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어차피 잡힐 것을, 용쓰는군.”
리아노 공작이 얽힌 나무의 빈 틈새로 팔을 더 깊숙이 밀어 넣었다.
“!”
나는 필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의 손이 거의 무릎 끝을 스쳤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그대로 커다란 손에 붙잡힐 뻔했다.
‘어떡해야 하지.’
노클 리아노 공작은 수준급 마법사였다.
그가 마법을 사용한다면 어설프게 숨어 있는 나 같은 어린애쯤은 금방 찾아낼 것이다.
그의 손에서 흘러나온 붉은빛이 점점 실체화됐다.
더는 도망갈 곳이 없었다.
등 뒤로 닿는 나무 벽의 딱딱한 촉감이 족쇄가 된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두 다리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잡히면 끝장이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엿들었는지, 누가 사주한 것인지, 다른 이에게 전달했는지…….
이래저래 캐묻다가 정보를 다 빼먹었다 싶으면 가차 없이 죽일 거야.
그러고도 남을 자였다, 저 둘은.
‘도망가야 해.’
자꾸만 다리 힘이 풀릴 것 같아서 벽을 짚은 채 걸음을 겨우겨우 옮겼다.
막 네 발짝 정도 떼었을 즈음.
“이쪽 벽을 치워 버리고 확인하는 게 좋겠습니다.”
모리스 대신관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붉은 마나가 나와 그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정원수 벽을 삼키듯이 뒤덮었다.
‘사라진다!’
벽이 점차 투명하게 변했다.
꼼짝없이 발각되는 순간이었다.
그리 생각하고 두 눈을 질끈 감은 그때, 내가 손을 짚고 있던 등 뒤의 벽이 움직였다.
“?!”
벽은 마치 회전문처럼 빙글 돌아갔고, 그곳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던 내 몸은 기우뚱 넘어갔다.
180도 돌아간 벽과 함께 나는 반대쪽으로 옮겨졌다.
중심을 잃은 내 몸을 누군가의 단단한 손이 타이밍 좋게 붙잡아주었다. 덕분에 바닥에 넘어지는 불상사는 없었다.
‘앗!’
작지만 거칠거칠한 손바닥이 내 입을 막았다.
“쉿.”
……여자?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그녀는 나를 등 뒤에서 안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온몸의 감각이 예민하게 곤두섰다.
얼굴은 볼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 대신에 길게 늘어뜨린 오묘한 푸른 빛깔의 머리카락이 시야에 들어왔다.
‘누구지?’
정체는 알 수 없어도 그녀가 나를 보호하려고 한다는 걸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우리가 몸을 웅크린 곳 바로 뒤에서 리아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숨은 것 같습니다.”
“그만. 마법 사용은 그쯤 해.”
“혹시 모를 싹은 잘라 놓는 게 좋습니다. 여기, 흙의 색이 다른 곳보다 짙은 걸 보면 방금 전까지 무언가 머물렀던 흔적입니다.”
……이런, 내 발자국!
모리스 대신관이 가까이 다가오는 소리가 이어졌다.
“이 정도 족적이면 기껏해야 어린애의 발 크기가 아닌가? 어린애가 이런 깊은 곳까지 올 리가 없을 터. 그냥 소동물이 지나간 걸 수도 있겠어.”
“그래도 혹시 모르니 확인을 해 보는 게…….”
“리아노 공작.”
강압적인 목소리가 대화의 마디를 끊어 놓았다.
“이 이상으로 마법을 사용하면 탐지석이 울릴 게 뻔한데,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걸 여기저기 소문낼 일 있나?”
“그건…… 아닙니다.”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게. 적당히 발 빠른 놈들을 골라 조용히 수색하도록 해.”
리아노 공작을 나무란 모리스 대신관이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다.
아마도 리아노가 최측근에서 부리고 있는 수하인 것 같았다.
“각하, 이만 파티장으로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인가?”
“라이언하트 가문의 집사, 리챠드 시고르자브죵 남작이 공작 각하를 독대하기를 청했습니다.”
리챠드가?
빌런의 대화 속에서 익숙한 이의 이름이 언급되어서 그런지 바짝 몸에 힘이 들어갔다.
나를 붙잡아 주고 있는 두 팔이 없었더라면 그대로 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을지도 몰랐다.
“미로 정원 내를 수색해라. 수상한 쥐새끼가 있다면 목숨만 붙여서 잡아 와.”
“네, 각하.”
리아노의 수하가 우리가 숨어 있는 벽 쪽으로 걸어왔다.
투박하고 묵직한 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다시금 포위망이 좁혀지고 있었다.
