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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49/142)

49화

밖을 기웃거리는 손님들을 상대하고 온 리챠드가 때마침 상점 안으로 들어왔다.

“그게 다 뭡니까?”

“흉터 치료에 죠은 약초래요.”

리챠드는 테이블 위에 펼쳐진 약초 보따리를 유심히 살폈다.

“이 많은 양을 구하려면 제법 애 좀 먹었겠습니다. 한데, 왜 그걸 각하께 들이밀고 계시는 건지…….”

“아빠도 있쟈나요, 여기.”

나는 이든의 눈가에 선명히 자리 잡은 흉터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곳에 손끝이 닿자, 생각을 읽을 수 없는 호박색 동공이 내게 고정됐다. 금빛 호수가 온통 나로 가득 찼다.

“각하를 생각하시는 아가님의 마음은 갸륵합니다만, 그 약초는 잎사귀에 독성이 있어서 생으로 먹으면 해롭습니다.”

“정말여?”

헉. 헛숨을 들이켰다.

리챠드가 아니었더라면 큰일 날 뻔했잖아?

이든에게 먹이기 전 알게 되어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약초를 도로 제자리에 두려고 했는데, 커다란 손이 불쑥 튀어나와 그걸 집어갔다.

“네. 올바른 섭취 방법으로는 뿌리만 따로 모아 찬물에 30분 정도 담가 둔 뒤 섭취해야…… 각하?”

응?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든이 그 풀떼기를 덜컥, 입에 넣어 버리고 만 것이다.

‘미쳤어!’

나와 리챠드는 동시에 벌떡 일어섰다.

“아버어어엄!”

“각하!”

그의 양팔을 한쪽씩 각각 부여잡고 말리려고 했으나, 잠시 우물우물하던 그가…….

꿀꺽.

기어이 삼켜 버리고 말았다.

미쳤어!

“얼른 뱉으십시오!”

“싫다.”

“그냥 생으로 먹으면 독이 있다니까요?”

“아니까 잔소리 그만해.”

“지금 제가 잔소리 안 하게 생겼습니까?”

이든은 결단코 뱉지 않겠다는 듯, 입술을 다물었다.

“각하. 이런 말씀 드리기 뭐하지만, 미치셨습니까?”

“뭐?”

“그렇지 않고서야, 어릴 적 약초 잘못 드시고 생고생하셨던 기억을 잊으셨을 리가 없으신데…….”

“기억나. 그걸 어떻게 잊어, 한 달 내내 개고생했던 걸.”

“개고생이라는 워딩은 저의 여린 마음에 상처입니다만.”

가련한 포즈로 가슴에 손을 얹은 리챠드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찌 됐건, 도로 뱉으세요.”

“안 돼.”

“왜입니까?”

“내 딸이 내게 준 첫 약초다.”

말투가 너무 떳떳해서 순간 어안이 벙벙해졌다.

어쩌다 우리 사자님께서…….

첫 만남 때의 살벌하고 위엄 있던 이미지는 희미한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진짜 미치셨군요.”

리챠드가 혀를 찼다. 마치 이든을 향해 ‘지독하십니다, 각하’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든은 그런 리챠드를 단 한마디로 제압했다.

“관짝 맞추고 싶다고?”

“참으로 지당하신 선택입니다. 본디 딸이 준 첫 약초는 당연히 먹어 치워야지요.”

리챠드의 표정이 단번에 변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방긋방긋 웃으며 태세 전환하는 모습이 어쩐지 눈물겹게 느껴졌다.

“아가님께서 설사 흙을 선물해 주신다고 하더라도 퍼먹어야 하는 게 인지상정이지 않겠습니까? 암, 그렇고 말고요. 하, 핫! 핫! 핫!”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웃음까지 도맡아 가면서 필사적으로 아부하는 리챠드가 애잔했다.

사자님의 집사로 사는 삶이란 쉬운 게 아니구나…….

나는 속으로 조용히 리챠드의 안녕을 빌어 줬다.

