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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62/142)

62화

리아노 공작의 입술이 서서히 벌어졌다.

“……어떤 재밌는 대화를 나눴는지 궁금하군그래.”

“맞소. 무슨 주제였소?”

근처에 있던 귀족들이 초조한 얼굴로 물었다.

시선이 일제히 이든과 나에게로 몰렸다.

‘리아노 공작도 숨길 만한 짓거리들을 많이 한 모양이네?’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려고 꽤 노력하는 것 같아 보였으나, 굳어진 입매하며 연신 침을 삼키느라 꿀렁대는 목젖은 긴장감을 확연하게 드러났다.

나는 귀족들을 차례대로 훑으며 입꼬리를 씨익 말아 올렸다.

“비밀임미다.”

“뭐?”

황당하다는 목소리가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비밀 얘기는 친한 사이에서만 하는 거래써요. 그쵸, 아빠?”

“확실히. 아무에게나 하는 건 아니지.”

이든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우리가 금방이라도 떠날 사람처럼 굴자, 리아노 공작이 답지 않게 조금 다급히 우리를 붙잡았다.

“내 아들과 친구 사이였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뇨아가 그렇게 말해써요?”

“그래. 그 아이와 보육원 시절 친하게 지냈던 거 아니었나?”

“녜. 친했쬬.”

바로 옆에서 이든이 못마땅한 신음을 흘리는 걸 들으며 말을 이어 갔다.

“근데 그건 뇨아랑 저랑의 관계인 거지, 공쟉밈이랑 제가 친한 건 아니쟈나요?”

“관계야 앞으로 서서히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더냐.”

강압 섞인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겉으로는 권유인 척하고 있으나, 그 속에는 의도가 뻔하게 들어 있었다.

‘순순히 털어놓으라는 거겠지.’

물론 그럴 생각은 일말도 없었다.

다시 반박을 하려는 그때, 승마장 쪽에서 시작을 알리는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탕!

이어지는 말발굽 소리에 대화는 잠시 끊겼다.

얼마 뒤 승마장에 있던 시종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각하!”

“무슨 일이지?”

“다름이 아니오라, 각하의 말에 문제가 생겨서…….”

시종은 부쩍 긴장한 얼굴로 귀엣말을 속삭였다.

대충 들리는 단어를 조합해 봤을 때, 리아노 공작이 탈 말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진즉 관리를 잘 해 놓으라고 했거늘.”

“송구합니다.”

싸늘한 눈초리가 시종을 빠르게 훑고 사라졌다.

이내 금방 불쾌한 표정을 지운 리아노 공작이 로얄 클럽의 귀족들을 향해 말했다.

“말의 상태가 좋지 않다고 하여 부득이하게 승마 일정을 미뤄야 할 것 같소.”

“저희는 괜찮습니다. 괜히 상태 좋지 않은 말을 탔다가 낙마하는 불상사가 있는 것보다 낫지요.”

아직 다들 제대로 승마를 즐기지도 않았을 텐데.

모두 이대로 오늘 모임이 끝나도 상관없다는 듯한 반응들이었다.

‘하기야,  폭탄 발언이나 다름없는 걸 들었으니 당연한 건가?’

대부분 어딘가 불편한 사람들처럼 초조하게 종종걸음으로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해서 말일세.”

리아노 공작이 말을 하다가 말고 나와 이든 쪽을 돌아봤다.

“라이언하트가는 다음 주 주말 일정이 어찌 되는가?”

그 콧대 높은 리아노 공작이 처음으로 기 싸움에서 한 수 접는 순간이었다.

* * *

로얄 클럽의 정기 모임에 예고도 없이 쳐들어간 날로부터 이틀 뒤.

나는 늘 그렇듯 아침 식사를 하기 전, 내 방에서 사업 매출표를 살펴보고 있었다.

‘으음. 나쁘지 않은 추이야.’

츄르와 릴까스 매출 지표를 한창 확인 중에 있는데 이든이 방으로 찾아왔다.

“리아노 공작가에서 편지가 도착했다.”

“리챠드는여?”

