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초저녁 무렵. 던버르레 공작의 앞으로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던버르레 공작은 한창 기르신 남작과 체스를 두고 있던 중이었다. 두 사람은 종종 만나 돌아가는 정세에 대해 떠들곤 했다.
오늘도 숱한 날 중 하나였다.
평소였으면 승부가 날 때까지 체스에 집중했을 던버르레 공작이 편지의 발신인을 보더니 마음을 돌렸다.
의외의 편지는 라이언하트 백작가에서 온 것이었다.
그는 곧장 편지를 확인했다.
<안녕하세요 돈벌르레 공쟉밈. 엿 줄게 있어서 편지함미다.
혹쉬 요식업에 투자하실 생각없으신가여? 관심 있으시다면 시간 내쥬세요. 오늘 새벽 세 시에 우리 아빠가 직접 찾아 뵙겠슴미다.>
어린아이의 서투른 글씨를 거듭 읽어도 의도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츄르 사업 건에 대해서는 거절의 의사를 밝혔던 거 아니었나?’
츄릅츄릅병이 처음 확산되었을 때, 치료제인 츄르 장사를 투자해 주겠다는 제안을 했으나 답변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당연히 거절인 줄 알았거늘…….’
그로부터 두 달 가까이 지난 시점에 답변이 온 것이다.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던 건가?
분명 숨겨진 의도가 있을 터.
던버르레 공작이 골똘히 상념에 잠겨 있자, 마주 앉은 기르신 남작이 체스판 위에 말을 올려놓으며 눈치를 살폈다.
‘대체 누구에게서 온 편지이기에 그러시는 거지?’
기르신 남작은 의아했다.
내용을 확인한 이후로 체스 말을 두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진 던버르레 공작은 체스 승부는 이미 뒷전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좀처럼 호기심을 참기 어려웠던 기르신 남작이 넌지시 물었다.
“이 야밤에 온 걸 보면 급한 전갈인가 봅니다.”
“그러게 말일세.”
그제야 던버르레 공작은 편지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뭐가 급하다고 이 야밤에 보냈을꼬.’
그것도 당일 새벽에 만나자는 당돌하기도, 또 한편으로는 무례하기도 한 요구가 담긴.
생각을 마친 던버르레가 체스 말을 집으며 기르신을 쳐다봤다.
“요즘 쓸 만한 기사는 있소?”
영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하나 그가 상대를 허투루 떠보는 사람은 아니니, 기르신은 순순히 대답을 내놓았다.
“특종이라 붙일 건 딱히 없습니다. 가정의 달 전에는 대부분 사건 사고 없이 조용히 지내려고 몸들을 사리니까요.”
“쯧, 이맘때쯤 특종감이 필요하겠군그래.”
“그런 기삿감이 나타나 준다면야 고마울 따름이죠. 얼마큼 큰 특종이냐에 따라서 매출과 직결되는 문제니까요.”
아쉬운 소리를 해 대던 기르신 남작은 문득 던버르레 공작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간 것을 발견했다.
“혹, 쓸 만한 특종을 알고 계신 겁니까?”
“지금 여기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소만.”
어쩐지 번뜩이는 던버르레 공작의 두 눈이 음흉해 보였다.
* * *
어언 새벽 세 시가 넘어가는 시간.
사진술사 폴의 말대로 거의 대부분의 직원이 퇴근한 기르신 신문사 내부에는 커다란 인쇄 기계만 바삐 돌아가고 있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 폴. 신문에 실릴 메인 기사가 바뀌었다니?”
남직원이 인쇄 기계의 작동을 멈추며 폴에게 물었다. 그러면서 그의 등 뒤에 업힌 내 쪽으로 힐끔 시선을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네. 특종을 취재해서요.”
“그런 말은 전달받은 바가 없는데…….”
그가 교대 일지를 연신 들춰 보며 의아해했다.
의심이 많은 자네.
아무래도 기르신 신문사는 큰 기삿거리가 있으면 미리 귀띔을 해 주는 시스템인 모양이었다.
“어……. 그러니까.”
폴은 의연하지 못했다.
‘누가 봐도 거짓말인 티를 팍팍 내면 어쩌자는 거야.’
대놓고 광고하는 폴을 대신해 내가 앞으로 나섰다.
“특종은 원래 어느 날 갑쟈기 터지쟈나요.”
“그건 그렇긴 하다만…….”
