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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60/142)

60화

리챠드의 일 처리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속도였다.

저녁이 되기도 전, 기르신 남작을 태운 마차가 저택을 떠나 대륙 최남단의 작은 섬으로 향했다.

이든이 덧붙이길.

[그동안 헛소리를 써 젖힌다고 베었던 숲에게 반성하는 의미로 나무 50만 그루를 직접 심기 전까지는 섬에서 나오는 걸 금한다.]

마법 사용이나 타인의 도움도 없이 혼자만의 힘으로 50만 그루라니.

사실상 평생 유배지에서 썩으라는 거나 다름없었다.

뭐, 감옥에서 남은 평생 편안하게 살게 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차라리 잘 됐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바로 다음 날.

피헨느로부터 소식지가 도착했다.

이든과 함께 느긋하게 정원을 거닐고 있을 때였다.

퍼덕퍼덕.

날갯짓 소리와 함께 정원으로 들어온 새 한 마리가 물고 온 쪽지를 이든에게 주었다.

나는 그게 곧 그의 세작인 피헨느로부터 왔음을 알아차렸다.

“피헨느한톄서 온 전서구죠?”

“슬슬 기사의 반응이 올 때가 됐지.”

이든이 나를 배려해 한쪽 무릎을 꿇고 자세를 낮췄다. 깔끔한 바지가 바닥의 흙으로 인해 지저분해졌다.

헉. 엄청 비싼 바지 아닌가?

원단값만 해도 웬만한 평민들의 한 달 월급으로도 못 살 만큼 고급 살롱의 옷이었다.

“앗, 바지 지저분해졌써요.”

“상관없다. 네가 편한 게 더 우선이니까.”

그는 옷이 지저분해지든 말든, 내 눈높이에 맞춰 피헨느의 쪽지를 펼쳐 주는 것에 더 집중했다.

그 덕분에 나는 편히 읽을 수 있었다.

<검투장에 VIP 고객들이 항의를 위해 몰려들어 마비가 되었습니다.

다페 남작은 본인의 영지로 피신 가 있는 상태이며, 현재 기르신 남작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VIP들이라 하면, 던버르레 공작가의 가신들이겠지?

현재 검투장의 상황이 어떨지 대충 머릿속에 그려졌다.

내가 쪽지를 다 읽은 것 같자, 이든은 새를 도로 날려 보냈다.

“다행이댜. 어제 미리 기르신 남작을 빼돌려서.”

“늦었더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당했을 것이다.”

“기르신 냠쟉이 비리를 덮어 준 건 다페 남쟉뿐만은 아닐 테니까요.”

“안 그래도 어젯밤, 저들끼리 긴급 회의를 열었더군. 보나 마나 기르신 남작의 행방을 찾는 것일 터.”

“그래 봤쟈죠. 죽었다 깨어나도 기르신 남쟉이 어디에 있는지 모를걸요?”

그만큼 프로스트의 고향은 은밀한 장소였다.

‘아니, 사람들에게 잊힌 장소라고 해야 하나?’

어찌 됐건, 귀족들의 약점을 쥔 자가 사라졌으니 똥줄이 탈 것이다.

뿌듯함에 으흥흥 웃음이 나왔다.

“기르신 남작을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득권층을 견제할 패가 되겠군.”

“마쟈요. 아쥬 결정적인 치트 키가 생긴 셈이죠.”

“치트 키……?”

이든이 눈썹을 까딱 치켜올렸다.

아차차, 단어 선택 미스.

아직 이 세계관에서는 없는 단어였다는 게 떠올랐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 드린담.

잠시 고민 끝에 보육원에서 노아가 잠들기 전 읽어 줬던 동화를 떠올렸다.

“그러니까, 동화책에 보면 공쥬밈이 위기에 빠진 순간에 쨘 하고 나타나는 백마 탄 왕쟈 같은 거예요.”

“백마 탄 왕자, 라…….”

생각에 잠긴 듯 아래턱을 매만지던 그가 나를 빤히 응시했다.

