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61/142)

61화

영지로 도망친 다페 남작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닷새도 안 돼서 벌어진 일이었다.

비스의 어느 곳을 가든, 모두 ‘다페 남작의 재판’에 관한 얘기뿐이었다.

마침 분위기를 살피러 메인 스트리트로 정찰을 나온 나와 이든도 그 소문들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큰 의미 없이 방문한 포비에 식당에서였다.

“이번 일에 얽힌 큰 손들이 작정을 했다며?”

“그 망나니 같은 다페 남작까지 소환시킬 정도면 말 다 했지 뭐.”

바로 뒤의 테이블에 앉은 귀족들이 떠드는 말이 귓등에 박혔다.

입고 있는 옷깃의 단추를 보아하니, 그들은 던버르레 공작가의 가신이었다.

“잘 됐어. 안 그래도 마음에 안 들던 참인데.”

“기르신 그자가 그렇게 뒤통수를 치고 잠적할 줄 누가 알았겠어.”

“차라리 이대로 안 나타났으면 좋겠네.”

“그쪽과 거래를 끊을 생각이야?”

“대체할 신문사는 널렸으니까. 신뢰가 깨진 곳이랑 누가 손 잡고 싶어 하겠어?”

“하긴. 나도 영 찝찝한 건 마찬가지라…….”

그들이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고스란히 우리 귀에 들어왔다.

맞은편에 앉아 스테이크를 썰던 이든이 나이프질을 멈추고 낮게 중얼거렸다.

“실로 얄팍한 관계로군.”

그도 던버르레 공작가 쪽의 사람들의 대화를 들은 모양이었다.

“말씀드렸쟈나요. 돈으로 맺어진 관계는 돈으로 깨트릴 수 있다구.”

“당분간 다페 남작을 상대할 일은 없겠어.”

“이 기세라면 가정의 달 황실 연회에도 참석하지 못할 꼬에요.”

“적수 하나를 제친 셈인가.”

“정답임미다!”

이든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어?’

웃으셨다.

보기 드문 미소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그가 괜스레 헛기침하며 먹기 좋게 썬 스테이크를 내 앞으로 밀어 주었다.

“먹어.”

“아빠는요?”

“생각 없다.”

하지만…….

선뜻 포크질을 하지 않았다.

‘어른을 바로 앞에 두고 혼자 먹는 건, 조금 신경 쓰이는걸.’

k―유교걸로서의 본능이었다.

칼질된 스테이크를 앞에 두고 머뭇거리는 내 속마음이 그에게 닿은 걸까.

이든이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내가 만들어 준 스틱형 츄르였다.

“난 이거로 충분해.”

눈치 보였던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내심 내가 만든 것을 그가 열심히 맛있게 먹어 준다는 사실이 기쁘기도 했다.

‘왠지, 인정받는 기분이야.’

나는 조금 들뜬 마음으로 포크를 들어 올렸다.

“그럼 사양 않고 잘 먹겠슴미다!”

포크로 스테이크를 콕, 찍어 한 입에 쏙 집어넣었다.

입에 넣자마자 가득 퍼지는 육즙이 정말이지 황홀했다.

아무리 경쟁사라지만, 너무 맛있는 거 아니야?

나는 빵빵해진 볼을 감쌌다.

행복의 앓는 소리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흐아아아.”

“그렇게 맛있나?”

말해 뭐 해.

내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이든은 비장한 표정으로 벌떡 일어서 어딘가로 향했다.

‘응?’

화장실이라도 급하신 걸까.

다시 한 조각 냠, 입에 물며 이든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그는 한창 청소를 하고 있는 직원을 불러 세우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뭐라고 하시는 거지?’

귀를 쫑긋 세우고 그가 하는 말에 집중했다.

“얼마면 되지?”

“네?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지…….”

빗자루를 쥔 직원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눈치였다. 그러나 이든은 그런 것쯤은 전혀 개의치 않고 할 말을 계속했다.

“얼마면 저 스테이크를 만든 주방장을 넘길 거냐고 물었다.”

“죄송하지만, 어르신. 그건 제가 대답해 드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서…….”

“그럼 식당을 인수하지.”

“예에?!”

엄청난 소리에 놀란 직원은 빗자루를 떨구며 펄쩍 뛰었다.

……아이코. 저런.

저대로 두었다가는 못 말리는 우리 사자님께서 끝도 없는 방법으로 직원을 놀라 기절시킬 것 같았다.

저 직원분의 심장 건강을 위해서라도 말려야겠네.

“아빠. 스테이크 썰어 쥬세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우리 테이블로 다시 돌아왔다.

그러고는 포크와 나이프를 들더니 서걱 서걱 서걱!

스테이크를 조금 더 작은 크기로 썰어 주었다.

“더 작게 잘라야 하나?”

“아뇨, 딱 죠아요. 아빠 최고!”

