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폴과의 만남 이후, 우리는 매일 같이 계획을 짰다.
작전 회의 시간은 조찬 때였다.
이든은 매 식사 시간 동안 내가 간밤에 생각해 둔 전략에 대해 듣고 피드백을 해 주었다.
오늘은 여섯 번째 회의였다.
톡 톡 톡 톡…….
테이블 위를 일정한 간격으로 두들기던 이든의 손가락이 멈췄다.
“그 사진술사를 돕겠다는 게 네 결론인가?”
“다페 남작의 비리를 밝힐 결정적인 증거를 잡는다면 이번 작전은 거의 성공한 거나 다름없써요.”
“그거야 어렵지 않지. 굳이 들춰 보지 않아도 썩어 빠진 소굴이니까.”
“그러니까 더더욱 우리한테 이번 일이 큰 기회라는 소리에여.”
눈을 빛내며 강력히 주장했다.
몬조거 다페 남작이 운영하는 검투장은 승부 조작과 승패 결과 정보 뒷거래, 입장권 암거래 등 온갖 불법이 난무하는 곳이다.
‘즉, 넘치는 게 결정적인 증거라는 소리지.’
다페 남작은 꿈에서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지금 자신의 세력을 키워 주고 있는 것이, 곧 칼이 되어 자신의 목을 노릴 거란 걸.
“이번 작전으로 다페 남쟉 세력이 크게 휘청할걸요?”
제가 장담할게요.
손수 작전을 적어 온 종이를 그에게 내밀었다.
기민한 맹수의 눈동자가 빼곡하게 적힌 내용을 신속히 훑었다.
“최근, 다페 남작가가 검투장 성장을 기반으로 세력을 넓히고 있다는 보고를 받긴 했다. 네 말대로 이 작전이 성공만 한다면 다페 남작가를 견제할 수 있겠지. 한데 말이다.”
중도에 말을 끊은 이든이 종이를 내려놓았다.
여느 때보다 신중한 목소리였다.
“비리를 밝히는 건 어찌저찌할 수 있다고 쳐도, 그게 검투장 폐쇄까지 이어질 수 있느냐가 관건인 것 같은데.”
“그래서 작전의 핵심 포인트도 쥰비해 왔슴미다!”
나는 작전 종이 위, 별을 왕창 그려 놓은 중요 부분을 가리켰다.
이든의 시선이 그리로 향했다.
<관계 와쟝창 쟉전>
그가 맞춤법이 엉망인 글씨를 소리 내어 따라 읽었다.
“관계…… 와장창 작전?”
“이 작전의 맹점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져.”
나는 이든이 어떤 부분을 걱정하고 있는 줄 알고 있다.
‘다페 남작가의 비리를 밝힌다고 한들, 그냥 묻힐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겠지.’
물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중앙 권력에 줄을 대고 있는 다페 남작에게는 모리스 대신관이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으니까.
언론 통제와 매수, 그리고 협박.
비스의 세도가들은 온갖 비리를 일삼으며 지금껏 강건히 지내 왔다.
하지만 말이야…….
빌런 놈들아, 니들이 그렇게 쌓아 올린 권력이 언제까지 영원할 거라고 생각해?
나는 그 틀을 다 때려 부술 생각이었다.
이번 작전이 바로 그 시초였다.
“세도가 세력의 연합을 깨 버린다면 우리의 계획대로 될 수 있써요.”
“그들의 연합을 깬다, 라……. 그게 가능만 하다면야 좋은 시나리오가 되겠지만. 무슨 수로?”
“똑같은 방법을 사용할 꼬에요.”
“똑같은 방법?”
이든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나는 입꼬리를 씨익 끌어올리며 입술을 열었다.
“언론 통제, 매수, 협박.”
“……뭐?”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인 법이져.”
“대체 무슨 생각을…….”
적잖이 충격받았는지, 호박색 동공이 잔뜩 확장되어 있었다.
‘놀라게 해서 죄송하지만, 이 정도 가지고 벌써 놀라시면 안 되죠.’
복수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권모술수가 악당들의 전유물이라는 편견을 깨 주마.’
우리라고 못 할 것은 없었다.
