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헉.
저 둔기에 잘못 맞으면 끝장이야!
“도…… 도망쵸!”
나를 캥거루의 주머니 속에 품은 웨인투르가 반사적으로 뛰어올랐다.
“어딜 도망가려고!”
다페 남작이 우리를 향해 휘두른 둔기가 아슬아슬하게 다리 옆을 스쳐 지나가 벽에 박혔다.
쿠웅!
굉음과 함께 벽이 움푹 파였다.
“꼬맹아, 괜찮니?”
“녜. 웨인투르는요?”
“다치진 않았는데……. 체력이 얼마큼 버텨 줄지는 모르겠구나.”
갈라진 벽면에서 후두두둑, 부서진 잔재가 떨어져 내렸다.
‘조금만 느렸어도 위험할 뻔했어.’
처음 공격은 운이 좋았다.
급소를 걷어차인 다페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통증이 줄어든다면?
그렇다면 우리가 그를 상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창문도 없는 협소한 공간.
기습 공격으로 다페 남작을 기절시키는 작전이 실패했으니, 다른 계획이 필요했다.
나는 엘코어를 쥐고 간절히 엘베른을 불렀다.
‘할아버지, 도움이 필요해요!’
내 부름에 응하듯, 곧장 엘코어 주변으로 새하얀 기체가 생겨났다.
【이 할애비가 왔다!】
이내 모양을 갖춘 엘베른이 엘코어 속에서 튀어나왔다.
마침 다페 남작은 벽에 박혀 버린 둔기를 힘주어 빼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물건을 망가트리고 싶진 않았지만, 버릇을 고칠 필요는 있겠어.”
저놈이 우릴 공격하고 있어요!
나는 냉큼 엘베른에게 다페의 행패를 일러바쳤다.
【뭐? 저 씹다 뱉은 오징어같이 생긴 놈이 감히 우리 손녀님께 흉측한 것을 휘두르려 한다고?】
주먹을 불끈 쥔 엘베른에게 물었다.
혼내 주실 수 있어요?
【당연하지! 이 할애비만 믿거라!】
할아버지 완전 최고!
두 어깨가 우쭐해진 엘베른은 콧김을 뿜으며 다페 남작을 향해 달려들었다.
휘이이익!
몸집을 부풀려 수박만 한 크기가 된 커다란 주먹이 다페 남작의 면상과 점점 가까워졌다.
‘저 정도 크기의 주먹을 직방으로 맞으면 기절시킬 수 있겠다!’
엘베른이 다페 남작을 기절시킨 틈에 환풍구를 타고 탈출할 생각이었다.
길은 셀리가 안다고 했으니, 시간만 벌면 된다.
‘좋았어, 나쁘지 않은 계획이야.’
마침내 엘베른의 거대한 주먹이 다페 남작에게 닿는 순간이었다.
쑤우우욱.
……어?
기체가 딱딱한 단면에 닿아 흩어지듯 푸수슉, 바람 꺼지는 소리와 함께 엘베른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뭐야?’
그의 주먹이 다페 남작을 쓰러트리기는커녕, 그대로 통과해 버리고 말았다.
그뿐일까.
새하얀 혼은 속도를 주체 못 하고 벽을 뚫고 복도로 나가 버리기까지 했다.
이거 완전…….
“망했따.”
너무 기가 찬 나머지 입 밖으로 생각을 뱉어 버렸다.
“그래, 네놈들의 미래가 어떨지 이제야 알겠냐?”
다페가 손가락 관절을 뚝, 뚝, 꺽으며 비열하게 웃었다.
“지금이라도 이 위대하신 몸에게 무릎 꿇고 빈다면 특별히 아량을 베풀어서 살려는 주마.”
그는 마치 독 안에 든 쥐를 보듯이 여유를 부렸다. 2평 남짓의 공간에서 나를 놓칠 리가 없다고 생각 하는 것 같았다.
실제로 셀리가 먼저 탈출한 환풍구나, 다페 남작이 가로막고 서 있는 출입문 외에는 도망갈 곳이 없었다.
내가 사자님처럼 점프력이 좋았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랬다면 지금 이렇게 위기를 느낄 필요도 없었겠지.
이젠 정말 어떻게 해야 하지.