남직원이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목소리를 낮춰 폴에게 귀엣말을 했다. 여전히 나를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폴. 네가 아무리 동생을 끔찍이 아낀다고 해도 인쇄실에는 외부인 출입 금지라고 하지 않았니?”
사내의 시선이 이제는 아예 대놓고 내게 향했다. 그는 폴이 어린애 장난에 맞춰 주는 중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표정을 보니 생각이 읽혔다.
‘이럴 줄 알았다니까.’
어느 정도 예상 범주 내에 있던 반응이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준비해왔던 작전을 펼쳤다.
그의 의심을 깨부술 방법은 간단했다.
“그럼 이대로 단독 보도 기회를 놓치실 생각인 곤가.”
“단독 특종이라고?”
“단독 놓치면 손해가 한두 푼이 아닐 텐뎨. 그럼 윗선에서도 엄청 깨지실 테고.”
우리를 내쫓으려 했던 남자의 희끗희끗한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것은 곧 그가 미끼를 물었음을 뜻했다.
그럼 그렇지.
나는 결정적인 한 방을 날렸다.
“무려 귀족가와 관련이 있는 특종이고든여.”
“진작 그렇게 말하지. 시간 맞추려면 지금부터 바로 찍어 내야 하니까, 서둘러야겠구나.”
곧장 인쇄 기계의 종이를 교체하는 사내에게 준비한 새로운 기사를 건넸다.
“평소보다 두 배 정도 많이 뽑으면 되겠…… 잠깐만. 정말 이 기사가 나간다고?”
눈썰미도 좋으셔라.
그새 바뀐 기사를 읽었나 보다. 남자 직원은 꽤나 충격 먹은 얼굴로 우리를 바라봤다.
‘하기야. 가뭄의 단비처럼 나타난 특종이 하필이면 다페 남작가와 관련되었으니.’
놀라는 반응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우리가 쓴 기사는 세도가의 동맹을 깨트리는 시발점이 될 만큼 파급력이 컸으니까.
“더 의문은 갖지 않으시는 게 앞으로의 안위에 이로우실 꼬에요.”
챙겨 온 금괴 하나를 그의 앞으로 들이밀었다.
남자의 일 년 치 봉급을 훌쩍 넘을 정도의 순도 높은 금덩이었다.
당연하게도 곧바로 반응이 왔다.
떨리는 눈가의 잔주름은 금덩이가 의미하는 바를 잘 알고 있었다.
“……몇 부를 뽑으면 됩니까?”
남자의 말투가 급 공손해졌다.
그제야 내가 범상치 않은 존재라는 걸 깨달은 것 같았다.
“가능한 많이, 그리고 가급적 될 수 있는 대로 빨리요.”
“예, 알겠습니다.”
남직원이 능숙하게 멈췄던 기계를 재작동시켰다.
타다다다다닥.
순식간에 D―검투장에 관한 비판이 적힌 기사가 1면을 장식한 신문이 무수히 찍혀 나왔다.
“혹쉬 집에 돌봐야 할 가족이 있다면 지금 당장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을 데리고 멀리 도망가세여.”
그러지 않으면 해가 중천에 뜨기도 전에 다페 남작가의 희생양이 될 거예요.
뒷말을 생략하는 대신, 또 다른 금괴 하나를 직원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는 내 말의 뜻을 알아들었다.
“명심하겠습니다.”
직원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신문사를 떠났다.
불 켜진 신문사에는 나와 폴, 그리고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어딘가 잠복해 있을 피헨느. 이렇게 셋만이 남게 되었다.
“아가님, 배포는 어찌하실 거예요?”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여. 우리에겐 마법의 됴토리가 있으니.”
“마법의 도토리요?”
“으흥흥, 그런 게 이써요.”
이번 작전의 치트 키거든요.
궁금해하는 폴에게 자세히 설명해 줄 수는 없었다.
설사 마법의 도토리 속에 무게나 크기, 개수에 상관없이 뭐든지 압축해서 넣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고 하더라도 곧이곧대로 믿을지는 의문이었다.
그래도 확신할 수는 있어.
동이 트기 전, 비스 전역에 신문이 뿌려지리라는 것을.
나는 발 빠른 토리의 실력을 믿고 있다.
문득 시간을 봤다.
어느덧 시곗바늘은 다섯 시를 지나고 있었다.
인간이 가장 방심하게 된다는 여명의 시간이었다.
