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아빠밈?”
혹시나 해서 조심스럽게 불렀다.
그러자 상자 안에 꾸깃꾸깃 구겨져서 어떻게든 들어가 있는 둥그렇게 말린 등이 움찔 반응을 보였다.
‘확실히 아빠네.’
도대체 왜 멀쩡한 의자를 내버려 두고 굳이 좁은 상자 안에 들어가 계시는 거람.
이든에게 총총총 다가가 등을 콕 찔렀다.
“거긴 왜 들어가 계셔여?”
“…….”
그는 미동도 없었다.
어쩐지 등이 성난 것처럼 보이는 건 느낌 탓일까?
“안 나오실 꼬에요?”
그제야 이든이 미적미적 상체를 일으켰다. 덩치가 커다란 성인 남자가 상자에 쏙 들어가 있는 모습은 정말이지 기묘한 풍경이었다.
“너.”
“녜?”
“너 말이야, 너…….”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무언가를 말할 듯 말 듯 벙긋거리는 입술은 불만을 품은 듯했다.
라이언하트가에서의 생활도 어언 4개월째.
이제 이 정도 눈치는 있다.
“혹쉬…… 삐졌써요?”
“내가? 전혀. 그럴 리 없다.”
그럴 리 없기는.
이미 뾰족해진 눈매가 그의 심기를 드러내 주고 있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더 대형 고양이 같으시네.’
그것도 마치 털을 바짝 세운 성난 고양이가 꼬리로 바닥을 팡팡팡 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계속 거기 계실 꼬에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러기엔 신경 써 달라는 티가 너무 나시는걸요?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걸 어떻게 달래 준담?
이든의 눈치를 보다가 슬쩍 입술을 열었다.
“다리가 아포서 아빠가 안아 쥬셨으면 했는데.”
“…….”
통했나?
곁눈질로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냥 보기에는 미동도 없어 보였으나, 분명 입술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거다!
나는 곧장 폴을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서 이든에게 들릴 만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안 되겠댜, 폴.”
“네, 아가님?”
영문을 모르는 폴이 고개를 순순히 대답했다.
“폴이 대신 안아 쥴래요? 아빠는 상자랑 노느라 바쁘셔서.”
“아가님을 안아 드리는 건 언제든지 얼마든지 가능하죠! 제게 체력은 차고 넘치거든요!”
그가 선뜻 내게 다가오려는데, 이든이 손을 올려 폴을 멈춰 세웠다.
“잘 됐군.”
무엇이 잘 됐다는 거지?
묻기도 전에 상황이 발생했다.
와르르.
상자 옆에 가지런히 차곡차곡 쌓여 있던 신문들이 마구잡이로 땅바닥에 쏟아졌다.
“!”
깜짝 놀라 쳐다보니 이든이 평온한 얼굴로 우리 쪽을 보고 있었다.
필시 고의로 쓰러트린 거였다.
그럼에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서 말했다.
“저런. 바람 때문에 쓰러졌네.”
“……창문은 닫혀 있는뎨여?”
“폴이 창문이 잘 닫혀 있나 확인해 주면 되겠군. 체력이 차고 넘친다고 했으니까.”
묘하게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폴의 무언가를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것이 분명했다.
“어렵지 않은 부탁이십니다. 얼른 확인하고 올게요!”
순진한 폴은 그저 해맑았다.
그가 비장한 표정으로 이든에게 받은 첫 임무(?)를 해결하러 발코니 밖으로 나간 사이, 이든이 나를 향해 팔을 뻗었다.
“이리 와.”
그제야 알아차렸다.
이든이 무엇에 심술이 난 건지를.
‘질투하는 사자님이라니.’
나는 왠지 모르게 쑥스러운 마음을 뒤로하고 이든에게 포르르 달려가 안겼다.
“있쨔나요, 아빠. 난 아빠가 안아 쥬는 게 세상에서 제일 죠아요.”
립서비스 역시 잊지 않았다.
* * *
결국 나는 이든의 품에 안겨서 못다 한 식사를 마저 하고, 이든의 품에 안긴 채로 집무실로 왔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그는 한순간도 나와 떨어지지 않았다.
