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웨인투르는 눈앞에 쌓여 있는 초콜릿과 츄르를 보며 결국 작게 실소를 뱉었다.
“너희 진짜…….”
“얼른 먹어요. 쟈.”
직접 츄르를 뜯어 손에 쥐여 주었다.
“빨리.”
셀리까지 합세하고 나서자 웨인투르는 마지못해 츄르를 입에 가져다 댔다.
“고집불통 꼬맹이 둘은 못 이기겠네.”
오랜 단식으로 인해 메말라 있던 그녀의 목구멍으로 츄르가 부드럽게 넘어갔다.
웨인투르가 미간을 부드럽게 찌푸렸다.
‘진실의 미간이다!’
입맛에 맞은 모양이었다.
다행이었다.
그녀는 군소리 없이 츄르 하나를 해치우고, 셀리가 챙겨 온 물까지 충분히 마셨다.
‘잘하면 설득할 수 있겠어.’
조용히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 내 머릿속에는 오직 이 지옥 속에서 그녀를 데리고 탈출하는 것밖에 없었다.
‘원작에서는 구원해 줄 이가 없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달라.’
이 이야기 속의 엑스트라일 뿐인 내가 감히 그녀의 구원자가 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난 벼랑 아래로 떨어지고 있는 그녀를 외면할 생각이 없었다.
비록 보잘것없이 작고 힘없는 손일지라도 기꺼이 뻗어 그녀를 붙잡아 줄 생각이었다.
그게 몇 번이더라도 변함없이.
또, 설사 다칠 수도 있는 일이라 하더라도 기꺼이.
“우리, 여기서 같이 나가여. 탈출 도와쥬께요.”
“그럴 필요 없…….”
“따님 때문에 여기 계시려는 거쟈나요.”
“…….”
일순, 그녀의 움직임이 멈췄다.
숨 쉬는 방법을 잊기라도 한 것처럼 잠시 괴로운 표정을 지은 그녀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내 딸이 어디에…… 묻혀 있는지 알고 있어?”
“찾아 드릴 수 이써요. 그러니까 저랑 약속해여. 여기서 이렇게 허무하게 쥭을 생각 하지 않기로.”
웨인투르의 앞으로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떨리는 동공이 나를 담았다.
그녀가 내 모습을 통해서 누구의 모습을 보는지 알고 있었다.
웨인투르의 소중한 보물. 이제는 다시 만날 수 없는 그녀의 하나뿐인 딸이겠지.
“따님이 지금 모습을 본다면 슬퍼할 꼬에요.”
“……지켜 주지 못했어. 내가, 그럴 힘이 있었음에도.”
“어쩔 수 없는 사고였쟈나요. 웨인투르 잘못이 아니에여.”
못된 다페 남작의 잘못이지.
나는 그녀에게 쪼르르 다가가 부들부들한 다리를 꼬옥 안아 주었다.
그러자 지켜보고 있던 셀리의 눈이 커다래지더니, 불끈 주먹을 쥐며 나섰다.
“저 땅꼬마가 좀 재수 없긴 해도, 이번엔 맞는 말 했네! 그래, 그 자식 잘못이지 그게 왜 아줌마 잘못이야?”
“잃는 것이 두려워서 자꾸 도망치기만 하면, 계속 바보같이 소중한 걸 뺏기기만 할 꼬에여.”
“그래, 쟤 말이 맞아. 그 썩을 자식이 다시는 입을 나불거리지 못하게 확! 차 버리자. 어?”
“나쁜 악당 놈이 자꾸 따님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거 참고만 있을 꼬에요?”
생각에 잠긴 듯 대답은 선뜻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위해 챙겨 온 츄르와 물을 캥거루 주머니 속에 넣어 주었다.
“그로니까 같이 용기 내서 여기서 나가요. 녜?”
“빨리 나가자. 탈출할 길은 내가 잘 알고 있어.”
“때로는 실패하고 좌절을 맛보더라도 계속 싸워야져.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웨인투르의 손을 꼬옥 잡으며 말했다. 그러자 셀리도 나를 따라 그녀를 붙들었다.
우리의 마음이 닿은 걸까.
웨인투르가 꾹 다물고 있던 입술을 벌려 무언가 말을 꺼내려 했다.
그런데 그때.
터벅, 터벅, 터벅!
