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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54/142)

54화

갑작스럽게 낯선 장소로 이동된 이든의 심장이 불안에 휩싸였다.

쿵, 쿵, 쿵!

머릿속은 백지장이 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사라졌다.’

바로 코앞에서 딸아이를 놓쳐 버리고 말았다.

공기만 거머쥔 손이 허전했다.

“어디로…….”

어디로 사라진 거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것이 공간 재배열 마법이 발동된 거라는 것쯤은 알았다.

과거 변방에서 지내며 귀족들의 뒤를 캘 때, 리챠드와 함께 경험해 본 적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좀처럼 진정할 수 없었다.

딸아이는 약했다.

너무나도 작고 소중해서 안을 때 감히 힘을 주지도 못하는 그였다.

언제나 부서지지 않게 조심조심.

매사에 무심한 그의 본성마저도 바꿔 놓을 만큼 소중히 여기는 아이인데…….

그만 놓치고야 말았다.

그것도 사방에 더러운 것들이 득실거리는 곳에서.

‘찾아야 한다.’

그 한 가지 생각이 이든의 두 다리를 움직이게끔 했다.

그가 이동된 곳은 비품 창고였다.

환풍구는 바로 위에 있었다.

저기다.

저기로 가야만 해.

생각에 홀린 채 그곳으로 올라가려는데, 그보다 먼저 출입문이 벌컥 열렸다.

문을 밀고 들어온 검은 옷을 빼입은 남자가 이든을 발견했다.

“어……? 어찌 여기 계십니까.”

“…….”

이성이 돌아왔다.

이든은 조심히 상대를 살폈다.

상대할 자는 하나.

싸울 것인가, 말 것인가.

상대는 건물 곳곳에 감시하고 있던 검투장 직원들과 비슷한 옷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문밖에 동료가 있을 수도 있으니 섣불리 행동하지 않기로 했다.

“……화장실을 갔다 왔다.”

이든은 적당한 말로 둘러대고 남자를 따돌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 불필요할 정도로 친절한 직원은 눈치 없이 이든의 뒤를 졸졸 쫓았다.

“길이 복잡해서 잘못 드셨나 봅니다. 곧 경기가 시작되니 제가 VIP실로 모시겠습니다.”

이든은 그제야 자신이 2층에 위치한 VIP 전용 관람석 근처로 이동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직원은 그를 VIP 손님이라고 착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든이 비품실에서 나온 걸 봤음에도 전혀 의심하지 않는 태도를 보아하니 그런 게 분명했다.

아마 출입구가 하나일뿐더러 직원들이 교대로 경비를 서고, 게다가 미로 마법까지 걸어 두었으니 외부인이 절대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생각한 거 같았다.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나.

어쩌면 이것은 기회였다.

딸아이가 반드시 녹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던, 다페 남작가의 비리를 포착할 수 있는.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이든의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필요 없다. 찾아야 할 이가 있어.”

“사람 찾는 일이라면 제게 맡기시고 편히 관람하셔도 됩니다.”

“됐다. 내가 직접 가야만 해.”

뒤따라오던 직원이 멈춰 섰다.

“정 그러시겠다면 어쩔 수 없죠. 바로 이 앞인데 말입니다.”

직원이 엑스 표가 쳐진 벽을 두어 번 툭툭 두들기자, 벽 너머에 숨겨져 있던 문이 나타났다.

“30분 뒤에 경기 시작이니까, 준비시켜.”

마침 문 너머로 다페 남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불쾌한 음성과 함께 아주 미미하지만 익숙한 향이 실바람을 타고 전해졌다.

분명 딸아이의 체취였다.

* * *

나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셀리와 투덕거리고 있었다는 사실도 잊어버린 채 환풍구 아래 상황에 집중했다.

‘검투사들 대기실인가?’

경비 시작이니, 준비니 하는 말들을 들어보면 그런 것 같았다.

‘그럼 이 근처에 웨인투르의 대기실도 있다는 소리인데.’

환풍구 창살 사이로 좁고 지저분한 공간이 보였다.

바로 아래, 누군가 있었다.

후드를 깊게 눌러 쓰고 반대쪽 벽을 바라보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누구지?’

조금 더 자세히 보기 위해 고개를 살짝 더 내밀었다.

보일 듯 말 듯 한데.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한참 몸을 기울인 뒤에야 꽉 쥐어진 주먹에 끼워진 빨간색 장갑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장갑을 따라 천천히 옮긴 시선의 끝에는 가운 밖으로 드러난 갈색 털이 촘촘하게 난 동물의 팔이 보였다.

캥거루의 팔이었다.

“헙!”

상기된 숨이 그대로 뱉어졌다.

‘웨인투르!’

셀리와 내가 있는 곳이 웨인투르의 대기실과 이어진 환풍구였다.

그대로 굳어 버린 나를 셀리가 덥석 잡아당겼다.

잔뜩 인상을 쓴 그녀는 소리를 죽인 채 입술을 벙긋거렸다.

