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정말 그리 말씀하셨습니까?”
리챠드가 마차 발판을 내리다 말고 내게 되물었다.
저택으로 돌아오는 길, 마차 안에서 들은 티 파티에서의 일화를 흥미로워하는 눈치였다.
나는 리챠드의 손을 잡고서 마차 계단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녜. 폐하께서 생각해 보시겠다고 하셨써요.”
“그 이유였군요.”
리챠드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아래턱을 쓰다듬었다.
“뭐가여?”
이번에는 어떤 개구진 생각이 들었기에…….
씰룩씰룩 슬슬 시동이 걸리고 있는 입꼬리를 보고 있으니 괜히 불안했다.
그는 마치 은밀한 비밀을 말할 때처럼 목소리를 부쩍 내리깔았다.
“각하께서 저리 심기가 좋지 않으신 이유 말입니다. 처음에는 사람 많은 곳이라 불편해하시는 줄 알았습니다만. 이제 보니 질ㅌ…….”
“시끄럽다, 리챠드.”
먼저 현관으로 들어서던 이든이 걸음을 멈추고 툭 쏘아붙였다.
역시 우리 사자님, 눈치 한번 빠르시다니까.
꽤 먼 거리에서도 본인 얘기를 하고 있다는 걸 용케도 아셨다.
“내일 신문 1면도 우리 아가님께서 거뜬히 장식하시겠습니다.”
“귀찮은 인간들만 꼬이겠군.”
진저리를 치는 이든의 옆으로 리챠드가 쪼르르 달려갔다.
“그래도 처음 계획하셨던 바대로 비스 귀족들에게 영향력을 끼칠 기반을 다지게 된 셈 아닙니까?”
“……애를 이용해서 목적을 이룰 생각은 없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가님께서도 다 알고, 이해하고 계실 테니. 그렇지요, 아가님?”
리챠드가 동의를 구하듯 내게 넌지시 시선을 던졌다.
나도 그들의 곁으로 포르르 달려가며 힘차게 대답했다.
“녜, 당연하죠! 백쟉밈께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기뻐여!”
“…….”
나보다 앞서 걸어가던 이든이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그 바람에 단단한 종아리에 이마를 콩 부딪치고 말았다.
아야야야.
나는 양손으로 이마를 부여잡고서 이든을 올려보았다.
그는 여전히 목석같이 서 있었다.
“백쟉밈…….”
바짓단 끝을 조심스레 붙잡으니 이든이 천천히 돌아섰다.
어두운 낯빛이었다.
내게 별말을 하지 않았지만, 크게 내뱉는 들숨 날숨의 굵은 마디마디를 통해 감정이 전해졌다.
아무래도…….
미로 정원의 일 때문이겠지?
“……아직도 화나셔써요?”
“다음부터는 그렇게 무턱대고 혼자서 돌아다니지 마라.”
역시, 맞았네.
낮의 일이 떠올랐다.
내가 나쁜 놈들로부터 간신히 도망쳐 미로 정원의 개구멍을 엉금엉금 기어 나왔을 때.
그때 이든의 눈을 통해 전해졌던 감정이 아직도 선연했다.
많이 놀랐고, 화가 났으며 결국에는 안도하는…….
그는 그 복합적인 감정의 덩어리를 고스란히 삼킨 채, 묵묵히 엉망인 내 드레스부터 갈아입혀 줬다.
지금은 그때 참았던 감정이 터져 나올 시간이었다.
“혹시라도 그곳에 있었던 게 발각됐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백쟉밈께 도움이 될 것 같아서…….”
“필요 없다.”
단칼에 말이 잘렸다. 아마 그 순간 내 심장에 묶여 있던 무거운 추도 함께 잘려 나간 것 같다.
쿵, 떨어진 마음이 머릿속을 새하얗게 만들었다.
너무 오지랖을 부린 걸까.
애꿎은 손톱 끝만 만지작거렸다.
“죄송함미다…….”
겨우 쥐어짜 낸 목소리는 거의 기어들어 가다시피 했다.
푹 고개를 숙였다.
“…….”
“…….”
땅에 박혀 있는 내 시야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내 이든이 내 허리를 잡고 나를 번쩍 들어 올렸다.
“위험한 짓을 하면서까지 네 가치를 내게 증명할 필요 없다는 뜻이다. 넌 내 딸이니까.”
