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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52/142)

52화

마지막을 장식하는 경기답게 관중석의 반응은 뜨거웠다.

“붉은 주먹! 얼른 공격해!”

“주먹맛을 보여 주라고!”

관중의 생각은 오로지 하나였다.

붉은 주먹에게 건 자신의 돈.

그들은 그녀가 이번 경기에서 승리할 시 손에 넣게 될 액수에 대해 생각하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저러다가 진짜 쓰러지게써요.”

“……빌어먹을.”

이든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 넓은 검투장에서 그녀를 걱정하는 것은 나와 이든뿐이었다.

“경기 시작!”

심판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광기 넘치는 응원 속에서 웨인투르는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얼마나 굶은 건지.

그녀가 늘 끼고 경기에 임했을 빨간 장갑이 헐렁할 정도였다.

‘어떡해.’

상대는 검을 든 사내였다.

철 투구와 갑옷으로 전신을 두르고 있어 빈틈이 없어 보이는 그와는 달리, 바싹 마른 웨인투르는 맨몸이었다.

‘이건 너무하잖아.’

누가 봐도 불리한 조건이었다.

아무리 그녀가 수인이라고 한들, 체격 차이도 두 배는 났다.

음식도 거부하고 있다니까 체력에서도 밀릴 터였다.

스릉!

상대 검투사가 검을 뽑아 들었다.

“흐아아압!”

이내 큰 기합 소리와 함께 웨인투르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녀는 여전히 무기력하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쉬이이익!

검은 망설임 없이 허공을 갈랐고, 순식간에 둘의 거리가 좁혀졌다.

피하지 못한다면 끝장이었다.

“안 돼!”

나도 모르게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때였다.

목석같이 굳어 있던 웨인투르의 다리가 움직인 것은.

파앗!

그녀가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

실로 엄청난 운동신경이었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점프력과 스피드였다.

카아앙!

사내의 검은 아무것도 썰지 못한 채 애꿎은 벽에 박혀 공명했다.

“와아아! 역시 붉은 주먹!”

관중들이 더 크게 열광했다.

사뿐히 바닥에 착지한 그녀가 상대를 향해 돌아섰다.

“좋았어! 이제 본때를 보여 줘!”

분위기가 잔뜩 가열됐다.

“붉은 주먹의 승리야!”

……아니, 틀렸어.

‘오늘 붉은 주먹은 경기에서 패배할 거야.’

모두가 인간을 뛰어넘는 피지컬을 가진 수인 검투사의 승리를 예감할 때, 오직 나만이 그녀의 패배를 예상했다.

머지않아 내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가까스로 버티고 있던 두 다리가 휘청, 중심을 잃더니…….

“뭐야. 쟤 왜 저래?”

쿵!

그녀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

순간 관객석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런 망할!”

“제길! 일어나! 네놈한테 건 돈이 얼마인데!”

비난과 야유가 날아들었다.

심판이 다가가 그녀의 상태를 살피며 카운트다운을 했다.

“10, 9, 8, 7…….”

숫자가 점점 줄어들었지만,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의식을 아예 잃은 듯했다.

……5, 4, 3, 2, 1.

끝내 그녀는 일어서지 못했다

“웨인투르 패배!”

심판의 외침이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젠장! 내 돈!”

관객들은 격분했다.

개미 떼처럼 바글바글했던 관중들은 경기가 끝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검투장을 빠져나갔다.

“에라이, 씨!”

개중에는 경기장을 향해 침을 뱉고 나가는 이도 있었다.

텅 빈 경기장은 고요해졌다.

웨인투르는 쓰러진 그대로 방치되었다.

‘진짜 다들 너무해.’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화를 삭이는 건 이든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가까이 가게 해 쥬세요. 전해 주고 싶은 게 이써요.”

이든은 나를 안은 채, 관중석 계단을 내려가 경기장으로 들어섰다.

가까이서 본 웨인투르는 너무 앙상하다 못해 잘못 만졌다가는 모래처럼 부서질 것만 같았다.

입 안이 썼다.

왜 이렇게까지 그녀가 자신의 몸을 혹사시키는지.

그리고 어째서 음식을 거부하고 있는지.

나는 그 모든 이유를 알고 있었기에 더욱 마음이 아팠다.

“너무 말라써…….”

“당장에라도 이 썩어 빠진 곳을 만든 놈과 이딴 역겨운 짓을 놀이처럼 즐기는 놈들을 다 부숴 버리고 싶다.”

이든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나는 가늘게 떨리고 있는 이든의 어깨를 꼬옥 안아 주었다.