“통제당한 언론을 되찾을 묘수가 저한테 있써요.”
“매수……를 할 생각인가?”
“필요하면 협박도 해야져.”
이든의 입술이 다물렸다.
“혹쉬, 마음 약해져서 못 하실 것 같다면 미리 말씀해 쥬세요.”
“……그럴 리가.”
“잔악무도한 검투장 문화의 단면이 공론화되면, 아무리 다페 남작이라도 빠져나갈 수 없을 꼬에요.”
세상에 영원한 건 없는 법이다.
특히나 얄팍한 수로 관계를 유지하는 인간들 사이라면 더더욱.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그렇다면 가장 관건은 그 사진술사가 네 말을 믿고 검투장 입장권을 구해다 주느냐, 겠군.”
일주일 전, 폴은 ‘정의로운 기사를 쓸 수 있게 도와주겠다’는 내 제안을 곧장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고, 여태껏 연락이 없었다.
때문에 이든은 ‘폴이 우리와 손을 잡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경우의 수까지 고려하는 듯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폴은 반드시 도와줄 꼬예요.”
때마침 앞접시를 가지러 갔던 리챠드가 다이닝 룸에 돌아왔다. 손에는 처음 보는 봉투가 들려 있었다.
“아가님, 사진술사 폴로부터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폴은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마침내 작전을 실행할 때가 왔다.
* * *
평화로운 주말 오후, 수도 비스에서 조금 떨어진 교외는 열기로 달아오르고 있었다.
이곳을 방문한 이들은 저마다 돈주머니나 보석함 따위를 든 채였다.
“붉은 주먹! 붉은 주먹!”
열띤 함성이 들려왔다.
그 근원지는 대장간이 즐비한 골목길 중앙에 우뚝 솟은 건물이었다.
‘진짜 엄청난 인기네.’
나는 주변 풍경을 눈에 담았다.
검투장 입구에는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이들이 줄 서 있었다.
우리도 그중 하나였다.
이든과 나는 다른 이들처럼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차례를 기다렸다.
드디어 우리 차례가 왔다.
“입장권을 보여 주십시오.”
이든이 입장권 두 장을 꺼냈다.
기계적으로 입장권을 확인한 후, 출입문을 열어 주던 직원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의 시선이 이든의 품 속에 안긴 내게 닿아 있었다.
“죄송합니다만, 어린아이는 입장이 불가합니다.”
불법으로 운영하는 주제에.
나름의 규칙까지 있는 모양이다.
‘이럴 줄 알고 두둑하게 챙겼지.’
나는 대꾸하지 않고 미리 준비한 가죽 주머니를 직원에게 내밀었다.
“…….”
직원은 선뜻 움직이지 않았다.
‘덥석 받을 줄 알았더니. 의외네.’
물론 그래 봤자였다.
한번 물욕에 마음을 뺏긴 자에게는 절대로 피할 수 없는 덫일 테니까.
나는 조용히 주머니를 열어 보였다.
그 안에는 값비싼 다이아몬드가 수북하게 들어 있었다.
‘이래도 안 넘어올래?’
직원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다이아몬드 주머니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재빨리 주변을 경계하는 두 눈동자가 그 증거였다.
그럼 그렇지.
나는 직원이 덫에 걸렸음을 확신했다.
“어린애가 어디 있다는 건지 모르겠군.”
이든이 태연한 투로 말했다.
그러면서 내가 들고 있던 다이아몬드 주머니를 가져가 흔들어 보였다.
꿀꺽.
직원의 침 삼키는 소리가 생생했다.
‘우리 사자님, 매수 실력이 장난 아니신데?’
굳건히 앞을 막아서고 있던 직원이 슬쩍 옆으로 비켜섰다.
“……제가 잘못 본 것 같습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마침내 우리는 검투장 안으로 들어섰다.
건물 안은 어두컴컴했다.
눅진한 어둠이 조금씩 우리를 집어삼켰다.
이든이 품 안의 내게 물었다.
“오기 전에 했던 말, 기억하나?”
“녜. 말없이 사라지지 말 것, 위험한 것 같으면 일단 도망갈 것.”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잔소리라 자동으로 술술 나왔다.