‘너 미쳤어? 들키고 싶어서 환장했냐?’

간발의 차로 아래에서 누군가 철장을 걷어차는 소리가 들렸다.

콰아앙!

그제야 정신이 번뜩 들었다.

“짐승! 아까 이 몸께서 말씀하신 것 잊지 마. 오늘 경기에도 진다면 네 딸의 시체는 절대 찾지 못할 줄 알라고.”

목소리만으로도 상대를 구별했다.

‘다페 남작, 저 인간 말종 자식.’

무심코 잊고 있던 설정이 떠올랐다.

❝캥거루 수인 웨인투르 후크에게는 충분히 검투장에서 도망칠 힘이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고여 버린 웅덩이처럼 그곳에 묶여 있었다.

하나뿐인 딸아이를 잃은 상실감이 그녀의 두 다리를 꿈쩍하지 못하게 못 박았다.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그녀의 밤을 더욱 어둡게 만들었다.

그 어둡고 습한 곳에서 하루하루 죽어 가고 있는 그녀의 영혼을 구원해 줄 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다듬어지지 않은 숨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밀려 나왔다.

‘이걸 왜 잊고 있었을까.’

다페 남작은 수인 사냥을 즐겼다.

단지 찰나의 유희를 위해 쏜 화살이 웨인투르의 삶을 비극적 서사로 바꿔 놓았다.

하필 그 타이밍에 아기 캥거루가 어미와 떨어져 있던 것도.

또 하필 화살이 연약한 아기 캥거루를 정확히 관통했다는 것도.

모두 다 빌어먹을 우연의 연속이었지만…….

그 때문에 한 캐릭터는 평생을 지옥 불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절대 용서 못 해, 다페 남작.’

마치 불덩어리를 삼키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의 수분이 사멸하는 느낌이었다.

“제대로 준비하고 나와.”

일방적으로 협박을 늘어놓던 다페 남작이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쾅.

다시 철문이 닫히고 육중한 그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질 때까지 나는 간신히 화를 눌러 삭였다.

앞서 움직인 것은 셀리였다.

“나와. 걸리적거리지 말고.”

내 어깨를 툭, 밀친 셀리는 능숙하게 환풍구 뚜껑을 열어젖혔다.

덜커덕.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모 하는 거야?”

“알 거 없어. 혹시라도 사고 쳐서 나까지 곤란한 상황 만들지 말고 얌전히 왔던 대로 돌아가기나 해.”

한결같이 정 붙이기 어려운 화법이었다.

얄미운 셀리를 쳐다보고 있는데, 환풍구 아래에서 이쪽을 올려다보는 웨인투르와 눈이 마주쳤다.

“흐음…….”

그녀가 낮게 신음을 흘렸다.

인사라도 해야 하는 걸까.

웨인투르는 나를 모를 텐데.

잠시 고민하는 사이, 웨인투르가 먼저 입술을 뗐다.

“다신 오지 말라니까, 기어이 또 왔네.”

내 옆의 셀리를 향한 말이었다.

……뭐야. 셀리와 웨인투르. 서로 아는 사이야?

“다 죽어 가는 줄 알았는데 잔소리 여전한 거 보니까 아직 펄펄하네.”

“어른한테 말버릇하곤.”

“내가 언젠 공손했어?”

“뭐. 그게 꼬맹이 너답긴 하지. 지난번에 알려 준 무술은 연습 좀 해 봤어?”

웨인투르가 무술을 알려 줘?

그러고 보니, 원작에서 셀리의 무술에 대해 언급된 장면이 있었다.

셀리는 자신과 달리 마법에 타고난 재능을 보이는 노아에게 리아노 공작이 관심을 보이자, 질투심이 생겨 어디선가 무술을 배워 와 결투를 신청했다는 대목이 있었다.

‘리아노 공작이 스승을 붙여 줄 리가 없어서 도대체 어디서 배워 온 건가 했더니, 그게 웨인투르였을 줄이야.’

의외의 관계에 놀랄 틈도 없었다.

겁도 없이 환풍구 아래로 뛰어내려 버린 셀리 때문에 등줄기로 소름이 쫙 돋아났다.

“셀리!”

우려와는 달리 셀리는 다치지 않고 의자 위로 착지했다.

자연스럽게 웨인투르의 시선이 내게로 옮겨졌다.

“오늘은 친구까지 달고 왔네.”

“친구 아냐.”

셀리의 목소리가 퉁명스러웠다.

“그럼, 친동생?”

“저거랑 나랑 엮지 마.”

저게 진짜.

듣다 보니까 열받았다. 지고 싶지 않아서 환풍구를 붙잡고서 소리를 질렀다.

“내가 할 말이고든?”

“어쨌든 이쪽 꼬마한테는 내 도움이 필요한 거지?”

웨인투르가 내 쪽으로 팔을 뻗었다. 받아 줄 테니 뛰어내리라는 의미였다

“위험하니까 어서 내려오렴.”