좌절감을 느끼고 있는 내게 웨인투르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꼬맹아. 내가 시간을 벌 테니 도망가.”
“우리 같이 나가기로 했쟈나요.”
“나는 잡혀도 쓸 만해서 당장 죽이진 않겠지만, 꼬맹이 너한텐 어떻게 할지 몰라.”
그녀는 이미 결심한 듯 보였다.
“고마웠다, 네가 해 준 말 잊지 않을게.”
“안 돼요. 포기 안 할 꼬야.”
“지금은 고집부릴 때가 아니야.”
나는 끝까지 그녀를 놓지 않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곳이 어떤 곳인지 뻔히 아는데, 어떻게 혼자 내버려 두고 도망가.
그건 내 스스로를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크흐흠.】
어느 틈에 다시 벽을 통과해서 대기실 안으로 들어온 엘베른이 내 주의를 끌었다. 그는 멋쩍게 뒷목을 긁적이며 슬그머니 다가왔다.
【허허, 우리 손녀님을 공격했다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흥분해서 인간에게 직접 물리적인 힘을 가할 순 없다는 걸 까먹었지 뭐냐.】
괜찮아요.
어차피 탓해 봤자 시간을 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이 위기를 어찌 극복할지 생각해 내는 게 먼저였다.
【하지만…… 간접적인 방법으로는 가능하다.】
간접적으로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바로 이렇게.】
엘베른의 눈동자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푸른빛이 흘러나왔다.
“!”
이내 주변의 기온이 낮아졌다.
“갑자기 왜 이렇게 추워?”
서늘한 한기가 대기실 안을 뒤덮자, 다페 남작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뭐, 뭐야?”
푸른빛이 다페 남작의 손을 감쌌다. 이내 그의 둔기가 벽으로 가서 찰싹 붙어 버렸다.
“갑자기, 이게 왜, 안 떨어져?”
【힘으로는 어림없을 거다.】
엘베른이 빙긋 미소 지었다.
“흐읍! 허어업! 흐아아압!”
당황한 다페가 둔기를 떼어 내려고 온 힘을 다해 끙끙거리며 생쇼를 해도 소용이 없었다.
마치 초강력 접착제라도 붙여 놓은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때. 이번엔 완벽하지?】
할아버지 완전 대박.
엘베른이 한껏 뿌듯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유지는 얼마큼 가능해요?’
【흐음. 저 녀석처럼 무식하게 힘만 센 놈이면, 앞으로 1분?】
‘그 정도면 충분해요.’
웨인투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웨인투르. 달리기 자신 이써요?”
“점프만큼은 아니지만 나쁘지 않은 편이기는 한데, 그건 갑자기 왜……. 너, 설마.”
“정답임미다. 같이 도망쳐야죠.”
표정이 잔뜩 흐트러진 웨인투르가 무어라 대답을 꺼내려고 하는 순간.
누군가 대기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엄청난 힘으로 밀린 철문은 벽에 붙어 버린 둔기와 씨름을 하고 있던, 문 뒤의 다페 남작의 머리를 세게 강타했다.
콰앙!
엄청난 소리와 함께 다페 남작은 거품을 물고 스러졌다.
“크억!”
헉. 엄청 아프겠다.
눈알을 뒤집어 까고 기절한 다페를 보며 숨을 들이마시는데, 커다란 그림자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루나.”
“……아빠?”
문을 열고 나타난 이는 이든이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캥거루 주머니 속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는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이제 집에 가자.”
“대체 이게 무슨…….”
웨인투르가 나와 이든을 번갈아 보며 쉬이 말을 잇지 못했다.
“웨인투르도 우리랑 함께 갈 거죠? 우리 집으루.”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같이 가요, 우리랑 함께.”
“…….”
“여긴 살 곳이 못 됨미다. 웨인투르는 맛있는 것을 먹을 자격도, 따뜻한 침대와 넓은 방을 쓸 자격도 충분히 있써요. 따님분도 웨인투르가 그렇게 살기 원할 꼬에요.”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이내 무언가 결심한 듯, 내 손을 잡았다.
“……그래. 그러자꾸나.”
용기를 내서 마음을 돌이켜 준 웨인투르가 참 고마웠다.