이든의 등 뒤로 기가 빠진 듯 흐물흐물 걸어가는 직원을 보며, 새로 썬 스테이크를 입에 쏘옥 넣었다.

으흥흥, 맛있어.

조금 전 이든이 나를 위해서 식당까지 인수하려는 모습을 봐서 그런지, 괜히 더 맛있게 느껴졌다.

왠지 사랑을 듬뿍 받는 기분이랄까.

절로 흘러나오는 콧노래를 작게 흥얼거리며 이제 막 다섯 번째 조각을 입에 넣었을 즘이었다.

접시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아니, 이게 누군가? 라이언하트 백작 아니신가?”

아잇, 참.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누구야?

불청객들의 얼굴을 보려고 획 고개를 돌렸다.

놀랍게도 눈앞에 선 이들은 조금 전 다페 남작의 소문에 대해 떠들던 던버르레 공작가의 가신들이었다.

“!”

상황 파악을 위해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뭐야. 갑자기 이들이 왜?’

도무지 이유를 알기 어려웠다.

접점이 딱히 없는 자들이라 이름도 성도 모를뿐더러, 알은체를 해 오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고민도 잠시.

이어지는 그들의 말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자네도 로얄 클럽 정기 모임에 참석하러 나온 겐가?”

“……정기 모임?”

이든이 낯선 이들을 경계하며 날카로운 말투로 되물었다.

갑작스럽게 싸늘해진 분위기 때문에 입맛이 한 번에 싹 가셨다.

‘오늘이 로얄 클럽 정기 모임이 있는 날이었어?’

처음 듣는 얘기였다.

이든 쪽을 슬쩍 쳐다보니, 그가 고개를 저었다.

따로 연락받은 바가 없다는 뜻이었다.

“어디서 하는 곤뎨요?”

“……저런. 초대장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나 보구려.”

이름 모를 귀족은 눈치가 빨랐다.

우리가 로얄 클럽 정기 모임 초대장을 받지 못했다는 걸 금방 알아차렸다.

이내 그 둘은 괜한 입방정을 떨었다는 듯이 괜스레 목을 가다듬으면서 시선을 흘렸다.

“크흠.”

아하. 이렇게들 은근히 왕따 시키겠다 이거지?

나는 금방 상황 파악을 끝냈다.

나, 루나 라이언하트. 이 드럽고 치사한 피폐물 소설에 빙의한 후로 이런 식의 눈치 싸움에는 이골이 나 있었다.

‘안 그래도, 그동안 왜 로얄 클럽에서 초대장이 안 오나 했다.’

사실 이든이 코노미야 백작에게 추천서를 받은 지는 오래였다.

내가 알기로 로얄 클럽의 정기 모임은 꽤 잦은 편이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는 한 번도 초대장을 받지 못했다.

‘로얄 클럽 명부에는 올려 주되, 실제로 어울리지는 않겠다는 건가?’

딱 봐도 뻔히 그려지는 그림이었다.

지금 우리 라이언하트 가문은 로얄 클럽 내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거였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은, 우리에게 선을 그으려는 로얄 클럽 놈들에게 엿을 먹여 줄 수 있는 기회이고.’

나는 여느 때보다 뻔뻔하고 당돌한 말투로 말했다.

“가끔 우체부들이 편지를 빠트리기도 하쟈나요.”

“뭐……. 그런 경우가 가끔가다 있긴 하지.”

그들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애꿎은 출입문만 쳐다보고 있는 걸 보아하니, 빨리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럼 식사나 마저 하게나. 우린 이만 볼일이 좀 있어서…….”

“잠꺈만요.”

이런 기회를 내가 놓칠 거 같아?

슬그머니 출입문으로 향하려는 그들을 붙잡아 세웠다.

내 눈에 띈 이상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나는 사망 플래그가 도사리고 있는 피폐물 소설 속에서 치트 키도 스스로 만들어 내는 엑스트라거든.

“밥은 다 먹어써요. 그쵸, 아빠?”

“그렇다.”

눈치 빠른 이든이 척하니까, 척 대답해 줬다.

“그래서 거기가 어디라구여?”

“라이언하트가도…… 참석할 생각인 건가?”

“못 갈 게 모가 이써요. 우리 아빠도 엄연히 로얄 클럽 멤버자냐요.”

우리가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들이 ‘끄응.’ 하며 당황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아고고, 더 늦장 부렸다가는 지각하겠써요. 얼른 출발할까요?”

그들을 향해 활짝 웃었다.

한번 뱉은 말은 못 주워 담는다더니.

그들은 하는 수 없이 앞장서서 우리를 로얄 클럽의 정기 모임이 있는 장소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어떤 빌런 놈의 뚝배기를 깨 줄까나.’

돌발 상황을 기회로 만드는 건 내게는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 * *

로얄 클럽의 정기 모임은 포비에 식당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이뤄졌다.

