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 (63/142)

63화

“죽음의 위기가 있써요.”

예정된 사망 플래그를 숨기지 않고 반쯤 솔직히 이든에게 공유한 것은 나름의 계획이 있어서였다.

나는 이번 주말에 벌어질 일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 있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말.

귀족들의 승마 취미.

그리고 우연한 리아노 공작가로의 초대.

이 세 가지 키워드를 하나로 엮는 것은 내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맘때쯤, 귀족가에서 낙마 사고가 많이 일어났댔어.’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외전에서 언급되길.

<주인공 노아가 가족과 첫사랑을 잃은 후의 첫 봄.

따뜻해진 날씨와는 달리 아직 노아의 계절은 꽁꽁 얼어붙은 겨울에 머물러 있었다.

아직 마음의 상처도 채 아물어지지 않은 그와는 달리 세상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생기가 넘쳤다.

사교의 계절이 찾아오니 사람들은 쉽게 모이고 흩어지길 반복했다.

노아에게 육체적 상처를 남긴 낙마 사고가 있던 그날도 흔하디흔한 사교 모임 중일 뿐이었다.>

원작과는 다르게, 노아가 리아노 공작가에서 지내게 됐지만…….

다른 상황은 얼추 비슷하게 맞아떨어졌다.

‘그러니까 분명, 이번 리아노 공작가를 방문했을 때 말과 관련된 사고가 일어날 거야.’

왠지 모르게 확신할 수 있었다.

동시에 나는 어떠한 사명감 같은 것을 느꼈다.

마치 내가 진짜 예지몽이라도 꾸는 아기인 것처럼 말이다.

‘노아를 지켜 줘야 해.’

훗날 노아는 어릴 적 있었던 낙마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고 서술됐다.

귀족의 세계에서 남자 어른이 승마를 하지 못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꽤 큰 문제이며 웃음거리였다.

“죽음의 위기?”

바닥에 낮게 깔린 서늘한 목소리가 귓등을 내리쳤다.

그 순간 나는 기나긴 상념의 늪에서 훌쩍 빠져나와 다시 눈앞의 현실에 집중할 수 있었다.

“누가 죽는다는 거지?”

되묻는 이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다 못해 살벌했다.

어찌나 많은 감정이 그 속에 함축되어 있던지.

나는 그만 벙어리라도 된 것처럼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누구든 그럴 일은 절대 없다.”

다시는. 다시는 그런 일은 없게 할 거야.

덧붙여지는 작은 중얼거림이 고막에 강렬히 꽂혔다.

사실 그건 나를 향한 질책이라기보다는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에 가까운 말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내 마음이 따끔한 걸까.

‘……아.’

이든이 말없이 돌아서서 방을 빠져나갔다.

나는 멀어지는 등을 보고서야 뒤늦게 깨달았다.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 그의 깊은 상처를 상기시켰다는 것을.

* * *

차라리 화라도 시원하게 내 줬으면 좋겠건만.

그 대화가 있은 후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죽음’에 대한 주제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암묵적인 동의였다.

그저 평소처럼 서로 마주 보고 밥을 먹고 산책을 하고 간간이 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보냈다.

그다음 날 카멜레온 수인을 만나러 갔던 리챠드가 돌아왔다.

“벤 쟝 씨께서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그런 상황만큼은 없기를 바랐건만.

카멜레온 수인, 벤 쟝이 어떤 연유에서인지 우리와 손잡기를 거부한 모양이다.

‘바람 잘 날 없는 이놈의 운명은 기어이 나를 죽음으로 밀어 넣으려고 애를 쓰는구나.’

입 안이 까끌까끌해졌다.

이건 실로 이든뿐만 아니라 내게도 큰일이었다.

“졔가 직접 만나 보고 올께여.”

“소용없을 거다. 이미 다른 모습으로 바꾸어 숨었을 테니.”

나를 말리는 이든의 목소리가 무덤덤했다.

“이럴 줄 알고 계셨써여?”

“원래 그런 자니까 어느 정도는.”

그럼 어떡해야 하지?

