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3/142)

53화

붉은 주먹의 설욕전 소식으로 검투장은 평소보다 많은 관중이 몰렸다.

경기 시작 전, 검투사들은 개인 대기실에서 각각 자신의 무기를 점검하고 있었다.

고작 2평 남짓의 공간.

사실 그곳은 대기실이라기보다는 감옥에 가까운 형태였다.

다페 남작은 벌집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공간을 지나 가장 열약한 대기실 안으로 들어섰다.

“이봐, 짐승.”

햇볕 한 줌 들지 않는 그곳은 검투장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검투사인 붉은 주먹, 웨인투르의 방이었다.

“오늘은 네놈 중심으로 짜 놓은 판이니 경기를 망치기만 해 봐. 좋은 꼴 못 볼 테니까.”

다페 남작이 열쇠 꾸러미를 흔들어 보이며 겁박했다.

그럼에도 웨인투르의 두 눈은 멍하니 벽만 응시할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

“감히 이 다페 남작님의 말을 무시해?”

다페는 욱하는 마음을 찾지 못하고 비아냥거렸다.

“네 딸의 시신을 수습하고 싶은 생각이 없나 보지?”

움찔.

못으로 박아 둔 것처럼 벽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이 움직였다.

‘딸아이의 시신.’

그 말 한마디에 태엽이 빠진 시계처럼 멈췄던 그녀의 시간이 움직였다.

목구멍으로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딸, ……내 딸.”

“이제야 밥값을 할 생각이 들었나? 똑바로 해. 지켜볼 테니까.”

다페 남작이 손 하나 대지 않은 배식판을 노려보았다.

‘구역질 나는 짐승 새끼.’

지난 몇 년 동안 길들여 보려고 했으나 그의 뜻대로 되질 않았다.

어떤 수를 써도 그랬다.

차라리 스스로 부러질지언정, 절대로 다페에게 복종하지 않았다.

그게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었다.

‘조금만 더 이용해 먹다가, 이용 가치가 떨어지면 버려야겠어.’

삐쩍 곯은 꼴을 보아하니 그런 날도 머지않은 듯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리아노 공작이 온다고 했던 것 같은데.’

최근 리아노 공작에게 수인을 알아봐 달라는 전갈을 받은 기억이 있었다.

마법에만 미쳐 있던 귀족이 웬일로 수인에게 관심을 갖는 거지?

뭐, 내 알 바는 아니지만.

깊이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잘하면 명망 높은 리아노 공작과 가까이 지낼 기회였으니까.

“손님을 맞이하러 가 보실까.”

다페 남작이 손을 비비며 VIP 전용 관람석으로 향했다.

* * *

혼잡한 검투장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나는 이든과 꼭 붙어 있었다.

우리는 주변을 면밀히 살폈다.

숨어서 작당을 꾸미고 있을 다페 남작을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일단 VIP 관람석 입구부터 찾아야 해여.”

내가 알기로 다페 남작은 검투장에 오는 이들을 철저히 관리했다.

작위가 높거나 정계에서 힘을 쓰는 귀족들, 혹은 여러모로 영향력이 있는 자들이 대부분 VIP로 취급됐다.

‘요즘 우리 가문의 입지라면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거야.’

문제는 그곳의 정확한 위치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정보는 VIP 전용 관람석이 ‘2층’에 있다는 것과 ‘그곳의 보안이 철저하다’는 것.

이 두 가지였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대체 이 넓은 곳에서 고작 그 정보만으로 어떻게 찾아?’ 하고 묻겠지만, 내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리 사자님이 있으니까.

나는 인간보다 월등히 뛰어난 운동신경과 감각을 가진 그를 믿었다.

“VIP 관람석은 2층에 이써요.”

“아무 계단이나 찾으면 되나?”

“아뇨. 스무 개도 넘는 계단 중에서 그곳과 이어진 진짜 계단은 하나에여.”

“일일이 확인한답시고 오르락내리락하면 의심 사기 쉽겠군.”

이든이 걸음을 멈췄다.

당장 근처에 보이는 계단만 해도 세 군데였다.

각각 계단의 입구에는 검은 옷을 차려입은 직원들이 서 있어서 어디가 진짜인지 추측하기 어려웠다.

이럴 때 리챠드가 있다면 도움이 될 텐데.

“역쉬, 리챠드랑 같이 올 걸 그랬나?”

아쉬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랬다간 추적하겠답시고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니며 냄새 맡다가 오히려 의심만 더 사고 쫓겨났겠지.”