‘그래, 세상의 모든 이들은 행복할 권리가 있어.’
앞으로 라이언하트가에서 생활하면서 다친 마음이 치료되길 바랐다.
감격스러운 마음을 추스르고 있는데, 환풍구 위에 내내 숨어 있던 셀리가 고개를 내밀고서 외쳤다.
“한가하게 수다 떨 시간 없어. 직원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어!”
우리에게 쉴 틈은 없었다.
큰 소리를 듣고 몰려드는 다페의 부하들로부터 도망가야 했다.
“출구로는 어림도 없을 테니 다들 올라와! 길은 내가 잘 알고 있으니까.”
우리는 줄줄이 환풍구 위로 올라갔다.
셀리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정말로 검투장의 보안 시스템을 줄줄이 꿰고 있었다.
중간중간에 미로 마법이 발동되어도 헤매지 않고 탈출구까지 우리를 안내했다.
매주 웨인투르를 보기 위해 드나들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들이라 했다.
‘웨인투르와 셀리 사이에 이런 식의 서사가 있을 줄은 몰랐네.’
어찌 됐건, 우리는 셀리 덕분에 다페 남작 부하들의 눈을 피해서 마차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저 땅꼬마 집에 도착하면 연락해, 아줌마.”
셀리는 우리가 타고 온 라이언하트 가문의 마차까지만 데려다주고 정작 그녀 자신은 마차에 올라타지 않았다.
“넌 어또케 하려고?”
“난 알아서 갈 테니까, 신경 끄고 무사히 도착하기나 해.”
그래도 위험할 텐데.
서로 낯간지러운 말을 주고받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걱정스럽긴 했다.
셀리는 붙잡을 새도 없이 잽싸게 숲속 어딘가로 달려갔다.
“걱정하지 마. 저 꼬맹이 녀석, 저래 보여도 강하니까.”
웨인투르의 말이 맞다.
매주 홀로 이곳까지 오가는 셀리는 별 탈 없이 자신의 보금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이쪽부터 샅샅이 뒤져!”
가까운 곳에서 직원들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출발해.”
이든의 명령이 떨어지자, 우리를 태운 마차가 포위망을 벗어나 매끄럽게 제도의 중심으로 향했다.
“다페 남작이 저를 포기하려 하지 않을 겁니다.”
웨인투르가 불안한 눈빛으로 마차 밖을 살피며 말했다.
다페 남작의 부하들은 아직 검투장 안만 물색하고 있는지, 따라붙은 자는 없었다.
“우리라는 걸 알아차리더라도 당장에 함부로 건드리지는 못할 꼬에요.”
걱정하고 있는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한 말이다.
아마 다페 남작은 혈안이 되어 웨인투르를 빼돌린 자를 찾아내려 할 것이다.
아무리 노력한다고 한들, 제도 안에서 평생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꽁꽁 숨길 수는 없는 법.
웨인투르가 우리와 있다는 것을 들키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그러니 그전에 우리가 선수를 쳐야만 했다.
“다음 작젼은 오늘 밤, 바로 움직이도록 하께요.”
“돈을 준비해 놓도록 하지.”
이든이 곧바로 내 말에 대꾸했다.
좋아, 작전 2단계. 매수와 협박하기는 껌이지.
* * *
라이언하트 저택으로 돌아온 우리는 이른 저녁을 먹었다.
이든은 릴리앙에게 그러했듯, 웨인투르에게도 그녀를 위한 방을 내주었다. 딸아이의 흔적을 추적하기 위해서 토리에게 따로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우리 사자님은 가족과 관련된 일에는 은근 스윗하시다니까.’
웨인투르는 눈물을 보이며 감사를 표했다.
그 반응이 괜히 쑥스러웠는지 이든은 휙 자리를 떴지만, 우리 모두에게 그의 따뜻한 마음이 전달됐다.
식사가 끝난 후, 고단한 하루에 심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몹시 지친 그녀는 이른 초저녁부터 오랜만의 단잠에 빠져들었다.
그런 그녀를 제외하고 나와 이든, 폴이 다시 응접실에 모였다.
다음 작전을 위해서였다.
이든이 책상 위의 작전 종이를 내려다보며 먼저 운을 뗐다.
“다음 대책은 언론 통제겠군.”