“그럼 너한테 치트 키는 누구지?”

“녜?”

뜬금없는 질문에 얼이 빠진 얼굴로 되물었다. 그러자 이든이 목소리를 내리깔며 말을 이었다.

“노아인가 뭔가 하는 그 꼬맹이 녀석은 아닐 테고.”

응?

갑자기 노아가 여기서 왜 나오는 걸까.

점점 미궁으로 흘러가는 대화에 내 의아함도 쌓여 갈 찰나.

이든이 은근히 기대하는 표정으로 나를 번쩍 안아 들며 물었다.

“당연히 나겠지?”

……아.

그제야 앞뒤 맥락도 없이 노아가 언급된 이유를 알아차렸다.

“그로니까 지금, 백마 탄 아빠가 되어 쥬시겠다는 걸 돌려 말하신 거죠?”

“……굳이 그렇게 콕 짚어서 되묻는 건 리챠드한테 배운 건가?”

시선을 피하는 그의 귀 끝이 붉었다. 쑥스러운 모양이었다.

새삼스럽게 그가 달라 보였다.

‘원작 속에 서술된 그 라이언하트와 동일 인물이 맞아?’ 하는 생각도 들었다.

원래의 운명이었다면 그는 가까운 미래에 ‘인간 학살자’로 불리게 될 악당이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에덴 제국에서 제일가는 딸 바보가 되시겠는걸?’

그간 생존을 위해서 너무 열심히 노력을 했던 걸까.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사자님을 단단히 조련시켜 버린 모양이다.

뭐, 내게는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어쩌면 모아 둔 독립 자금이 필요 없게 될지도…….’

조금은 설레발도 쳐졌다.

나는 싱숭생숭한 마음을 다잡으며 일단은 이 상황을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녜. 아빠가 짱임미다.”

그를 꼬옥 안으며 세상에서 제일 사랑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그러자 알게 모르게 들썩이는 억양으로 대답이 돌아왔다.

“바람직한 답변이군.”

* * *

4월의 기후는 아기가 산책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래서 그런지 이든은 요즘 들어 부쩍 자주 식사 후, 나를 데리고 볕을 쐤다.

우리는 주로 그의 비밀 정원 앞 커다란 나무 아래서 시간을 보냈다. 일전에 내가 리챠드 몰래 도토리를 숨기려고 했던 그곳이었다.

‘도토리 마도구들은 안 들키고 잘 묻혀 있으려나?’

문득 궁금해졌다.

이든은 이따금씩 내 곁을 지키며 햇볕을 쬐다가 나른함을 이기지 못하고 졸곤 했다.

그건 네 달 전만 해도 불면증을 앓았던 그에게 찾아온 놀라운 변화 중 하나였다.

‘물론 당사자가 부끄러워할까 봐서 부러 깨우진 않았지만.’

오늘은 그때를 이용해 묻어 둔 도토리가 잘 있는지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아빠?”

한참 흙장난을 하다가 작은 목소리로 나무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는 그를 불러 보았다.

“…….”

“코 잠드셨써요?”

햇살이 선물한 잠에 빠진 듯, 굳게 감긴 두 눈꺼풀 앞에 손을 휙휙 흔들어 보았다.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잠드셨다!’

나는 그가 낮잠에 빠졌음을 확신하며 아까부터 봐 두었던 곳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읏챠!”

이든이 깨기 전 후다닥 파 보기만 하고 다시 덮어 둘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어째 묻어 둔 도토리 마도구가 나올 생각을 안 했다.

이상하다. 내 기억으로는 그리 깊이 구덩이를 파진 않았던 것 같은데.

“여기가 아닌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흙 묻은 손으로 뺨을 긁적였다.

방향을 가늠해 보기 위해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데, 등 뒤에서 불쑥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이번엔 또 뭘 숨기려는 거지?”

“앗, 깜짝이야!”

화들짝 놀란 나는 제자리에서 껑충 뛰었다.

콩닥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돌아보니, 나무에 비스듬히 기댄 채로 피식 웃음을 터트린 이든이 보였다.