왠지 모르게 발끈한 말투였다.

“그래도 확실하게 찾을 수 있는 방법이긴 하쟈나요.”

“……나도 할 수 있다.”

“킁카킁카로 찾을 수 있다구여?”

사자도 후각이 뛰어났던가?

물론 평범한 인간보다야 후각이 발달되어 있겠지만…….

수백 가지의 냄새를 구별해 내고, 희미한 잔향의 흔적까지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강아지 수인만큼은 정확하지 않잖아?

의아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니, 그가 퍽 자존심이 상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런 촐싹맞은 방법 말고도 있다.”

그러니까 그 방법이라는 게 대체 뭐길…….

내뱉지 못한 문장이 목구멍에 턱 걸려 비명처럼 터져 나왔다.

“흐앗!”

심장이 벌렁벌렁했다.

난데없이 나를 번쩍 안아 든 이든 때문이었다.

“모, 모에요.”

“…….”

그는 대답 대신 인적이 드문 복도의 구석으로 걸어갔다.

‘어딘지 알고는 가시는 걸까?’

사람들은 대부분 경기장 쪽에 몰려 있었다. 우리는 그와 정반대로 경기장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마침내 텅 빈 복도에 도달했다.

나무 상자는 방치된 것처럼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고 관리되지 않은 환풍구는 제 기능을 못 하고 있었다.

“여기는 왜여?”

감시하는 눈은 없었지만, 2층으로 향하는 계단 또한 없었다.

“꽉 잡아.”

네?

되묻기도 전에 그가 난데없이 나무 상자 위로 뛰어올랐다.

놀란 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으아아!”

도움닫기도 필요 없이 중력을 무시한 듯 가벼운 움직임이었다.

엄청난 점프력으로 단숨에 환풍구와 가까워졌다.

턱!

이든은 환풍구를, 나는 그의 목을 잡고 대롱대롱 매달린 상태가 됐다.

“굳이 진짜 계단을 찾을 필요가 있나? 어떻게든 2층에 가면 똑같은 것을.”

그가 낡아 빠진 환풍구를 팔뚝의 단면으로 강하게 밀치자, 마찰음과 함께 창살이 밀려났다.

터엉!

그는 열린 환풍구 위로 나를 먼저 올려 준 후, 뒤따라 올라왔다.

성인 남성에게는 꽤 비좁은 공간일 텐데도 그는 마치 굴곡 있는 컵에 흐르는 액체처럼 손쉽게 움직였다.

……아, 맞다. 우리 사자님도 고양잇과셨지.

잠시 까먹고 있던 사실이었다.

“이쪽 방향이다.”

나를 땅에 내려 준 이든이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가리켰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엉금엉금 환풍구 위를 기었다.

그렇게 얼마만큼 갔을까.

끝이 보였다.

좁은 통로가 끝나는 지점은 널찍한 공간과 이어져 있었다.

“여기가 중심부인가 봐여.”

원기둥 모양으로 뚫린 공간의 중앙에는 커다란 펜이 느릿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중앙 환풍 시설이었다.

나는 넓은 공간을 찬찬히 돌아보며 관찰했다.

“위로 뚫린 걸 보니까 위층이랑도 이어져 있는 거 같은뎨여?”

“내가 말했잖아. 고생스럽게 진짜 계단을 찾아 헤맬 필요 없다고.”

그의 어깨가 묘하게 으쓱거렸다.

실제로 일정한 간격마다 방금 우리가 빠져나온 환풍구와 같은 크기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이런 방법으로 찾을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운이 따라 줘서 다행이었다.

“그럼, 올라가지.”

이든이 내게 이리 오라 손짓했다.

2층과 이어진 환풍구에 올라가려면 그의 도움이 필요했다.

“녜!”

힘차게 대답을 하고 그에게로 한 발짝 옮겼는데,

덜컥.

……어?

무언가 볼록 튀어나온 것을 밟고 말았다.

“!”

“이런.”

미간을 찌푸린 이든이 내 쪽으로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윽고, 굉음과 함께 땅이 진동했다.

쿠르르릉!

“루나!”

그가 내게 닿기 직전이었다.

조금 전까지 눈앞에 있던 이든이 사라지고, 나를 둘러싼 공간도 전혀 처음 보는 곳으로 바뀌어 있었다.

‘어?’

마치 텔레포트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

나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러니까 이건…….

‘미로 마법?’

미로 마법은 공간 재배열 마도구를 기반으로 한, 일종의 보안 시스템이었다.