“폴, 드디어 꿈을 이룰 수 있겠녜여.”
“모두 아가님 덕분입니다.”
순조롭게 흘러가는 작전에 승리를 예감하는 우리의 앞으로 낯선 이의 구둣발 소리가 가까워졌다.
소리의 근원은 출입문 방향 쪽이었다.
“이런, 이런, 이런.”
누가 악당 아니랄까 봐.
여느 이야기 속 빌런의 등장처럼 기르신 남작은 어둠을 뚫고 나타났다.
“던버르레 공작께서 말씀하신 특종이 이것인 줄은 몰랐는데.”
그가 방금 막 인쇄되어 나온 신문을 집어 들었다.
‘역시 호락호락하게 흘러가지 않네.’
내심 별 탈 없는 성공을 기대했으나, 상대는 만만치 않았다.
‘아빠를 만나면서 동시에 상황 파악을 위해 사람을 보내다니.’
역시나 던버르레 공작은 쉽게 볼 자가 아니었다.
빠르게 활자를 읽어 내려가는 기르신의 눈동자가 반달로 휘었다.
“깜찍한 일들을 벌였네.”
“기, 기르신 남작님!”
폴이 두려움에 뒷걸음질쳤다.
“폴, 이런 식으로 네가 뒤통수를 칠 줄은 몰랐다. 그것도 고작 네 살밖에 안 먹은 백작 영애의 쥐새끼 노릇을 하기 위해서.”
콰직.
기르신 남작의 투박한 손이 빳빳했던 종이를 인정사정없이 구겼다.
‘성질머리하고는.’
덜컥 겁을 먹은 폴이 내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작게 속삭였다.
“아가님, 뭔가 잘못됐습니다. 이 시간에 여기에 계실 분이 아닌데.”
“정보가 새어 나갔나 봐여.”
“어떡하죠? 아무래도 일단은 후퇴하는 게 좋을 것 같…….”
“아뇨. 그럴 필요 없써요. 어차피 도망쳐 봤쟈니까.”
나는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기르신 남작을 똑바로 노려봤다.
지금은 물러날 때가 아니야.
기르신 남작이 내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헛웃음을 흘렸다.
“영애의 부친께서는 이 말도 안 되는 기사를 내보내서 가문 간의 동맹을 깨트려 놓을 작전이었나 봅니다. 아주 어리석게도.”
“어리석은 게 누구인지는 챠챠 보셔야 할 텐뎨.”
“오냐오냐 자라셨나 봅니다.”
기르신의 눈동자가 싸늘히 식었다. 그는 인쇄 기계를 정지시켰다.
시끄럽던 기계 소리가 멈추자, 주변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특별히 관용을 베풀어 현행범으로 다페 남작가에 넘겨드리지요.”
무엇이 그리 재밌는지 기르신은 웃음을 있는 그대로 뱉었다.
쪼잔한 자식.
일전에 인터뷰에 응하지 않고, 자신을 물 먹인 것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게 분명했다.
철컹.
안쪽에서 문을 걸어 잠근 기르신이 자물쇠의 열쇠를 제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었다.
“자, 이제 출구는 없는데 천재 영애께서는 어쩔 생각인지 궁금해지는군요.”
그의 말대로다.
신문사의 창문은 어린아이인 내 키로는 넘을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다지 몸 쓰는 일에 능하지 않은 폴이 나를 데리고 도망칠 수 있는 확률은 적었다.
“뭐. 싹싹 빌어 보신다면 제 마음이 바뀔지도 모르겠지만.”
자신의 승리를 예측하듯 기르신은 오만하기 그지없었다.
보통 이런 상황이라면 간절히 신께 빌며 백마 탄 왕자라도 나타나길 빌겠지…….
하지만 나는 달랐다.
신은 늘 감당할 수 있는 시련만 주는 법.
이 정도 상황은 위기도 아니었다.
애초부터 내가 이런 상황이 오도록 설계한 것이니까.
“설마 이 정도 대책도 안 세워 놓고 여길 왔을 거라 생각하는 고에여?”
이 소설을 몇 번이나 거듭 읽었던 나였다.
애독자인 내가 이런 전개와 캐릭터 심리를 파악하지 못할 리가 없지 않은가?
“선택해야 하는 건, 우리가 아니라 기르신 남쟉 댱신이야.”
이봐, 악당 씨. 상대를 잘못 건드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