또랑또랑한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그가 부드러운 손길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작전 성공보다 중요한 건 네 안전이다.”
그는 거듭 강조한 끝에 관객석으로 들어섰다.
경기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와아아아!”
“싸워! 때려눕혀!”
“일어나! 공격해!”
가면을 쓴 관객들은 손에 나무를 깎아 만든 패를 들고서 고함을 질러 댔다.
패에는 오늘 경기에 참가한 검투사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저 패로 돈내기를 하는 건가 봐여.”
“구매는 저쪽에서 하는 것 같군.”
이든이 경기장 옆에 붙어 있는 창구를 향해 턱짓했다. 창구 앞은 돈다발을 든 사람들이 잔뜩 몰려 있었다.
“이봐, 빨리 바꿔 줘!”
“어느 쪽에 거실 겁니까?”
“붉은 주먹에게 올인하겠어!”
검투사들의 이름이 적힌 패가 어마어마한 금액으로 거래됐다.
‘……다페 남작,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챙겼겠는데?’
오가는 금액을 눈대중으로만 가늠해 봤을 때도 엄청난 규모였다.
‘이번 작전이 성공하게 되면 타격이 크겠어.’
아마 다페 남작은 당분간 재기하기 힘들 것이다.
생각을 정리하며 이든과 함께 검투장 내부를 살피고 있는데, 낯선 이가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처음 오신 모양입니다?”
그는 이곳의 여느 관객들처럼 가면을 쓰고 있었다.
“제 경험상, 이곳에 멋모르고 어린애를 데리고 오는 사람은 대부분 처음 온 사람들이거든요.”
“…….”
“그리고 보통은 도착하자마자 패부터 사니까요.”
그가 손에 쥔 패를 흔들어 보였다.
<붉은 주먹>
웨인투르에게 돈을 건 자였다.
‘붉은 주먹’은 인간들이 웨인투르에게 멋대로 붙여 준 별명이었다.
“아, 저는 붉은 주먹에게 걸었습니다. 이 녀석이 요즘 지지부진하지만, 도저히 역배는 못 참겠어서.”
이든은 답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남자는 묻지도 않은 것에 대해 술술 뱉어 댔다.
“이따 경기 보고 놀라지 마시라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뭐에 놀란다는 거지?”
“실은 말입니다. 붉은 주먹, 이놈이 수인이거든요.”
“…….”
이든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반응이 재밌었는지, 사내가 하하하 웃음을 터트리며 말을 이어 갔다.
“아시다시피 수인 검투사는 흔치 않아서 인기가 많습니다. 게다가 이놈이 특이한 게, 검투사 주제에 검을 안 씁니다.”
“검 대신 맨몸으로 싸우쟈나요.”
나는 사내의 말을 가로챘다.
잠자코 있지 않았던 건 웨인투르를 희화화하는 걸 듣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건…… 아빠의 마음이 아픈 일이니까.’
가면 사이로 보이는 사내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이거, 이거……. 이렇게 어린 아가씨가 그 녀석에 대해 알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럼 그 소문도 알고 계실는지 모르겠군요.”
“무슨 소문이여?”
“붉은 주먹 그 녀석이 얼마 전부터 음식을 거부하고 있답니다.”
“!”
미친 소리였다. 체력이 중요한 검투사가 식음을 전폐하다니.
사내는 얼음처럼 굳어 있는 우리에게 비밀을 속삭이듯 목소리를 낮췄다.
“항간에는 그놈이 죽기만을 기다리는 건 아니냐는 말도 돌더라고요.”
“……뭐?”
그 순간, 관중석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 소리가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
가면을 쓴 이들이 관중석 펜스에 달라붙어 한마음으로 ‘붉은 주먹!’을 외쳐 댔다.
“마침 나오네요.”
경기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관중들의 환호 속에서 깡마른 여인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웨인투르 후크…….’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태로운 걸음걸이였다.
하지만 검투장 안의 누구도 그녀의 상태에 관해 눈곱만큼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싸워! 빨리 상대를 때려눕혀!”
그들에게는 오로지 그녀가 안겨 줄 승리만이 중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