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갑자기 무슨 꿍꿍이인 걸까.
먼저 알은체해 오는 저의가 궁금했다.
‘리아노 공작은 내가 그 대화를 엿들었다는 걸 모를 텐데.’
확신하면서도 괜히 입 안이 바짝 말라 이든의 옷깃을 붙잡았다.
그러자 이든이 불안에 떨리는 내 손을 살며시 잡아 주었다.
……어쩐지 안심이 되네.
그 작은 행동이 내게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지켜 주겠다는 것으로 해석됐다.
“어머머, 리아노 공작님 아니십니까?”
여인들은 그를 반기는 눈치였다.
도로 부채를 접고 적극적으로 환대하는 그녀들과 달리, 이든은 적나라하게 입매를 굳혔다.
“무슨 용건인가?”
“……참으로 당당한 태도로군.”
감히 건방지다는 경고였다.
두 남자 사이에서 미묘한 신경전이 오갔다.
“아시다시피 내 에덴 제국 태생이 아닌지라, 예법과 에덴어에 아직 익숙지 않아서.”
“뭐……. 괜찮소. 살다 보면 별 유형의 인간들을 다 만나는 법이니. 백작께서도 그런 괴짜 중 하나라고 생각하지.”
리아노는 품위를 중시하는 귀족가를 이끄는 수장답게 불편해하는 기색에도 평정을 잃지 않았다.
그가 손에 든 유리잔을 테이블에 놓인 이든의 잔에 부딪쳤다.
맑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든이 선뜻 잔을 들지 않음에도 리아노는 전혀 개의치 않으며 홀로 한 모금 머금었다.
“그리 경계할 필요 없소. 내 설마 독이라도 탔을까.”
“모르는 일이 아닌가. 공작의 말대로 인간들은 별의별 유형이 많으니.”
저러다가 싸움 나는 거 아니야?
싶을 정도로 두 사람의 기 싸움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손에 땀을 쥐게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직 리아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다는 거였다.
“하하, 재밌는 자로군. 그런데 말일세.”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중도에 말을 끊은 리아노 때문에 신경이 바짝 팽팽해졌다.
그는 손바닥에 굴리던 빈 잔을 테이블 위에 우아하게 내려놓았다.
“조심하게. 그리 튀었다가는 언제 잘려 나갈지 모르니까.”
내리깔린 눈꺼풀이 서서히 들어 올린 리아노는 이든을 응시했다.
‘그러니 조용히 숨죽이고 살라는 거야?’
명백한 협박이었다.
자신의 눈에 거슬리는 짓을 하지 말라는.
“무릇 잡초도 가장 높이 솟아 있는 것부터 잘려 나가는 법이니.”
……!
순간 리아노의 시선이 내게 머물렀던 건, 내 착각인 걸까?
그대로 시간이 얼어붙었다.
“황제 폐하께서 나오십니다.”
때마침 들려오는 시종의 외침으로 인해 대화가 중단되었다.
* * *
리아노 공작을 포함한 몇 귀족들이 황제에게 인사를 올리기 위해서 잠시 자리를 떴다.
덕분에 한숨을 돌릴 시간이 생겼다.
이든과 나는 오가는 인적이 드문 정원의 구석으로 향했다.
“피곤하군…….”
그가 관자놀이를 누르며 낮게 중얼거렸다.
나는 그네 의자 위에 앉아 이든의 표정을 가만히 살폈다.
“괜챠느세여?”
“걱정할 것 없다.”
표정이 전혀 그렇지 못하신데.
차마 귀찮게 더 말을 붙이지 못하고 얌전히 그네만 탔다.
멀리 파티가 한창인 정원의 중심에서 감미로운 선율이 들려왔다.
연주가 울려 퍼지자 귀족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중앙으로 나와 남녀 쌍을 이루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주변에는 우리뿐이었다.
“백쟉밈.”
그네 의자가 서서히 멈췄다.
나는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아까 모리스 대신관을 봤써여.”
“어디에서.”
이든의 눈매가 확연히 굳었다.
“미로 정원에서 리아노 공쟉이랑 계략을 짜고 있어써요.”
“설마. 아까 엉망이었던 게 그놈들 때문인가?”