그러자 등 뒤의 여인이 오른쪽을 가리키며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제가 시선을 끌 테니 아가님께서는 저쪽으로 도망가세요.”
아가님?
나를 아는 자의 입에서 나올 법한 호칭이었다.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을 때, 내가 마주한 것은 한 마리의 커다란 공작새였다.
‘공작새 수인?’
신비로운 빛깔을 띤 푸른 날개를 활짝 펼친 새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푸드드덕!
요란한 날갯짓 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어……?”
“근방에 저런 새가 있었던가?”
“아니요. 처음 보는 새입니다.”
그녀의 예상대로 상대 쪽의 관심이 온통 그녀에게 쏠려 있었다.
도망칠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다 쏴서 없애 버려.”
살벌한 리아노 공작의 명령을 등진 채, 나는 엉금엉금 출구를 향해 기어갔다.
그녀가 알려 준 방향대로 무작정 가다 보니 작은 개구멍이 나타났다.
조그마한 내 몸은 손쉽게 통과할 만한 크기였다.
‘그 수인도 무사해야 할 텐데.’
나를 구해 준 은인에 대한 걱정과 함께 망설임 없이 개구멍으로 머리를 밀어 넣었다.
마침내 미로 정원 밖으로 나온 내 시야에 커다란 성인 남성의 구둣발이 들어왔다.
반짝반짝 구두코에서 광이 났다.
빛이 나는 구두를 지나 긴 다리를 따라 천천히 시선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 끝에 마주친 얼굴은,
“꼴이 말이 아니군.”
……백작님이다.
어린이용 드레스를 팔에 걸치고서 나를 내려다보는 이든의 얼굴을 보니 안도감이 밀려왔다.
* * *
나는 이든이 가져온 멀끔한 새 드레스로 갈아입은 채, 다시 파티장의 중심으로 돌아왔다.
이든은 나를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
“따님께서 참으로 귀여우십니다.”
“아까 작은 소동을 벌이셨다죠? 그맘때쯤 한 번씩 꼭 말썽을 피우더라고요.”
“걱정하지 마셔요. 귀족 교육을 받다 보면 요조숙녀로 자랄 겁니다. 평이 좋은 가정교사를 하나 아는데, 괜찮다면 소개해 드릴까요?”
금세 우리 주변으로 모여든 여인들이 무어라 떠들어 댔지만, 좀처럼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심경이 복잡했다.
내 귓가에는 모리스 대신관과 리아노 공작의 밀담이 자꾸 반복해서 재생됐다.
‘빨리 말씀드려야 하는데.’
초조한 마음으로 눈치를 살폈다.
주변에 듣는 귀가 많았다.
대부분 오늘 처음 보는 귀족들이라 섣불리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일단 지금은 적절하지 않은 순간이었다.
‘집에 얼른 돌아갔으면…….’
더디게 흐르는 시간이 야속했다.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오늘 내가 보고 들은 것에 대해 말씀드려야지.
그런데 그 순간.
탕―!
총성이 울려 퍼졌다.
귀부인들의 외마디 비명이 한데 뒤섞여 파티장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
순간 푸른 깃털을 지닌 공작새의 얼굴이 머릿속에 스쳤다.
‘아닐 거야.’
부디 리아노 공작의 수하들을 무사히 따돌렸기를.
별 탈 없기를 바랐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다면 그 공작새 수인은 ‘피헨느’였으니까.
원작에서 읽었던 피헨느에 관한 첫 구절이 떠올랐다.
❝얘야, 에덴 제국에서는 늘 입조심을 해야 한단다. 이곳에서의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하거든.
푸른 새와 갈색 쥐를 조심하렴. 그들은 어디에든 있으니 말이야.❞
그 구절 속에서 언급된 낮의 새가 피헨느였다.
그녀는 밤 쥐, 토리 무크와 더불어 라이언하트 가문의 뛰어난 정보력에 크게 기여를 했다.
‘그래서 나를 마치 잘 아는 것처럼 아가님이라고 불렀던 거야.’
아까의 상황이 모두 이해 갔다.
‘그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피헨느에게 고마운 마음이 듦과 동시에 걱정이 차올랐다.
와중에 미로 정원 쪽에서 황실 시종이 걸어 나오는 게 보였다.
그는 불안에 떠는 귀족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누군가 사냥 놀이를 했다’고 설명했다.
귀족들은 그 말은 믿고 안도했다.
“이리 충동적으로 행동할 귀족이라면 보나 마나 또 그분이겠네요.”
세 치 혀 위로 다페 남작의 이름이 몇 번 더 오르내렸다.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잠잠해졌다.