가까이서 본 그녀의 팔은 상처투성이였다.

아팠겠다…….

그간 어떤 환경에서 지냈는지 눈에 그려졌다.

내가 선뜻 뛰어내리지 못하고 있자, 웨인투르는 의자를 밟고 올라왔다.

“가까이서 보니까 완전 어린 아기네.”

푸석푸석한 얼굴이 가까워졌다.

빠져들 것같이 수심이 깊은 까만 눈동자였다.

우리는 잠시 시간이 멈춘 듯 서로의 눈동자를 빤히 응시했다.

“……안뇽하세오.”

“이제 알겠다. 너구나. 이걸 두고 간 사람.”

비슷한 냄새가 나서 알아봤어. 웨인투르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지난번 내가 그녀의 손에 쥐여 주고 갔던 츄르였다.

“왜 안 먹어써요?”

“이런. 잔소리꾼 꼬맹이가 하나 더 늘어 버렸네.”

내 걱정에도 웨인투르는 그저 희미하게 웃을 뿐이었다.

“이런 것 가지고 오지 않아도 된단다. 내겐 필요 없거든.”

“그치만 계속 식사를 안 하시면 몸이 상할 꼬에요…….”

“저 녀석 처음 봤을 때랑 똑같은 소리를 하네.”

낮게 코웃음을 치는 웨인투르에게 셀리가 발끈했다.

“쟤랑 엮지 말라니까?”

웨인투르는 나를 조심스레 잡아 땅 아래로 내려 주었다.

“감사함미다.”

“너 혼자 왔니?”

“아뇨, 아빠랑 와써요.”

“다음부터는 따라오지 마. 이곳은 너 같은 아기한테는 위험한 곳이니까. 잔소리꾼 꼬맹이는 저 녀석 하나로도 충분하기도 하고.”

웨인투르의 시선이 셀리에게 닿아 있었다.

반말하고 틱틱거리는 모습을 자칫 버릇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셀리를 보는 웨인투르의 눈빛은 다정했다.

“걔는 신경 끄고, 이거나 마셔.”

셀리는 내내 메고 있던 작은 크로스백에서 물통을 꺼내 웨인투르에게 건넸다.

‘둘이 무슨 사이지?’

하루 이틀 된 관계는 아닌 것 같았다.

물이며 사탕, 초콜릿 같은 것들을 꺼내 건네는 셀리나 그걸 바라보는 웨인투르의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무슨 사연이 둘 사이에 얽혀 있는 건지는 정확히 몰라도…….

셀리가 이런 식으로 종종 웨인투르를 챙겨 줬던 것 같았다.

……의외네. 완전 재수 없는 애인 줄만 알았는데.

“다시 말하지만 앞으로 오지 마.”

“…….”

가방 속에서 주전부리를 꺼내던 셀리의 손이 멈추었다.

“이젠 그런 거 챙겨 놓을 필요도 없고, 매주 위험하게 이런 곳 올 필요도 없어.”

그 말을 듣자마자 직감했다.

웨인투르가 셀리에게 정을 떼어 놓으려 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셀리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떨리는 음성이 그 증거였다.

“……싫어.”

“하여튼 제멋대로네.”

“언제 내가 말 듣는 거 봤어?”

웨인투르를 노려보는 셀리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다음 주도 오고 그다음 주도 올 거니까, 없기만 해 봐. ……진짜 가만 안 둬. 진짜로.”

셀리가 웨인투르를 향해 초콜릿을 던졌다.

툭.

웨인투르의 가슴팍을 맞고 떨어진 초콜릿이 바닥을 뒹굴었다.

그녀는 천천히 허리를 굽혀 초콜릿을 집어 들었다.

“성질 좀 죽이라니까.”

“내가 성질 안 내게 밥이랑 물 잘 챙겨 먹으면 되잖아. 이딴 곳 탈출할 힘이 있으면서도 왜 구질구질하게 갇혀 있는 건데?”

“……그럴 순 없어. 난 그래선 안 되고.”

“도대체 왜? 아줌마 바보야?”

셀리는 가슴을 치며 답답해했다.

찰나였지만, 웨인투르의 얼굴 위로 씁쓸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딸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스스로를 정죄하는 거야.’

이대로 망가지는 웨인투르를 가만히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저도 갖꼬 왔는뎨.”

나는 주머니에 꾸역꾸역 쑤셔 넣어 왔던 츄르를 의자 위에 와르르 쏟아 냈다.

“이거 드시는 걸 두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집에 안 돌아갈 꼬에요. 그치, 셀리?”

잠시 벙쪄 있던 셀리가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어! 그러니까 얼른 챙겨 먹어.”

“전 거짓말할 쥴 모르는 아가니까, 각오하세오.”

자리를 잡고 앉아 뻔뻔하게 츄르를 내밀었다.

소매 넣기가 통하지 않으시니, 위장 넣기를 해 버리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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