* * *

이든이 덜컥 약초를 생으로 삼켜 버린 지 정확히 한 시간 뒤.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가, 차츰 입술이 창백하게 변하기까지 했다.

“백쟉밈, 얼굴이 창백해요.”

“……괜찮다.”

전혀 안 괜찮아 보이시는데요.

반쯤 감긴 눈 밑이 퀭한 것이 조금 더 있으면 쓰러질 것만 같았다.

보다 못한 리챠드가 일어섰다.

“해독초를 사 오겠습니다.”

“저도 가께요.”

덩달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 사태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있어서였다.

“나도 가겠다.”

이든도 우리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처럼 비틀거리는 모양새가 영 불안했다.

“각하께선 얌전히 앉아서 기다리는 게 도와주시는 일입니다.”

“마쟈요.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오또캐…… 안색이 너무 안 죠으셔.”

리챠드와 나란히 이든의 양팔을 부여잡고서 그를 도로 자리에 앉혔다. 고집부릴 기운은 없었는지 다행히 그가 순순히 따라 주었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휴식 취하시는 겸, 고객 서비스도 좀 하고 계십시오.”

“고객, ……뭐를 하라고?”

이든의 되물음에 리챠드는 유리창 너머를 가리켰다.

“문 앞에 여인들 줄 서 있는 거 보이십니까?”

“밖에 휴무 팻말을 걸어 둔 거 아니었나?”

“걸어 두었죠. 한데 저분들 목적은 츄르를 사러 오신 게 아니라 하십니다.”

그럼 뭘 하러 온 거야?

이든과 나는 삼삼오오 모여서 문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여인들을 보고 눈썹을 까닥, 들어 올렸다.

“모두 각하를 보러 온 거랍니다.”

리챠드는 친히 제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설명을 덧붙였다.

아하.

의문이 단숨에 풀렸다.

우리 사자님 얼굴 보려고 몰려든 거구나.

“또 쓸데없는 짓을 꾸민 건가?”

“섭섭한 오해입니다만.”

리챠드가 방긋 웃으며 이든 앞에 물 잔을 내려놓았다.

“딱 지금 그대로 그림같이 앉아만 계시면 됩니다. 휴식 취하시면서 상점 홍보도 덩달아 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자리죠.”

이든이 앉은 곳은 햇볕이 잘 드는 창가 자리였다. 창문 너머로 여인들의 감탄 소리가 들려왔다.

“필요 없으니까 어서 나갈 채비나 해.”

“안 됨미다!”

나는 꾸역꾸역 다시 몸을 일으키려는 이든을 붙잡았다.

“여기서 기다리고 계세여. 리챠드랑 빨리 다녀올께여.”

“저 똥개 놈의 장단에 맞춰 줄 생각 없다.”

이든이 째려보자, 리챠드는 ‘억울합니다만.’ 하며 입을 벙긋거렸다.

기어이 따라나설 생각인가 보다.

그러다가 몸 상태가 더 심해지면 어쩌시려고.

하는 수 없이 비장의 수를 쓰기로 했다.

“올 때 선물도 사 오께요. 녜?”

“……선물?”

이든의 눈썹이 꿈틀, 반응을 보였다.

나는 냉큼 새끼손을 내밀었다.

“녜. 약속하께요. 그러니까 혼자서도 잘 기다리실 수 있찌요?”

물끄러미 내 손을 내려다본 그가 새끼손가락을 마주 걸었다.

“……약속했다?”

“녜. 도장 콩!”

엄지손가락 도장까지 꾹 찍고 나서야 이든은 제자리에 다시 앉았다.

* * *

그로부터 40분 후. 나는 아직도 메인 스트리트 한복판에 있었다.

앞서 걷던 리챠드가 장신구 가게에 우뚝 멈춰 섰다.

벌써 이 골목에서만 세 번째였다.

그는 매대에 놓인 보석 박힌 붉은 리본을 덥석 집어 들었다.

“이 머리 장식은 어떻습니까? 아가님께 참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만.”