이내 귀족들은 대수롭지 않게 다시 대화를 이어 갔다. 흡사 총소리로 놀랐던 기억을 가위로 싹둑 잘라 낸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자네. 이번 내기에서 꽤 땄다며?”
“괜찮은 물건이 들어왔더라고요.”
“매번 혼자서만 돈맛 보지 말고, 우리에게도 정보 좀 슬쩍 흘려 달라니까.”
귀족들은 체통도 잊고 떠들었다.
그런 그들을 이든은 말없이 응시했다.
대화를 주도하던 귀족 하나가 시커먼 미소를 지었다.
“원래 이런 고급 정보는 어디 가서 함부로 풀지 않는데, 오늘은 특별히 라이언하트 백작님께서 계시니 하나 말씀드릴게요.”
누가 봐도 이든에게 점수를 따고 싶어서 아양을 떠는 꼴이었다.
이든은 딱히 그녀를 저지하지 않았다. 그다지 관심이 없어서였다.
하나 어리석은 여인은 침묵의 의미를 반대로 해석했다.
“다페 남작이 운영한다던 검투장을 아십니까?”
“왜 모르겠어요? 당장 어제 자 신문에도 실린 걸로 기억하는데.”
이든과 함께 읽었던 신문이 똑똑히 기억났다.
‘그러고 보니 다페 남작이 검투장 운영을 시작한 게 나름 머리를 쓴답시고 그런 거였지?’
나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다.
다페 남작은 귀족들을 제 뜻대로 움직일 힘을 원했다.
‘그 수단으로 이용한 게 검투장이었지, 아마.’
본디 귀족이란 사치스러운 걸 좋아하는 법.
그들에게 ‘검투장의 돈내기’ 시스템은 빠져들 수밖에 없는 달콤한 유희 거리였다.
다페 남작의 검투장은 금세 비스의 온 귀족들의 관심사가 된다.
문제가 있다면…….
시간이 갈수록 점점 값이 치솟는 검투장의 입장권을 빌미로 귀족들을 쥐락펴락했다는 것.
기세가 등등해진 다페 남작은 귀족을 선동해 평소 눈엣가시로 여긴 라이언하트 백작가에게 누명을 씌워 비스에서 쫓아낼 계획을 세운다.
이든은 가까스로 작위는 지키지만, 그 과정에서 그의 심복인 리챠드가 크게 다치게 된다.
‘그런 전개는 절대 안 돼.’
다페 남작의 검투장이 이대로 순조롭게 자리 잡는 걸 막아야 했다.
나는 잠시 다른 생각은 미뤄 두고 귀족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이번에 괜찮은 검투사가 들어왔대요.”
“붉은 주먹인가 뭔가 하는 놈 말하는 거예요?”
“맞아요. 게다가 전해 듣기로…… 그놈이 수인이라 하더라고요.”
“뭐? 수인 검투사?”
……맞아. 그런 캐릭터도 있었지.
그제야 나는 잊고 있었던 엑스트라 수인이 떠올랐다.
‘캥거루 수인, 웨인투르 후크.’
메인 스토리에 영향을 줄 만큼 중요한 등장인물은 아니지만, 그가 다페 남작의 검투장이 성장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건 확실했다.
그리고 극의 중반부에 그는…….
마법 실험으로 인해 자아를 잃고 리아노 공작의 살상 무기가 되어 동족을 학살하게 되지.
그 불행만큼은 막고 싶었다.
‘만나 봐야겠어, 웨인투르를.’
머릿속에 계획이 그려졌다.
“수인이면 생명력이 질기겠네.”
“그러니 쓸 만한 검투사라고 하지 않겠어요?”
귀족 여인들이 수다가 한창 무르익어 가고 있는 그때,
쾅!
이든이 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어찌나 세게 놓았는지, 테이블 위의 빈 잔이 흔들릴 정도였다.
나는 이든의 표정을 보았다.
‘아, 이런 종류의 대화는 백작님이 딱 질색하는데.’
이든의 속사정까지 자세히 알 리가 없는 여인들은 당황한 표정을 부채 뒤로 숨기기 바빴다.
“크, 크흠.”
“백작님께서는 이런 쪽으로는 영 관심이 없으신가 봐요.”
“보통 사내분들은 다들 좋아하시던데…….”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어느 누구도 선뜻 정적을 깨지 못하고 눈치만 살폈다.
쪼르르르륵―.
난데없이 물 따르는 소리가 적막을 깼다.
누군가 이든이 던지다시피 내려놓은 빈 잔에 붉은 석류 주스를 가뜩 따르고 있었다.
“라이언하트 백작은 사교 활동이 영 맞지 않는 모양이오.”
자연스럽게 우리의 맞은편에 앉은 이는 리아노 공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