발동 조건은 두 가지였다.

약속된 시간이 지났을 때, 혹은 누군가 함정 장치를 건드렸을 때.

이 둘 중 하나의 조건이 충족되면 공간은 새롭게 재배치된다.

지금의 경우는 후자였다.

만약 우리가 이곳을 자주 드나들었더라면 어떤 규칙으로 공간이 재배열이 되는지 알 수 있었겠지만, 불행히도 우리 둘 다 이곳이 초행이었다.

‘어떡하지.’

일단 현 위치부터 파악해야 했다.

주변을 살펴보니 내가 이동된 곳은 환풍구 위였다.

정확히 몇 층의 어디에 있는 환풍구인지까지는 몰랐으나 다행이었다. 누군가에게 들켜서 쫓길 위험은 없었으니까.

‘아빠는 무사할까?’

좁은 공간이 주는 압박감 때문인지 걱정이 길어졌다.

‘만약에 감시자들이나 다페 남작 앞에 덜컥 떨어져 버렸다면?’

그 뒤의 일을 생각하기도 싫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부디 그런 일만은 일어나지 않기를 신께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일단 여길 빠져나가고 보쟈.”

아까의 그 넓은 공간에 가면 만날 수 있겠지.

처음 간 곳에서 부모님을 잃어버렸으면 마지막에 함께 있던 곳에서 기다리면 되는 법이었다.

‘바람이 이쪽에서 분다.’

나는 이든이 했던 방법대로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기어갔다.

엉금엉금.

부지런히 걸어 나가던 나는 얼마 안 가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환풍구를 막고 서 있는 누군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런 곳에, 누구지?’

덩치를 봤을 때 나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처럼 보였다.

풀어 헤친 빨간 머리가 살랑바람에 흔들렸다.

‘왠지 익숙한 뒤태인데…….’

눈을 게슴츠레 좁히며 그 여자아이에게 다가갔다.

인기척을 느낀 상대가 돌아섰다.

허공에 시선이 얽혔다.

“!”

서로의 얼굴을 확인한 우리는 커다래진 눈으로 서로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넌……!”

“셸리?”

“네가 왜 여기 있어?”

그녀가 반듯한 이맛살을 구겼다.

그러는 너야말로 왜 여기에 있는 건데?

우연히 마주쳤다기에는 너무 말도 안 되는 장소였다.

귀족 어른들이나 드나드는 검투장에서 어린애 둘이서 마주칠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그러다 문득 셀리에 관해 서술된 대목이 떠올랐다.

‘아버지의 사랑에 목마른 셀리는 리아노 공작의 뒤를 그림자처럼 쫓아다닌다고 했어.’

얼마 전 황실 티 파티가 열린 정원에서 만난 것도, 셀리가 몰래 리아노 공작을 따라왔던 것이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지금 검투장 어딘가에 리아노 공작도 와 있다는 소리였다.

“너 설마 내 뒷조사 하냐?”

경계의 눈초리가 나를 훑고 지나갔다.

“겨우 네 살인뎨, 무슨 수로.”

“하는 모양새나 태도는 전혀 안 그래 보이는데?”

셀리가 톡 쏘아붙였다.

“누가 할 말인뎨.”

“말이 짧다?”

“자기가 무슨 유교걸이야 모야.”

흥, 콧방귀를 뀌며 중얼거렸다.

내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셀리가 고개를 비스듬히 젖혔다.

“유교…… 뭐?”

있단다, 그런 게.

그날 황실 정원에서 추격전을 벌였던 것만 생각하면 확, 쥐어박아 주고 싶었다.

“너 저번 일 사과 안 할 꼬야?”

“내가 왜 사과해야 하는데?”

“나한테 케이크 던졌쟈나.”

“응. 그게 뭐.”

당당한 성격인 건 알았다만, 저렇게 뻔뻔하게 인정할 줄은 몰랐다.

“안 미안해?”

“재수 없어서 던진 건데.”

허.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이게 진짜…….

사연이 있는 캐릭터라서 좋게 이해하고 넘어가려 했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다.

“너 자꼬 그러면…….”

“쉿!”

돌연 셀리가 내 입술 위에 검지를 얹으며 몸을 낮췄다.

이건 또 무슨 신종 골탕법이야?

그녀에게 따지려던 순간,

우리가 서 있는 환풍구 아래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30분 뒤에 경기 시작이니까, 준비시켜.”

다페 남작의 목소리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