 댔다.

대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바로 앞이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상대방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상대는 성인 남성 둘이었다.

“다음 지시 사항이 있을 때까지 아이를 잘 관리하고 있도록. 연구할 가치가 충분하니.”

“여부가 있겠습니까. 눈치가 빤한 아이라서 말썽을 피울 것 같진 않았습니다.”

심상치 않은 대화가 오갔다.

나는 본능적으로 쪼그려 앉아 정원수 뒤로 몸을 숨겼다.

‘뭐야. 이 상황.’

어쩌다 보니 누군가의 밀회를 염탐하는 꼴이 되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확실한 건, 절대 상대방에게 발각되면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

왠지 모르게 위험한 대화가 그 증거였다.

“수인족 토벌은 어찌 되고 있나?”

“북쪽 지역은 다페 남작이 처리했지만, 남쪽은 애를 먹고 있습니다.”

수인족 토벌?

얼마 전에 이든과 함께 봤던 신문 기사가 떠올랐다.

쿵, 쿵, 쿵!

불안함이 북채가 되어 심장을 마구 두들겼다.

어느덧 나는 엘베른과 함께 숨을 죽인 채 그들의 대화를 엿듣는 데 집중했다.

“아무래도 남쪽이 예전 수인족 우두머리의 터가 있었던 곳이니 더 견고하겠지.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방도가 없지는 않을 터.”

“적절한 실험체를 발견했습니다. 곧 살상용 무기로 개조할 계획입니다.”

“저번 보고 때 그 마법 실험은 불안정한 상태라고 하지 않았나?”

“……미처 잡지 못한 오차가 있어서 그랬습니다. 이번에는 성공시킬 수 있습니다.”

“뒤탈 없게끔 해.”

실험체. 살상용 무기 개조. 마법 실험.

그들의 입을 오르내리는 엄청난 주제들에 머릿속에는 빨간 등이 켜졌다.

굳이 두 눈으로 두 사람의 얼굴을 직접 확인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자들은 분명…….’

그들의 정체는 명확했다.

【저 배신자 자식의 뼈를 통째로 씹어 먹었어야 했는데.】

엘베른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실시간으로 그의 분노가 쌓여 갈수록 주변은 한기로 가득 찼다.

새하얗던 영혼이 끄트머리에서부터 서서히 검은색으로 물들어 갔다.

“!”

무슨 형상인지는 정확히 몰랐으나, 그대로 뒀다가는 큰일이 날 것 같았다.

‘잠시 들어가서 진정하고 계셔요.’

나는 급히 엘코어 안으로 엘베른을 소환했다.

분노한 엘베른의 영혼은 냉기와 함께 엘코어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주변은 원래의 온도를 찾았다.

나는 다시 벽 너머 엘베른이 보고 있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배신자라고 칭할 이는 단 한 명뿐이었다.

황제를 쥐락펴락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자.

그리고 인간과 수인족의 동맹을 깨트린 원흉이자, 엘베른 라이언하트를 잡기 위한 덫을 계획한 장본인.

이 소설의 최종 빌런, 모리스 대신관이었다.

자연스럽게 모리스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자 역시 누구인지 유추할 수 있었다.

‘나머지 한 명은 보나 마나 노클 리아노 공작이겠네.’

내 추측은 맞아떨어졌고, 두 사람은 아직 내가 숨어서 엿듣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런 쪽으로는 이미 대비를 해 두시지 않으셨습니까.”

“던버르레 공작에게 언론을 통제해 두라고 하긴 했다만…….”

“그자에 관해서는 의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간혹 속내를 알 수 없는 말을 하긴 해도 대가만 확실하다면 관계는 틀어지지 않을 겁니다.”

“돈이야 황실 금고가 있으니까.”

세도가 삼인방과 모리스 대신관의 관계가 뚜렷이 보였다.

‘그야말로 언제 깨질지 모르는 살얼음판 위에 나란히 서 있네.’

서로 각자의 안전장치를 등 뒤에 숨긴 채로.

그들의 속내를 비웃고 있는데, 또 어느새인가 대화 주제가 바뀌었다.

“그런데, 사라진 수인족 우두머리의 후예 행방은 아직 못 찾은 건가?”

……아빠에 관한 얘기다.

적의 입에 가족이 오르내리자, 일순 온몸 구석구석에 뻗어 있는 혈관의 모든 피가 역류하는 것만 같았다.

불규칙적으로 뛰기 시작한 심장이 당장에라도 터질 듯이 펌프질했다.

만약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지 않았더라면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내지를 뻔했다.

“다페 남작이 백방으로 알아보고 있다고 합니다.”

“그자는 늘 일을 그르치니 믿을 수가 없어, 믿을 수가……. 이번 보육원 일 처리 때도 그렇고.”

“곧 추적 마법 술식이 완성됩니다. 몇십 년 전에 사라진 자라서, 추적 술식을 계산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습니다.”

“찾을 확률은?”

“추적 마법을 쓸 걸 예상하고 미리 대책을 준비한 게 아닌 이상, 80퍼센트입니다.”

이든에게 얼른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그래서 실수하고 말았다.

바스락.

뒷걸음질 치다가 바닥에 떨어진 잔가지를 밟고 말았고, 그게 하필 상대의 귀에 들어갔다.

운이 나빴다.

“!”

“거기 누구냐.”

상대방에게 내 존재를 들켰다는 걸 깨닫자 당혹감에 몸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

어떡해!

저벅저벅,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순순히 나오는 게 좋을 것이다.”

이내 반듯하게 다듬어진 미로 정원의 벽 틈 사이로 성인 남성의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헉!’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잡힐 뻔했다.

“어차피 잡힐 것을, 용쓰는군.”

리아노 공작의 손에서 붉은빛이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그것은 마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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