정기 회의를 위해 리챠드와 프로스트 남작, 웨인투르, 폴이 모두 모였는데도 말이다.
“불편하지 않으십니까?”
리챠드가 보고서를 읽다 말고 이든에게 물었다.
“뭐가?”
“오전 내내 아가님을 안고 계셨으니, 이제 슬슬 팔이 아프실 때도 된 것 같아서 말입니다.”
“전혀. 신경 쓸 것 없다. 보고나 계속하도록.”
이든은 오히려 평온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휘적거렸다.
“각하께서 푹 빠지셨군요.”
리챠드의 입술 끝이 씰룩씰룩 움직였다. 당장이라도 놀리고 싶어서 안달 난 표정이었다.
‘저 장난꾸러기 또 시작하겠네.’
나는 냉큼 화제를 돌렸다.
“아빠. 던버르레 공쟉이랑 얘기는 오또케 됐어요?”
“생각해 보고 연락을 주겠다더군.”
“릴까스 가맹점 사업 건은 꽤 큰 거라서 금방 미끼를 물 줄 알았는뎨 의외로 조심스러운 구석이 있녜여.”
“원체 이해관계를 따지는 자들일수록 의심이 짙은 법이지.”
“그래도 뭐, 별수 있겠써요?”
나는 이든을 보며 씨익 웃었다.
“요즘 비스의 대세는 우리인뎨.”
당당히 허리에 손을 얹고 어깨를 으쓱거리는 나를 보며 이든이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맞는 말이다.”
제아무리 던버르레 공작이라고 해도 대세를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돈은 늘 흐름을 따라가는 법이니까.
츄르츄릅병의 유일한 치료제 ‘츄르’ 개발자, 황실배 요리 대회 우승자 가문.
게다가 비스의 메인 스트리트 최고의 음식점이라 칭송받는 포비에 식당의 매출을 바짝 추격하고 있는 ‘릴까스’의 창시자.
이 밖에도 우리에게 붙은 수식어는 많았다.
‘누가 뭐래도 라이언하트 가문이 대세 중에 대세야.’
간간이 신문에는 다음 달 열리는 에덴 제국의 대표적 축제 중 하나인 ‘가정의 달 행사’ 때 주목해야 할 귀족 가문에 ‘라이언하트’를 언급하기도 했다.
라이언하트 가문은 달라졌다.
‘예전에는 모두 이방인을 보듯이 했겠지만…….’
이제는 모두가 눈여겨보고, 어떤 이는 선망하기도 하는 가문이 되었다.
무시무시한 성장세를 보이는 곳에서 먼저 제안을 했으니, 던버르레 입장에서는 충분히 고려할 만했다.
“참, 기르신 남작은 어찌 처리하실 겁니까? 그자를 직접 데리고 올 줄은 몰랐습니다.”
리챠드가 서류를 덮으며 대화의 주제를 바꿨다.
‘아. 그러고 보니 기르신 남작을 까먹고 있었구나.’
새벽에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내가 기르신 남작과의 심리전에서 이긴 것도.
그리고 그 결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로 기르신 남작을 포획한 것도 모두 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
“지금 어디에 있써요?”
“급한 대로 일단 지하 감옥에 가둬 두었습니다.”
“녜?”
어디에 가뒀다고?
잘못 들은 건가 싶어서 되물었다.
“……저택에 지하 감옥이 있어써요?”
살짝 충격받은 얼굴로 쳐다보니, 이든이 리챠드의 옆구리를 툭 쳤다.
그제야 아차 싶었던 리챠드가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 절대 피 튀기는 고문과 협박을 일삼는 비밀 장소라고는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만.”
“방금 말했다.”
이든이 이마를 부여잡고 고개를 저었다.
이 남자들, 대체 뭘 꾸미고 있었던 거야?
물론 그들이 원작 소설 속에서의 역할이 악당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충분히 예상이 가능했다.
“생각하고 있는 거, 행동으로 옮기시면 안 돼여. 절대.”
내가 완강한 태도로 말하니 리챠드가 이든에게 귓속말을 했다.