문 너머에서 육중한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놈이 온다.’
우리는 눈짓을 주고받으며 상황 파악을 빠르게 마쳤다.
“어서 숨어!”
셀리는 이런 일을 한두 번 겪는 게 아니었는지, 곧잘 웨인투르의 도움을 받아 환풍구에 매달렸다.
그녀가 무사히 환풍구 위로 올라갔을 때, 문밖에서 열쇠 꾸러미를 뒤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절그럭, 절그럭.
바로 문 앞에 놈이 서 있었다.
‘!’
대기실 안에 가구라고는 돌침대와 간이 의자가 전부였다. 딱히 작은 몸을 숨길 공간이 없었다.
헉, 어떡하지.
사고 회로가 멈춰 버린 나를 웨인투르가 덥석 안았다.
“이리 와.”
거의 동시에 자물쇠가 달칵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그녀는 나를 캥거루 주머니 속으로 밀어 넣었다.
덜커덕, 끼이익.
아주 간발의 차로 문이 열렸다.
* * *
더러운 자식들.
이든은 입술을 짓이겼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자신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의 품에 숨겨진 마도구는 계속해서 작동되고 있었다.
VIP 전용 관람석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모든 장면과 대화가 녹화되고 있었다.
결정적인 장면도 다수였다.
증거를 모으는 것은 이 정도면 됐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이든에게 남아 있었다.
‘근처에 분명 루나가 있다.’
그는 줄곧 미미한 딸아이의 체취를 놓치지 않기 위해 집중했다.
방향은 기나긴 복도 쪽이었다.
강아지 수인에 비하면 미묘한 오차가 있을 수도 있었지만, 동물적 감각이 그에게 말해 주고 있었다.
틀림없이 이 끝에 자신의 딸아이가 있노라고.
“저쪽은 어디지?”
이든이 자신을 이곳까지 안내해 준 직원에게 물었다.
“아, 그쪽은 검투사들의 대기실이 있는 방향입니다.”
“보러 갈 수 있나?”
“직접요?”
직원이 놀란 듯 되물었다.
“출입 금지 구역인 건가?”
“아니요, 그런 건 아닙니다. 다만 조금 놀라서요. 귀족 나리께서 검투사들을 직접 대면하는 경우는 거의 드문 경우인지라…….”
하기야, VIP실을 드나드는 귀족들 정도 된다면 신분이 낮고 천한 검투사들과는 같은 공기를 나눠 마시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어디까지나 검투사란 한낱 유희 거리에 불과했으니까.
‘충분히 의심 살 수 있는 행동이겠군.’
그걸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이든은 자신의 요구를 철회하지 않았다.
그저 딸을 찾아야겠다는 생각 하나뿐이었다.
“앞장서.”
“예? 예……. 따라오시죠.”
이든의 기세에 밀린 직원이 얼떨결에 검투사 대기실로 방향을 틀었다.
긴 복도를 따라 방이 일렬로 배치된 구조였다.
공간은 비위생적이고 비존엄적이었다.
그 모든 장면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이든의 품 안에 있는 녹화용 마도구 속에 담겼다.
쇠 비린내가 코끝을 찔렀다.
이든은 불쾌한 공기 사이를 가로지르며 마음을 다스렸다.
‘무사할 것이다.’
다치지 않기로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했으니까.
“뭐야. 그 주머니…….”
복도의 끝이 보일 때쯤,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멀지 않은 곳이었다.
이든은 곧장 ‘그자’가 근처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거기에 뭘 처숨기고 있는 거지? 당장 꺼내 보여라.”
“……싫다.”
다페 남작이 어떤 여자와 실랑이 중이었다.
‘검투사 중에 여자가 있었던가.’
그는 이 검투장에서 여성 검투사라면 단 하나, 자신의 딸이 구하겠다고 했던 캥거루 수인뿐이라는 걸 생각해 냈다.
“감히 이 다페님의 명령에 불복종하겠다는 거냐?”
살기가 돋친 말투였다.
둘 중 하나는 다칠 것 같은 아슬아슬한 분위기였다.
이든의 걸음이 직원을 앞질렀다.
“어어, 어디 가십니까?”
등 뒤에서 당황한 직원이 이든을 불렀지만, 그는 멈춰 서지 않았다.