원래 편지를 가져다주는 일은 집사인 리챠드의 몫이었기에 그의 행방을 물었다.

이든은 편지를 내 앞에 내려놓으며 답했다.

“일전에 말했던, 추적 마법에 대비할 자를 만나러 갔다.”

“그 카멜레온 수인을 벌써 찾아써요?”

“이번에는 운이 좋았지.”

변신의 귀재인 카멜레온 수인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하는 능력을 가진 데다가, 성격까지 종잡을 수 없어서 찾기 힘들었을 텐데.

잘은 몰랐지만, 세작들이 엄청나게 수고를 해 줬으리라는 것만큼은 알았다.

“다행이에여. 리아노 공작 추적 마법 술식을 완성시키는 것보다 더 빨리 그분을 만나서.”

“아직 그 녀석이 협조하겠다고 한 건 아니니, 지켜봐야 할 일이다.”

“물론 그렇긴 하지만…….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쨔나요.”

방긋 웃으니 그의 굳어진 얼굴이 조금 유하게 풀어졌다.

“추적 마법 술식이 완성되는 시기는 알고 있나?”

“정확한 날짜는 모르지만, 올 초가을쯤으로 알고 있써요. 단풍이 예쁘게 물드는 시기라고 했거든요.”

원작에서 그리 쓰여 있었다.

작품 중후반부의 주요 에피소드 중 하나인 ‘사냥의 밤’.

나는 그 챕터의 첫 문장이 프리마 숲 군데군데를 붉은 잎으로 수놓은 단풍에 관한 묘사로 시작된다는 것을 똑똑히 기억했다.

“예지몽은 일반 꿈과는 달리 생생한 건가?”

“녜?”

“보통 꿈은 깨자마자 금방 잊히는 쪽이니까.”

“모든 꿈이 그런 건 아니구…… 그냥 단풍을 죠아해서 그래요.”

괜스레 뜨끔해서 나도 모르게 얼버무렸다.

그는 별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예지몽을 꾼다고 속여도 되는 걸까?’

덜컥 그런 걱정이 들었다.

처음에는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최근 들어 그와의 유대가 쌓이면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잡념이었다.

마음속이 금세 시끄러워졌다.

‘언젠가는…… 거짓말이었다고 밝혀야겠지?’

차마 지금 당장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 평화로운 일상이 깨질지도 모른다는 은근한 두려움.

그것이 나를 겁쟁이로 만들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빨리 설득해야겠군.”

이든의 혼잣말에 상념에서 번쩍 깨어났다.

그의 말대로 어느덧 시간은 빠르게 흘러 4월 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초가을인 9월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혹쉬라도 그분이 거절한다면…… 조금 빠듯하긴 하겠네여.”

그 시기에는 굵직한 메인 에피소드가 진행된다.

분명히 정신없이 바쁠 터였다.

‘피폐물 메인 스토리에서 사망 플래그가 빠질 리가 없을 테니까.’

나에게는 그 사망 플래그를 극복할 대비책이 필요했다.

불쑥.

이든이 내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 전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방법을 마련할 테니까.”

내 표정이 그렇게 안 좋았나?

이내 그가 자신의 이마를 내 이마 위에 콩, 아프지 않게 가져다 댔다.

그 별거 아닌 스킨십이 묘하게 안정감을 가져다줬다.

“나만 믿어.”

“녜. 아빠만 믿으께요.”

“기운을 차리니 이제야 우리 땅콩 같군.”

“아잇, 진쨔! 땅콩 아니라니까…….”

입술을 삐쭉 내미니, 그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내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일단 지금은 편지부터 확인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지?”

“편지는 아빠가 먼저 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여?”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내용은 절대로 전혀 궁금하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네가 먼저 확인하는 게 옳다.”

“하지만 보통 이런 건 가주가 먼저 확인하는 게 원칙이쟈나요.”

“그건 인간들이 정해 놓은 원칙이고. 내 규칙은 다르다.”

그가 내 앞에 놓인 편지를 향해 턱짓하며 덧붙였다.