“이런 말씀 드리기 뭐하지만, 제가 긴장하면 솔직해지는 편이라.”
“시끄럽다, 리챠드.”
“사랑합니다, 각하.”
머리 위에 하트를 그려 보인 리챠드는 이든에게 엉덩이를 걷어차일까 봐 후다닥 물러섰다.
‘못 말린다니까.’
나는 그 둘을 보고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엉덩이의 안위(?)를 무사히 챙긴 리챠드는 다시금 슬금슬금 이든에게 다가와 속닥거렸다.
“역시 각하의 뜻대로 그냥 처리해 버릴 걸 그랬습니다.”
“말하지 않았나. 그런 자식은 비료로 만들어서 프리마 숲에 뿌려 버려야 한다고.”
왜 개그 콤비 같은 이 남자들의 머리에는 잔혹한 복수밖에 없는 걸까.
나는 곧바로 대화를 지적했다.
“누굴 죽이고 그런 짓은 안 할 꼬에요.”
흠칫 놀란 리챠드가 눈을 부리부리하게 떴다.
“그럼 이대로 순순히 돌려보내실 겁니까?”
“아뇨. 자기가 한 잘못에 벌은 받아야져.”
“그럼 역시 피의 숙청을 준비시켜야겠군.”
이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리챠드가 ‘제게 맡겨만 주신다면야.’ 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맙소사.
두 남자는 아까부터 프로스트 남작과 폴, 웨인투르가 어떤 표정인지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기르신 남작은 물론, 그와 관련된 자까지 줄줄이 썰어 버리겠다고 나설 기세였다.
‘그럼 리아노 공작이나 모리스 대신관과 다를 게 없는 거잖아?’
나는 조금은 더 인도적인 차원에서 해결하고 싶었다.
“둘 다 그만요.”
내가 나서자 프로스트 남작과 폴, 웨인투르의 안색이 펴졌다.
“피의 대가는 언제고 돌아오게 되어 있써요. 살생은 하지 않을 꼬에요.”
세 사람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동의했다.
다행히 내 말이 잘 전달된 모양이다. 이든은 더 잔인한 복수법에 대해서 떠드는 대신 질문을 던졌다.
“그럼 어찌할 생각이지?”
집무실 안의 모든 시선이 나에게 집중됐다.
나는 그중 펜을 만지작거리며 눈치를 살피는 프로스트를 바라봤다.
“프로스트 남쟉밈.”
“예, 예? 저 말입니까, 아가님?”
프로스트의 어깨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고향이 어디셨져?”
“제 고향 말입니까?”
의외의 질문에 잠시 멈칫했던 프로스트의 얼굴이 점점 환해졌다.
그에게는 반가운 이야깃거리였다.
귀족들 사이에서는 좀처럼 환영받지 못하는 주제이나, 그는 자신의 고향에 애정을 갖고 있었다.
“제 고향은 대륙 최남단에서 배를 타고 더 들어가야 나오는 외딴섬이지요.”
“인구수는여?”
“사실 숫자를 세기도 민망할 정도입니다. 섬에 사는 이들은 다 제 직계 가족이거나 방계거든요.”
프로스트가 신이 나서 줄줄이 고향에 대한 정보를 늘어놓았다.
다른 이들의 표정을 보니, ‘갑자기 웬 섬에 관한 얘기지?’라고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 보였다.
아직 내 말뜻을 파악 못 하셨네.
“그럼 누군가를 감시하는 데도 좋겠녜요?”
이어지는 내 말을 듣고서야, 이든의 입술에서 ‘아.’ 하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제야 이해하신 모양이네.’
나는 빙긋 미소 지었다.
“두말하면 잔소리입니다. 심지어는 교통이 그리 좋지도 않은 편이거든요. 배가 따로 없어서 섬을 드나들려면 개인 선박을 이용하거나 배편을 구해야 하죠.”
프로스트가 계속해서 고향에 대해 떠드는 동안, 이든이 리챠드에게 무언가 지시를 내렸다.
으흠, 이로써 빌런 하나는 처리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