딸아이의 체취를 맡아서였다.
* * *
캥거루 주머니 속에 숨게 될 줄이야!
우리 사자님의 발바닥 털보다는 아니지만 제법 부드러운 촉감이 내 몸을 감쌌다.
넓이도 제법 널찍해서 나 같은 어린애 하나쯤은 거뜬히 들어가고도 남았다.
‘그래도 볼록 튀어나온 걸 보면 눈치챌 텐데.’
아무리 웨인투르가 가운 형태의 커다란 로브를 걸치고 있다고 하더라도 볼록 튀어나온 배는 들킬 위험이 컸다.
나는 조용히 숨을 죽이고서 밖의 상황에 귀를 기울였다.
제발 걸리지 않았으면.
신이시여, 저 아둔한 다페 남작의 눈을 잠시 멀게 해 주세요.
그렇게 빌었건만.
“뭐야. 그 주머니…….”
기어이 다페 남작의 의심을 사고야 말았다.
제발, 제발!
간절함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가까이 다가온 다페가 내가 숨어 있는 캥거루 주머니를 콱 쥐었다.
“뭘 숨긴 거지?”
“!”
“도망치기라도 할 생각인가?”
투박한 손이 주머니 속으로 들어와 나를 붙잡아 꺼내려고 했다.
‘으앗, 안 돼!’
나는 최대한 몸을 웅크렸다.
다페 남작의 손이 내게 닿기 전, 웨인투르가 재빨리 붙잡아 그를 저지시켰다.
“허튼 짓거리 하지 말고 그 손 치워라.”
“당신이야말로…… 그 손 놔.”
살벌한 경고가 오갔다.
이러다가 다페 남작이 성질을 못 이기고 공격이라도 하면…….
체력적으로도 지쳐 있고 나를 보호해야 하는 웨인투르에게 훨씬 불리한 싸움이 될 것이다.
“이 짐승 새끼가 드디어 미쳤나. 하늘 같은 주인님도 못 알아보고.”
다페 남작이 둔기를 꺼내 드는 소리가 들렸다.
드르르륵.
커다란 쇳덩이가 바닥을 긁었다.
그 위압감이 두려울 법도 한데 웨인투르는 절대 굴하지 않았다.
“착각도 유분수지. 너 같은 놈을 주인으로 생각해 본 적 한 번도 없다.”
쿵!
분노한 다페가 둔기를 바닥에 내리쳤다.
“오늘 톡톡히 알려 주마. 건방진 짐승 놈에게 네가 섬겨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말이다.”
짐승 새끼며, 주인님이며…….
하나같이 눈살을 찌푸리게끔 만드는 언어들을 더는 참아 줄 수 없었다.
신이시여, 오늘 저 자식 뚝배기 깨 버리고 지옥 가겠습니다.
“도저히 못 들어 쥬겠네!”
캥거루 주머니 밖으로 쑤욱 고개를 내밀었다.
갑작스러운 내 등장에 커다란 둔기를 휘두르려던 다페 남작이 그대로 굳은 채로 표정을 찌푸렸다.
“……아기?”
적잖이 당황한 반응이었다. 그는 가면을 쓴 내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좋았어, 이 틈을 타서……!
“아뵤!”
퍽!
있는 힘껏, 방심하고 있는 다페의 그곳에 셀리가 가져온 물통을 던져 버렸다.
선빵 필승이다, 이 자식아!
“크억!”
그곳을 부여잡은 다페 남작이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이때다!
연약한 아기와 지쳐 있는 검투사가 체급 차이 나는 적을 처치할 수 있는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나는 웨인투르를 향해 외쳤다.
“지금이에오!”
곧장 내 말의 뜻을 알아들은 그녀가 주먹을 날렸다.
퍼억!
묵직한 파열음과 함께 다페 남작의 몸뚱이가 뒤로 쿵, 넘어갔다.
“……이 새끼들…….”
이런. 힘이 조금 부족했나.
이 일격필살로 그를 기절시킬 생각이었는데, 몸이 많이 상한 웨인투르에게 다페 남작을 마무리할 힘이 부족했다.
“둘 다…….”
둔기를 지팡이 삼아 비틀비틀 일어선 다페 남작이 우리를 노려봤다.
“가만 안 두겠어!”
기합과 함께 다페 남작이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