넌 내 딸이니까.
넌 내 딸이니까.
넌 내 딸이니까.
동굴 속도 아닌데, 그의 말이 메아리처럼 귓가에 반복해서 들렸다.
생경한 기분이 들었다.
‘단어에도 온기가 느껴질 수 있는 거구나.’
나는 이든의 목을 꼬옥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걱정 끼쳐서 진쨔 진쨔 죄송해요, ……아빠.”
커다란 손이 내 등을 토닥였다.
“아까 얘기하던 도중에 폐하께서 오시는 바람에 다 말씀드리지 못한 게 이써요.”
“무엇이지?”
“귀족들이 말하던 검투장 있자냐요.”
다정한 토닥임이 멈추었다.
“위험한 일에는 관심 두지 말라니까.”
“그곳에 제 도움이 필요한 수인이 있써요. 그대로 두면 실험체로 쓰이게 될 꼬에요.”
“도울 방법을 알아보겠다.”
“안 돼요. 그 수인을 구할 방법은 저만 알고 이써요.”
“기어이…….”
짧은 한숨이 들려왔다.
하지만 물러서면 안 됐다.
웨인투르 일을 모른 척 넘겼다가는 나중에 적으로 만나게 될 운명이었으니까.
‘다른 건 몰라도 웨인투르 에피소드만큼은 바꿔야 해.’
당장 가까운 관점에서 봤을 때는 다페 남작의 힘을 불리는 역할을.
먼 관점으로는 리아노 공작의 명령대로 동족을 학살하다 못해, 끝내 이든에게 칼끝을 들이밀게 되는 역할을 하는 웨인투르의 운명을 바꿔 줘야만 했다.
‘제3자의 입장에서 소설로 읽었을 때도 끔찍했는데. 자아를 뺏기고 살상 무기로 이용당해야 하는 당사자의 심정은 얼마나 더 끔찍하겠어.’
무엇보다 나는 아픔을 가진 캐릭터들이 더 생기길 원치 않았다.
“이번 한 번만요. 위험한 일이 있으면 혼자 움직이지 않을께여.”
“…….”
“어떻게 될지 뻔히 알고 있는데 모르는 척 외면할 수 없써요. 꼭 구해 주고 시퍼요.”
간절한 마음이 그에게 닿은 걸까.
이든이 소중한 것을 품듯 내 뒷머리 전체를 감싸 끌어안으며 읊조렸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허락해 주셔서 감사함미다, 아빠!”
“무슨 일이 있을 것 같으면 내게 제일 먼저 얘기하고.”
“녜! 약속하께여.”
나는 이든과 새끼손가락까지 걸고 약속 도장을 찍었다. 그제야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평화도 잠시, 프로스트 남작이 사색이 된 얼굴로 복도를 가로질러 왔다.
“각하!”
“무슨 일이지?”
이든이 나를 한쪽 팔로 안은 채 프로스트를 노려봤다.
“아무래도 내일 일찍 츄르 가게에 나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츄르 사업 관련된 일은 리챠드와 상의해서 처리하라 했을 텐데.”
귀찮아하는 말투였다.
표정만 봐도 이든의 생각이 읽혔다. 적당히 프로스트를 쫓아내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이든은 그를 쫓아낼 수 없었다.
“피헨느 씨가 다쳤습니다.”
내 마음도 함께 철렁였다.
* * *
우리는 날이 밝자마자 츄르 상점이 있는 메인 스트리트로 향했다.
츄르 상점을 개업한 지도 제법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이렇게 직접 상점에 온 건 처음이었다.
‘실제로 보니까 더 근사하네.’
그동안은 이든의 걱정 때문에 서류로만 보고받았던 게 전부였다.
그렇기에 마침내 도착한 츄르 상점의 외관은 내게 너무나도 신기하게 느껴졌다.
내가 골랐던 출입문의 디자인이라든가 로고, 입구 카페트 등등…….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눈에 담고 있는 내게 이든이 말했다.
“그렇게 신기한가?”
“직접 보는 건 처음이니까여.”
이든이 피식, 작게 웃으며 문을 열어 주었다.
“그럼 들어가도록 하지.”
“녜!”
문을 열고 들어가자 상점 문 밖에 걸린 휴무 팻말이 흔들렸다.
개인 사정상 하루 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