무슨 계략을 엿들었는지부터 물어볼 줄 알았는데.
곧장 날아든 첫 질문이 내 예상과는 달라 괜히 양 갈래 머리칼 끝을 매만졌다.
“아뇨. 그건 다른 일이 좀 있어써서…….”
메롱 혓바닥을 내미는 셀리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일단 셀리 문제는 차차 해결하도록 하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걱정하시는 그런 일은 없어써요. 중간에 들킬 뻔하기는 했는뎨, 도움받은 덕분에 무사히 빠져나왔꼬든여.”
“누구의 도움을 받아?”
“백쟉밈의 낮 새여.”
“피헨느가 근처에 있었나 보군.”
“녜. 그건 그렇고…… 중요한 게 하나 이써요.”
다시금 주변을 살폈다.
우리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점점 절정으로 향하는 연주에 귀족들은 춤에 온정신을 뺏겨 있었다.
나는 끝까지 주변을 경계하며 조심스럽게 입술을 열었다.
“모리스 대신관이 수인족 우두머리의 후예를 찾고 이써요.”
“추적에 혼선을 주기 위한 작업은 이미 해 두었다.”
이든은 모리스 대신관이 자신의 흔적을 쫓기 시작했다는 정보를 이미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설득하기 더 수월했다.
“그럼 추적 마법에 관한 대책도 쥰비하셨써요?”
“……추적 마법 술식은 아직 미완성 상태인 거 아닌가?”
반응을 보니 이번에는 처음 듣는 얘기인 듯했다.
당연했다.
아직 이 세계관에서 ‘완벽한 추적 마법’ 술식은 완성되지 않았으니까.
기껏해야 사라진 방향 정도를 두루뭉술하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그마저도 방해 술식으로 혼선을 줘 버리면 추적에 실패하고 만다.
그 방법으로 이든은 몇십 년 동안 모리스의 추적을 따돌릴 수 있었던 거지만, 만약 추적 마법이 완성된다면…….
지금의 평화는 깨지고 말 것이다.
이든은 그걸 원치 않았다.
그리고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야.
“머지않은 시일 내에 곧 완성될 꼬에요. 리아노 공작의 손에서여.”
“그에 대비할 방법도 있나?”
그는 내 말을 한 톨도 허투루 듣지 않았다.
“물론 그 방법도 알고 있쬬.”
전 예지몽을 꾸는 아가니까요.
나를 신뢰하는 이든에게 방긋 미소 지었다.
“변신에 능한 수인이 있다고 알고 이써요.”
“그 녀석을…… 말하는 거라면.”
“마쟈요. 그분의 장기를 활용해서 일종의 방해 술식과 비슷한 방법으로 추적에 혼선을 쥬자는 거예요.”
“문제는 좀처럼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이라 찾기 힘들다는 건데.”
“그것도 걱정하실 필요 없써요.”
모두 제가 알고 있으니까.
작전 회의는 거기에서 멈추었다.
저 멀리서 황제가 이쪽으로 오는 걸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의 뒤로는 얼굴을 알 만한 고위 귀족들이 따르고 있었다.
우리는 약속한 것처럼 입술을 다물었다.
“여기들 있었구먼.”
황제가 우리 앞에 섰다.
덩달아 여러 빛깔의 눈동자가 우리에게 집중됐다.
문득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이건, 기회다.’
나는 곧장 그네 의자 아래로 폴짝 뛰어내렸다.
“창죠신의 무한한 영광과 축복이 당신의 발아래 깃들기를. 제국의 지고하신 태양, 황졔 폐하를 뵙슴미다.”
드레스 양 끝을 가볍게 들어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언제 보아도 라이언하트 영애는 또래에 비해 조숙하고 영리하구나.”
“감사함미다, 폐하.”
“짐의 부름에 이리 흔쾌히 응해 줘서 고마울 따름이야.”
“폐하께서 부르셨으니 당연히 다른 건 다 제쳐 놓고 와야져.”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고개를 기울였다.
내 나름대로 최대한 사랑스러운 모습을 꾸며 내 봤는데, 통했나 보다.
황제가 와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이리 예쁜 말만 골라서 하는데 어찌 사랑받지 않을 수가 있을까.”