꽤 괜찮은 해결책이라 생각했던 것이 ‘꽝’이라는 걸 알게 됐을 때의 기분이란 쉬이 말로 표현이 되지 않았다.

머릿속이 새하얀 백지가 되어 버렸다.

‘그 방법 외에 추적 술식을 따돌릴 방법이 뭐가 있지?’

내가 가진 정보는 원작에 기댄 것들뿐이라, 아무리 생각해도 더 좋은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죄송해여.”

“무엇이.”

이든이 시선을 내리깔아 나를 바라보았다.

“차라리 졔가 뛰어난 마법사였다면 좋았을 텐뎨…….”

“그런 걸 바라고서 널 입양한 건 아니니까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지만. 제가 그런 능력이 있었더라면 츄적 마법을 방해할 수 있는 술식을 짤 수 있었을지도 모르쟈나요.”

새삼스럽게 내가 이 소설 속에 흔하디흔한 엑스트라라는 사실이 원망스러웠다.

내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더라면.

하다못해 뛰어난 능력이 있었더라면.

그럼 이까짓 위기 따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넘길 수 있을 텐데.

나약한 내 자신이 싫었다.

“네가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이든이 잔뜩 풀이 죽은 내 어깨를 토닥여 줬지만 그럼에도 좀처럼 기운이 나지 않았다.

자꾸만 최악의 전개만 머릿속에 스쳐 갔다.

‘대신관 모리스의 성격상, 이든을 찾아낸다면 당장에 죽이려고 하겠지?’

이참에 그는 물론 관련된 모두를 처리하려 할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리챠드, 릴리앙, 피헨느, 토리, 웨인투르, 프로스트…….

사랑하는 우리 식구들이 줄줄이 썰려 나갈 게 뻔했다.

나는 우리를 잃기 싫었다.

“방법은 어떻게든 찾을 것이니 걱정 마.”

“맞습니다. 아가님께서는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든과 리챠드의 다정한 속삭임에 나는 입술을 꼬옥 깨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는다면 나도 모르게 울음을 왈칵 터트릴 것만 같아서였다.

어째 나는 왜 점점 날이 갈수록 겁쟁이가 되는 걸까?

“원래 지켜야 할 것이 많은 자일수록 두려움이 큰 법이다.”

이번에도 이든은 내 속마음을 정확히 꿰뚫어 보았다.

“한데 말이다.”

앞으로 다가온 그가 허리를 숙여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신비로운 금빛 눈동자 속에 내가 가득했다.

그는 말없이 내 눈, 코, 입을 하나하나를 뇌리에 새기듯 찬찬히 뜯어보았다.

이내 흐트러진 내 빨간 리본을 고쳐 매 주며 입을 열었다.

“그건 네가 걱정할 게 아니야. 어른인 내 몫이지.”

내 눈가를 어루만지는 그의 손길이 부드러웠다.

“그 걱정이 현실이 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하지.”

그가 먼저 내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 * *

참으로 기나긴 한 주가 흘렀다.

그날 이후로 이든과 리챠드는 밤낮없이 집무실에 틀어박혔다.

내게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추적 마법 술식에 대한 대책을 세우느라 바쁜 것 같았다.

요 근래 매일 붙어 있던 그를 못 본 것도 벌써 엿새째.

묘하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마침내 리아노 공작가로 초대받은 날의 아침이 밝았다.

나는 눈을 뜨자마자 곧장 옷을 갈아입고 이든의 침실로 향했다.

“출발하까요?”

“벌써 준비를 다 한 건가?”

거울 앞에서 넥카라를 정리하던 이든이 나를 힐끗 바라봤다.

“녜. 혼자서도 척척척 스스로 해써요.”

“기특하군. 이제 이리 와.”

그가 내게 팔을 벌렸다.

‘정말 안겨도 되는 걸까?’

머뭇거리며 눈치를 보고만 있자, 이든이 다가와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렇게 눈치를 보는 건 너답지 않은데.”

“그치만…….”

제가 트라우마를 떠올리게 만들었잖아요.

웅얼웅얼 맺힌 말이 모래자갈처럼 입 안에 맴돌았다.