“돈은 얼마 정도 쥰비해 두셨어여?”
“이걸로도 부족한가?”
세상에…….
이든이 내민 것은 백지수표였다.
나는 기껏 해 봐야 금괴 한 두덩이 정도를 생각했었는데.
우리 사자님께서는 통이 커도 너무 크셨다.
폴과 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이걸로도 부족하다면 개인 금고를 열도록 하지.”
우리의 반응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이든이 덧붙였다.
계속 오해하게 두었다가는 황실까지 사들일 기세라서 ―물론 그 또한 나쁘지 않은 전략이지만― 얼른 대답해 주었다.
“아뇨, 이러면 오히려 오해를 살 꼬에요. 그냥 금괴나 적당한 돈주머니 정도가 좋을 것 같아여.”
“맞아요. 금괴는 저희 같은 평민들의 일 년 치 봉급도 넘는걸요. 금괴 하나만 들이밀어도 덥석 물 겁니다.”
폴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제아무리 기르신 신문사에서 오래 일한 자라고 하더라도, 눈앞의 금괴를 보고서 혹하지 않을 수 없을 터.
신문사 매수 작전은 성공한 거나 다름없었다.
‘좋았어. 그럼 신문사 쪽은 이걸로 문제없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다음 매수 대상이었다.
“폴, 신문은 보통 새벽에 찍어 낸다구 했쬬?”
“네, 아가님. 오늘 새벽 세 시 내로 기사를 바꾼다면 제시간에 신문을 찍고 배포할 수 있을 겁니다.”
“기사는 다 준비됐써요?”
“물론이죠. 식사하고 계실 때 미리 써 두었어요.”
이날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폴의 눈동자는 초롱초롱 생기가 넘쳤다.
“죠아요. 그럼 오늘 새벽에 저랑 폴, 둘이서 움직일게요.”
“둘이서만 가겠다고?”
이든이 대번에 표정을 구겼다.
나는 왜 안 데려가지?
그렇게 따져 물으려는 마음이 굴뚝인 것처럼 보였다.
“아빠한테두 막대한 임무가 있써요.”
“그게 무엇인데.”
그는 영 탐탁지 않은 말투로 되물었다.
“오늘 새벽에 던버르레 공쟉밈을 만나 쥬셔야 해요.”
“신문사부터 같이 다녀온 후에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안 돼요. 반드시 동시에 이뤄져야만 해여.”
그래야 던버르레 공작의 판단력을 흩트려 놓을 수 있을 테니까.
내일 자 신문이 찍히고 있는 시간에 던버르레 공작을 매수해야만 했다.
“오직 아빠밈만이 해 쥬실 수 있는 일이에여.”
“…….”
그의 입술은 쉬이 허락을 뱉어 내지 않았다.
“위험한 일은 없을 꼬에요. 새벽 시간대에 상주하고 있는 직원이 많이 없을 테니까.”
“아가님 말이 맞습니다. 새벽 세 시에서 네 시 사이는 신문을 찍어내는 기계를 담당하는 분만 계시거든요.”
폴이 내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럼에도 이든의 미간은 좀처럼 반듯하게 펴질 줄을 몰랐다.
어째 우리 사자님께서 날이 갈수록 겁쟁이가 되시는 것 같다.
나는 그를 설득하기 위해서 조막만 한 양손으로 그의 새끼손가락을 살포시 잡았다.
“정 걱정되시면 아빠의 낮 새와 밤 쥐를 붙여 쥬시면 되져.”
“……고려해 보도록 하겠다.”
여전히 마음에 안 들어 보였지만, 일단은 암묵적인 허락이 떨어졌다.
좋았어!
오늘 새벽 내로 작전을 모두 성공시키려면 쉴 틈이 없었다.
나는 팔을 걷어붙이고서 책상 위의 새 종이와 깃털 펜을 꺼냈다.
“그럼 일단 던버르레 공쟉가에 편지를 보내 미끼부터 던져 볼까여?”
이내 종이 위에 삐뚤빼뚤한 글씨체로 한 글자씩 적어 내려갔다.
편지의 시작 글은 이러했다.
<안녕하세요 돈벌르레 공쟉밈. 엿 줄 게 있어서 편지함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