늙은이의 눈동자가 유해졌다.
‘이런 반응일 줄 알았어.’
나는 속으로 빙고를 외쳤다.
보통 나이가 지긋해지면 손주를 보고 싶어 하는 법이었다.
‘게다가 황제는 십여 년 전, 황후와 자식을 동시에 잃었으니……. 더욱 생각이 날 거야.’
당시 노산이었던 황후는 출산 과정을 버티지 못했다. 배 속의 아이와 함께 그녀가 숨을 거둔 이후, 황제는 한동안 어린아이들을 가까이하지 못했다고 한다.
‘나 같은 어린애를 보면 빛도 보지 못하고 떠난 제 자식이 생각났을 테니까.’
나는 이런 자들의 마음을 녹이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무릇 상처는 사랑으로 치료하는 법이지.
“폐하. 혹쉬 저에게 폐하와 함께 산책할 수 있는 영광을 허락해 쥬실 수 있을까요?”
여인에게 춤을 신청하는 사내처럼 살포시 손을 내밀었다.
조막만 한 내 손바닥을 본 황제가 또 한차례 웃음을 터트렸다.
“이리도 사랑스러운 부탁인데, 내 신사 된 도리로 거절할 수는 없지.”
“영광임미다.”
앞서 걷던 황제가 넌지시 이든을 향해 말을 던졌다.
“라이언하트 백작. 자네도 함께 가세.”
짧은 목례로 대답한 이든이 조용히 우리 뒤를 따라 걸었다.
“짐이 준 선물을 하고 왔군.”
“녜!”
황제의 뒤를 따르는 귀족들이 목소리를 낮춰 속닥이는 것이 보였다.
‘거참, 아무리 늙은 황제가 가는귀가 먹었다지만, 너무들 안일하시네.’
나는 벙긋거리는 입술의 작은 움직임도 놓치지 않고 면밀히 살폈다.
“폐하께서 유독 저 어린 영애와 함께하실 때 웃음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라이언하트 영애에게 마음을 뺏기신 게지요. 혹 이러다 신흥 세력이 생기는 건 아닐지 염려됩니다.”
“그건 차차 지켜봐야겠지요.”
백작님도 다 들으셨겠지?
힐끗 곁눈질로 표정을 살피니 예상이 맞는 듯했다.
이로써 우리가 티 파티에 굳이 공을 들여 참여한 목적을 반쯤 달성한 셈이었다.
귀족들은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면서 동시에 경계했다.
‘좋았어. 이제 마지막 피날레 장식으로 라이언하트 가문의 입지를 제대로 굳혀 주겠어.’
으흥흥, 절로 흘러나오는 음흉한 웃음을 꾹 눌러 참으며 입을 뗐다.
“폐하께서 특별히 하사하신 선물이니 소즁하게 여기고 이써요. 그쵸, 백쟉밈?”
조용히 뒤따라오던 이든은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되자 잠시 내 목에 걸린 엘코어를 빤히 바라봤다.
“……어찌나 아끼던지. 잠잘 때도 걸고 자더이다.”
퉁명스러운 말투가 돌아왔다.
어째 맞장구를 쳐 주는 게 아니라, 투덜거리는 것 같다만…….
어쨌거나 황제를 미소 짓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허허허허, 라이언하트 영애 같은 손녀가 있었으면 좋겠군.”
이게 웬 떡이람.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똑똑한 아가였다.
냉큼 당돌한 질문을 뱉어 냈다.
“그럼 폐하께서 제 대부가 되어 쥬실래요?”
“뭐라?”
곧바로 황제 뒤를 따르던 귀족들 사이에서 새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말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기 영애께서 참으로…… 호기롭군요.”
“아직 어느 안전인지 모를 나이니 그럴 수 있다고는 봅니다.”
많이들 초조하셨나 봐.
귀족들은 덥지도 않은데 부채질을 해 댔다.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와 눈가의 주름들이 가까스로 고상한 척 버티고 섰다.
그들은 끝까지 우아한 자태를 잃지 않으려 애쓰며 황제가 내게 무어라 대답할지 집중했다.
“내 고려해 보도록 하지.”
그 한마디는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던 그들의 안면 근육을 무너트리기에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