“……저듀요. 저듀 당장이라도 나쁜 사람들이 벌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아빠…….”

“안다. 지금은 참아야 하는 거.”

그가 깊은숨을 내뱉었다.

간신히 눌러 담은 분노가 숨결에 깃들어 있었다.

‘지금 당장 웨인투르를 데리고 도망칠 수는 있겠지.’

그렇지만 그건 임시 해결책일 뿐.

언젠가는 또 웨인루트와 같이 고통받는 이가 생길 터였다.

‘그 굴레를 끝내려면 아예 뿌리째 뽑아내야 해.’

나는 챙겨 온 츄르를 꺼냈다.

“조금만 버텨 죠요, 웨인투르.”

우리가 꼭 구하러 올 테니까.

츄르를 쓰러져 있는 그녀의 손에 쥐여 주며 속삭였다.

“거, 물건에 손대지 마시고 나오십쇼.”

경기장의 뒷정리를 하러 온 직원의 외침으로 인해 우리는 검투장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 * *

응접실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나는 라이언하트 저택으로 돌아온 이후로 줄곧 사진용 마도구만 만지작거리는 폴에게 질문했다.

“폴. 쓸 만한 건 건져써요?”

“사진은 여러 장 찍어 두긴 했는데…….”

그가 자신감 없이 사진을 꺼냈다.

검투장의 모습이 잘 담겨 있었지만 딱히 결정적인 증거로 쓰일 만한 것은 없었다.

“다페 남작님은 신분 높으신 분들 외에는 만나 주지 않더라고요. 죄송합니다.”

“폴이 잘못한 건 아닌걸여.”

“제가 중요한 역할을 맡은 거나 다름없었는데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어요.”

그다지 실망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평민인 폴이 다페 남작과 접점을 만드는 건 어려운 거긴 했어.’

나는 첫 방문을 탐색전이라고 생각했다.

미리 적을 파악하는 것은 작전의 성패를 좌우할 만큼 중요한 것이다.

그렇기에 마냥 소득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덕분에 어떤 민낯을 만천하에 까발려야 할지 머릿속에 대충 그림이 그려졌으니까.

하지만 폴은 많이 상심한 듯 보였다.

“어쩌면 애초부터 정해진 결과일지도 몰라요.”

“모가요?”

“겨우 평민인 주제에 비리를 밝히겠느니 뭐니 한 것부터가…… 제 주제도 몰랐던 거죠.”

조그마한 어깨가 잔뜩 처졌다.

햇살 같은 미소가 사라진 곳에는 그늘이 져 있었다.

아직 여린 그에게는 한 번의 실패도 큰 좌절로 와닿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의 앞으로 가서 섰다.

“입장권을 한 번 더 구해 죠요.”

“하지만 제가 또 실패하게 된다면…….”

“제가 물은 건 성패 여부가 아니에여.”

“…….”

작게 떨리고 있는 폴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원래 모든 일에는 각자의 역할이 있는 법이에여. 입장권을 구해 쥬는 건 오직 폴만이 할 수 있는 일이구요.”

“아가님…….”

“폴이 멋지게 폴의 몫을 해 주면, 우리듀 우리 몫을 잘 해낼게여.”

메마른 눈동자에 서서히 생기가 차올랐다.

꺼진 불씨에 다시금 불이 붙었고, 그것은 이전보다 더 큰 화력으로 타올랐다.

“결정적인 증거를 잡는 건 아빠랑 내가 할 테니까, 폴도 포기하지 말고 폴의 역할을 해내 쥬세요.”

“……네, 아가님! 빠른 시일 내에 입장권을 구해 드리겠습니다.”

폴이 강한 포부와 함께 저택을 떠났다.

여태껏 묵묵히 대화를 듣고 있었던 이든이 그제야 입술을 열었다.

“난 무엇을 해 주면 되지?”

그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내가 하려는 말을 알고 있었다.

“예전에 저 입양하실 때, 아빠 수업했었던 거 기억나요? 그때 막 마도구로 녹화도 했었는뎨.”

“녹화용 마도구를 구해 주면 되는 건가?”

“정답임미다.”

역시 말이 잘 통하셔.

그는 어렵지 않은 일이라 말했고, 실제로 날이 어둡기 전 내게 녹화용 마도구를 가져다주었다.

그날 밤, 우리는 다시 작전을 세웠다.

절대로 실패하지 않을, 완벽한 시나리오였다.

* * *

폴에게로부터 다시 편지가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나흘 뒤였다.

그동안 신문에는 웨인투르에 관한 소식이 끊이지 않고 계속해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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