언제 깨신 거람.

“아무것또 안 해써요.”

“거짓말로 나를 속일 생각이었거든, 조금 더 성의 있게 준비했어야지.”

이든은 미세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나를 자신의 다리에 앉혔다. 그리고선 내 뺨에 묻은 흙을 조심스러운 손길로 털어 주었다.

결국 나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실은…… 전에 묻어 뒀던 도토리가 잘 있나 찾아보려고 해써요.”

“전에 리챠드가 사들였다던 신문이 든 마도구?”

기억 못 하실 줄 알았는데.

의외라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그라면 금방 도토리를 묻어 둔 위치를 정확히 찾아 줄 것 같았다.

“녜. 그거요. 여기쯤에다 묻어 둔 기억이 있는데, 이상하게 아무리 파도 안 나와여.”

“그야 당연하지.”

“녜?”

뭐가 당연하단 걸까?

두 눈을 끔뻑이며 서서히 벌어지는 그의 입술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 안에 있는 것들. 리챠드가 다 팔았으니까.”

“녜?!”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이게 무슨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소리야!

“팔아요? 그걸 누구한톄? 얼마를 쥬고? 아니, 것보다 대체 왜?”

“나한테. 돈은 장당 천쯤 줬나? 이유는…… 생략하도록 하지.”

“장당 천 달란이여?”

“영을 빼먹었군.”

“만 달란씩이나 줬다구여!?”

“두 개 빼먹었다.”

세상에. 그 신문을 장당 십만 달란씩이나 쳐 줬다니!

나는 벌어진 입을 틀어막고 털썩 주저앉았다.

불현듯 리챠드가 장난기 넘치는 표정을 지으며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혹 제 지갑 걱정을 해 주시는 겁니까? 그런 거라면 마음 놓으셔도 됩니다. 요즘 제게 돈 나올 구멍이 생겨서 말입니다.]

그 돈 나올 구멍이라는 게 아빠였어? 그것도 내가 숨겨 놓은 도토리 속의 신문들로?!

뛰어난 후각으로 도토리를 숨겨둔 곳을 찾아냈을 리챠드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그려졌다.

‘한 방 먹어 버렸다.’

어질어질한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게 그렇게 충격인가?”

이든이 양 갈래로 묶은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믿었던 멍멍이한테 발등 물린 기분이에여.”

“배신감이 크겠군.”

이든이 웃음을 삼키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참으로 평화로운 오후였다.

불어오는 봄바람과 함께 근처에서 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삐이이―.

곧이어 우리 앞에 새 한 마리가 착지했다. 며칠 전에 피헨느의 전서를 물고 왔던 그 새였다.

<던버르레 공작가 측근들이 이번 검투장 사건으로 재판을 연다고 합니다.>

쪽지를 확인한 우리의 시선이 뒤엉켰다.

드디어 기다리던 소식이 왔다.

이 판을 완전히 우리가 장악할 수 있을 정도로 타격이 큰 소식이.

“던버르레 공작가 측근의 가신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니 비스에 큰 파장이 일겠군.”

“돈에 미친 인간들이 하는 짓이야 뻔하져.”

“눈에 뵈는 것이 없겠지.”

“이번 일로 세도가의 얄팍한 동맹이 흔들릴 검미다.”

나는 그들이 다페 남작을 매장하고 싶어 하리라는 것을 확신했다.

물론 다페 남작 또한 모리스 대신관의 사람이라 쉽사리 그렇게 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그로 인해 검투장 운영을 정지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큰 수확이었다.

잔혹한 문화를 폐지시키는 건 물론, 다페 남작의 세력 팽창을 막을 수 있게 됐으니까.

“이래서 관계 와장창 작전이라고 했던 건가?”

“정답임미다! 그리고 곧 더 큰 게 올 꼬에요.”

“더 큰 것이라면?”

“검튜장 소유권이 풀리쟈나여.”

“차지할 생각인 건가?”

역시 척하면 척 알아듣는 건 우리 사자님밖에 없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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