이든에게는 내가 굳이 입 밖으로 뱉지 않은 말들에 대해서 추측하는 초능력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가 이렇게 말할 리가 없었다.

“일전의 대화는 신경 쓸 거 없다.”

이든이 내 뒷머리를 커다란 팔로 감싸듯 끌어안았다.

익숙한 체취가 코끝을 찔렀다.

이내 평온함이 막을 새도 없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이 포근한 품이 어찌나 그리웠는지.

고작 엿새의 짧은 시간 동안 나를 괴롭혔던 막연한 두려움이 방파제에 부딪치는 파도의 포말처럼 사르르 흩어졌다.

등을 작게 토닥여 주는 이 손길도 그리웠어, 무척이나.

“네가 잘못한 건 아니니까, 내 눈치를 볼 필요 없다고.”

“백쟉밍…….”

괜스레 코끝이 시큰해졌다.

얼마 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가 내게 이마를 콩, 맞대었다.

“울보가 다 됐군.”

“쿨쩍.”

“얼른 뚝 해. 딸을 울리는 아빠로 소문나고 싶진 않으니.”

“녜, 뚜욱.”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자 그가 작게 미소 지었다.

“그럼 출발하도록 하지.”

다정한 품에 안겨 마차에 올랐다.

우리를 태운 마차가 메인 스트리트를 가로질러, 대신전을 지나 근처에 위치한 리아노 공작가의 저택에 멈춰 섰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안내를 맡은 집사 헤리티지 스폰서입니다.”

마중을 나온 집사가 마차 문을 열고 발판을 내려 주었다.

우리가 타고 온 마차 외에도 각기 다른 귀족가의 인장이 새겨진 마차들이 이미 줄지어 서 있었다.

모두 리아노 공작에게 초대받고 온 로얄 클럽 멤버들인 것 같은데…….

‘생각보다 마차 수가 적네?’

일전의 모임에 비해 눈에 띄게 적어진 마차 수를 보며 생각했다.

‘확실히 기르신 신문사의 폭로 사건이 세도가들의 사이에 영향을 미치고 있어.’

가신 회의 때 리챠드가 이든에게 보고하는 것을 어깨 너머로 듣기만 했었는데, 막상 두 눈으로 확인하니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

좋아. 이렇게 서서히 당신들의 썩어 빠진 세상을 무너트려 줄 거야.

“리아노 공작은?”

“각하께서는 먼저 오신 귀빈들과 대화하고 계십니다. 응접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앞장서서 걷는 집사의 뒤를 따라 중앙 회랑을 지났다.

‘노아는 어디 있으려나?’

도착하자마자 볼 수 있을 줄 알았건만.

몰려든 손님들로 부산스러운 저택의 분위기를 보아하니 내 예상과는 달랐다.

“집샤밈. 뇨아는 어디 이써요?”

“노아 도련님께서는 아침 일정을 소화하고 계십니다.”

“아침 일졍요?”

“보통 아침에는 마법 수업을 들으시지요.”

“!”

아침부터 훌쩍대느라 살짝 부어있던 눈이 번쩍 뜨였다.

‘벌써 마법 수업을 듣는다고?’

마음 한구석으로 선연한 불안함이 스쳤다.

편지에서 그런 말은 없었는데.

그간 이든과 가문 일에 신경 쓴다고 노아에게 소홀한 사이 그렇게 됐나 보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뇨아를 만나고 시포요!”

“응접실에 가 계시면 정해진 일정이 끝난 후에 불러 드리겠습니다.”

“아뇨. 지금 당쟝요.”

“죄송합니다, 영애님 그건…….”

곤란함을 표하며 적당히 돌릴 말을 고민하고 있는 집사의 입을 틀어막을 확실한 방법을 나는 알고 있었다.

“손님을 초대해 놓고 오래 기다리게 하는 건 귀족의 예의가 아니지 않아여?”

“각하께서는 이미 응접실에 계십니다.”

“라이언하트에 도착한 초대쟝에는 공쟉밈 이름이 아니라 뇨아의 이름이 적혔는걸요?”

뼈가 있는 말에 집사의 입술이 다물렸다.

그는 결국 품속의 회중시계를 들여다보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