“적어도 이곳에서는 편지의 주인이 먼저 확인하는 게 맞아.”

그제야 봉투에 적힌 이름이 보였다.

리아노 공작가를 상징하는 인장 밑으로 보이는 발신인에는…….

서툴고 친숙한 글씨체로 노아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리아노 공쟉이 자존심을 지키려고 뇨아한테 시켰나 봐여.”

“쓸데없는 짓만 골라서 하는군.”

어째 불퉁한 어투였다.

슬쩍 표정을 살피니 역시나 입꼬리가 도로 아래로 쳐져 있었다.

이대로 두면 반나절은 가겠지?

이 패턴은 이미 알고 있는 나였다.

“같이 보실래여?”

“내가 무엇 하러.”

“궁금하시지 않아여?”

“내가? 전혀. 그럴 리가.”

그가 자신의 말이 진심임을 증명하듯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하지만 사자님……. 거울 통해서 보고 계시는 모습, 다 비치는걸요?’

거울 속 그의 눈동자는 편지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굳이 지적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사자님의 자존심을 지켜 줄 줄 아는 스윗한 아가니까.

“제가 아직 글씨 읽는 거에 서툴러서 아빠의 도움이 필요할 꼬 같은뎨.”

“네가 그렇다면야. 사양하지 않도록 하지.”

이든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 편지를 펼쳐 보았다.

<친애하는 나의 루나에게.

루나, 답장이 너무 늦었지?

미안해. 그동안 너무 바빴거든.

무슨 이유인지, 공작님께서 답장을 보내는 걸 허락하지 않으시기도 했고.

다행히 지금은 괜찮아졌어.

아무튼 좋은 소식은, 공작님께서 너를 저택에 초대해도 된다고 허락해 주셨다는 거야!

마침 이번 주 주말에 로얄 클럽의 모임이 있다고 들었는데, 라이언하트 백작님과 함께 오지 않을래?

네가 좋아하는 미트볼 스튜랑 슈크림 빵을 준비해 달라고 부탁드려 볼게.

―항상 너를 그리워하는 노아로부터

(ps. 셀리 녀석이 자기는 무사히 잘 도착했으니 아줌마가 잘 지내고 있냐고 물어봐 달라는데…… 이게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네. 혹시 위험한 일에 휘말린 건 아니지?)>

직접 소리 내어 처음부터 끝까지 편지를 낭독해 준 이든이 의견을 덧붙였다.

“웨인투르에게 안부 전해 주면 좋아하겠군.”

“분명히요! 리아노 공쟉가에 같이 가면 졔일루 좋긴 하겠지만…….”

“그건 아직 무리다.”

“알고 이써요. 웨인투르는 워낙 유명 인사니까.”

검투장을 나온 이후 그녀는 줄곧 저택 안에서만 지냈다.

혹여라도 악인의 눈에 띄어 또다시 먹잇감이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이곳에서 계속 치료에 집중한 덕분에 전보다 살도 붙고 체력도 많이 좋아졌다.

‘얼른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 해 주고 싶은데…….’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다행히 웨인투르는 모든 상황을 이해하고 불만 없이 잘 견뎌 주었다.

“아, 그보다 웨인투르에게 물어봐 쥬실 게 이써요.”

“편지와 함께 전하도록 하지.”

“웨인투르가 맨날 끼고 다니는 그 빨간 장갑 있쟈나요.”

“그 쓸데없이 질기고 튼튼한 가죽 장갑 말인가?”

저번에 보니까 그걸 끼고 권투 연습을 하고 있더군, 하며 덧붙였다.

언제 그런 건 다 관찰하셨데.

“그걸 만든 가죽 공방의 장인을 만나야 해여.”

“그에 관련한 예지몽을 꿨나 보군.”

“녜. 이번 주말에 우리에게 큰 도움을 줄 꼬에요.”

“리아노 공작가에서 무슨 일이 생기는 건가?”

이든은 예리했다.

나는 덤덤한 말투로 내가 알고 있는 원작의 전개에 대해 털어놓았다.

“죽음의 위기가 있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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