“리챠드, 오늘 이미 충분히 많이 산 것 같은뎨.”

리챠드의 두 손에 들린 짐이 한가득이었다. 여성용 부티크가 모여 있는 골목을 지나오면서 드레스며 액세서리를 죄다 산 탓이었다.

“짐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택으로 배달시키면 되는 문제니까요.”

“아니 그게 아니라…….”

“자, 어떠십니까?”

그가 리본을 내 머리에 대보며 손거울을 들이밀었다. 워낙 고가의 장신구라 그런지 거울에 비친 모습이 반짝반짝, 눈부시긴 했다.

“예쁘기는 한뎨…….”

“역시 그렇지요? 이 리본 말고도 저거, 그리고 저어기에 저것도 아가님과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리챠드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어째……, 불안한데?

그가 비장한 얼굴로 부티크의 문을 열어젖혔다.

“안 되겠습니다.”

“자, 쟘깐!”

말릴 새도 없이 리챠드의 외침이 부티크 골목에 울려 퍼졌다.

“주인장.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다 주시게!”

“리챠드으!”

“자, 이번엔 저쪽 부티크의 드레스도 싹 쓸어 볼까요?”

나는 더 불어난 짐을 바리바리 싸 들고서 반대쪽 부티크로 들어가려는 리챠드의 앞을 막아섰다.

“리챠드 혹시 잘렸써요?”

“예?”

사자님께 퇴직금이라도 받은 게 아니라면 대체 어디서 이 많은 돈이 난 거냐고!

“혹 제 지갑 걱정을 해 주시는 겁니까? 그런 거라면 마음 놓으셔도 됩니다. 요즘 제게 돈 나올 구멍이 생겨서 말입니다.”

리챠드가 음흉하게 웃었다.

……괜히 찝찝한 기분이 드는 건, 느낌 탓일까?

“백쟉밈 드릴 해독초는 언제 사러 가는 곤데요?”

“아, 해독초를 파는 상점은 반대쪽 골목에 있습니다.”

“그럼 얼른 거기로 가여.”

끙끙, 리챠드의 옷을 잡아끌었다.

“각하께 드릴 선물은 아직 안 골랐습니다만.”

선물이고 나발이고. 조금만 더 있었다가는 아예 부티크 골목 통째로 사겠다고 나설 기세였다.

“얼른여, 얼른.”

나는 아직 방문하지 못한 부티크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리챠드의 등을 끙차끙차 떠밀었다.

“백쟉밈이 기다린다구여.”

겨우겨우 부티크 골목을 탈출한 우리는 해독초를 구입해 츄르 상점이 있는 메인 스트리트에 도착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오전보다 상점 주변에 모인 구경꾼들이 많았다.

리챠드가 그 광경을 보고 ‘오!’ 감탄사를 뱉었다.

“각하께서 고객 서비스를 예상외로 잘 해내고 계신가 봅니다.”

그럴 리가.

이든의 성격상 구경꾼들을 쫓아내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나는 구경꾼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세상에 저걸 어째…….”

“부서진 곳 수리한다고 당분간 또 휴무겠구먼.”

……부서져?

구경꾼들은 일제히 같은 곳을 바라보며 혀를 쯧쯧 찼다.

‘우리 츄르 상점이?’

불안함이 커졌다.

내 발걸음은 점점 더 빨라졌다.

마침내 사람들 틈에서 빠져나온 나는 츄르 상점의 상태를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문짝은 부서져 있었고, 창문도 죄다 박살 나 있었다.

“!”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누군가가 한바탕 횡포를 벌인 듯한 흔적들이었다.

‘아빠는?’

빠르게 눈을 굴려 이든을 찾았다.

그가 보이지 않았다.

걱정으로 불타고 있는 마음에 누군가 기름을 뿌렸다.

“다페 남작님이 왔다 갔는데 이 정도면 그나마 다행인 게지.”

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오로지 한 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아빠아아!”

나는 그렁그렁해진 눈으로 잔뜩 어질러진 츄르 상점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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