프리마 숲과 닿아 있는 승마장이 그 배경이었다.

한쪽에는 몇 귀족 무리들이 한창 승마를 즐기는 중이었다.

승마장과 이어진 넓은 들판에는 테이블을 둥그렇게 배치한 쉼터가 있었다.

일찍이 도착해 있던 귀족들이 쉼터로 들어서는 이든과 나를 발견하고서 수군거렸다.

“라이언하트 백작……?”

표정들을 보아하니 더 확실해졌다.

로얄 클럽 멤버들 중 누구도 우리를 반기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면 그럴수록 이든의 품에 안긴 나는 더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서 그에게 속삭였다.

“절대 주눅 들지 마세여.”

“내가 인간들 앞에서 그럴 리가.”

이든은 우아한 걸음걸이로 그들 앞을 지나쳤다.

모임에 참석한 이들 중, 어느 누구도 감히 우리 앞을 막아서지 않았다.

경계의 눈빛, 호기심의 눈빛, 놀라움의 눈빛.

다양한 감정이 우리에게 얽혀들었다.

‘확실히 다들 우리 가문을 의식하고 있네.’

귀족들의 크고 작은 행동들 하나하나를 통해 제국 내에서 우리 가문의 입지를 얼추 가늠해 볼 수 있었다.

“곧쟝 리아노 공쟉한테 가실 꼬에요?”

“당연한 소리를.”

이든은 가장 상석에 앉은 리아노 공작에게로 곧장 걸어갔다.

가까스로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리아노 공작이 우리 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리아노 공작은 사교 활동이 영 맞지 않은 모양이군.”

이든의 입 밖으로 나간 말은 인사말이라기보단 도발에 가까웠다.

의도대로 리아노 공작이 입술을 비뚜름하게 끌어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런. 그렇게 표정 관리를 못 해서야.”

“…….”

“왜. 내가 못 올 데라도 왔는가?”

이든이 리아노 공작의 맞은편 빈자리에 앉자, 완벽했던 포커페이스에 금이 갔다.

지금 표정, 아주 볼만하네.

나는 그대로 얼어붙어 있은 리아노 공작을 올려보며 말했다.

“다리 안 아포여?”

얼른 앉으시지 그래?

은근한 눈치를 담아 쏘아보니, 리아노 공작이 뒤늦게 표정 관리를 하며 착석했다.

“리아노 공작가는 조만간 전령을 바꿔야겠던데.”

이든이 운을 떼자, 리아노 공작의 눈빛이 그에게 사납게 부딪쳤다.

“영 실수가 많은 것 같아서 말이야.”

“그래야겠소. 쓴 적도 없는 것까지 만들어 전달하는 걸 보면.”

두 남자의 사이에서 은근한 신경전이 흘렀다.

나는 테이블 위 리아노 공작의 빈 잔에 물을 가득 부어 주었다.

“잘 지내셨써요?”

안부를 물었으나 상대는 답을 해 주지 않았다.

그저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나를 훑어볼 뿐이었다.

‘저런 싸가지 스튜 말아 먹을 놈이 왜 제국민들에게 선망을 받는 존재인지 모르겠네.’

흥.

콧방귀를 뀌며 리아노 공작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래, 지금 실컷 고귀한 척하라 그래.

머지않아서 우리 앞에서 빌빌 기게 되는 날이 올 테니까.

“요즘 기르신 남쟉님을 찾는 분들이 많으시던뎨.”

테이블 위에 올려진 핑거 푸드를 집으며 운을 뗐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우리에게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던 귀족들이 득달같이 몰려들었다.

“혹, 라이언하트가는 기르신 남작의 행방을 알고 있소?”

“내 기르신 남작가에 며칠 전부터 편지를 부치고 있는데 통 답장이 오지 않아서 말이오.”

“진쨔요? 우린 얼마 전에 남쟉밈이랑 티타임도 가졌는뎨.”

내 말을 들은 귀족들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독대를 가졌다고……?”

미미하게 떨리는 눈동자들에서 불안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개중에는 갈증을 참지 못하고 테이블에 놓인 남의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는 이도 있었다.

다들 어지간히 당황하신 모양이네.

체통도 잊은 그들의 꼴이 참으로 우스웠다.

“어떤 얘기를 나눴는가?”

“이런저런 얘기를 했쬬. 진쨔 진쨔 재밌었는뎨. 그쵸, 아빠?”

나는 자랑을 늘어놓는 어린아이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든을 올려다보았다.

눈치가 빠른 그는 내 말에 금세 장단을 맞춰 줬다.

“내 기억으로는 혼자 듣기 아까운 것도 제법 있었지.”

호박색 동공이 리아노 공작에게로 가서 닿았다.

리아노는 내색하지 않으려 했으나, 퍼석하게 마른 관자놀이 위로 핏줄이 서는 것만큼은 숨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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