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시면 10분 내로 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죠아요.”
집사를 따라 회랑 끝의 응접실로 향하면서 이든과 나는 리아노 공작저를 면밀히 관찰했다.
딱 소문 그대로였다.
‘과연 노블리스 오블리주라고 칭송받을 만하네.’
공작이라는 작위에 비하면 건물의 안팎은 지극히도 검소하게 보였다.
보통 공작가라 하면은 저택의 입구에서부터 불필요한 동상들이 늘어 서 있기 마련인데…….
리아노 공작가에서는 그런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렇게 감쪽같이 위장하고 있으니까 제국민들이 그 시커먼 속내를 알 리가 없지.’
타인의 모범이 된답시고 검소한 척 굴지만 나는 그가 그 누구보다 탐욕적이고 권력욕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각하께서는 이곳에 계십니다. 그리고 영애님께서는 따라오시죠. 3층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3층이요?”
“3층까지 보낸다고?”
이든과 나의 되물음에 집사가 반쯤 흘러내린 안경을 고쳐 쓰며 우리를 바라봤다.
“왜 그러십니까?”
“이 근처에 다른 방은 없써요?”
“있기는 있습니다. 하나 3층의 방이 너서리 룸이라 장난감이나 동화책이 갖춰져 있어 그쪽이 더 마음에 드실 텐데요.”
“그런 건 필요 없써요. 그냥 이 근처 아무 방으로 할래요.”
내가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곧장 대답하자, 안경 너머로 집사의 주름진 눈이 살짝 커졌다.
“보통 영애님 또래의 분들은 그 방을 선호하시는데…… 특이하시군요.”
아차, 너무 튀는 대답을 했나.
굳이 사서 감시 대상이 될 생각은 없었기에 잽싸게 어린아이가 할 법한 말을 꾸며 냈다.
“아빠랑 멀리 떨어지고 싶지 않아서 그래여. 어제 무서운 꿈 꿨꼬든요.”
“안 그래도 오는 길 내내 안고 왔으니, 근처 방으로 잡아 줬으면 좋겠군.”
이든까지 내 말에 거들고 나서니 다행히도 집사가 별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백작님께서 먼저 들어가시지요.”
집사가 로얄 클럽의 모임이 있는 응접실의 문을 열어 주었다.
하지만 이든은 선뜻 발걸음을 떼지 않고 서 있었다.
“얼른 가 보세여.”
“…….”
내심 불안한 얼굴이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죽음의 위기가 있써요.]
며칠 전 내가 했던 말 때문이었다. 그는 한시도 곁에 떨어지고 싶지 않은 것 같아 보였다.
마주친 시선을 통해서 그가 느끼는 감정들이 전해졌다.
나는 새끼손가락을 내밀어 보였다.
‘지켜 주시기로 약속하셨잖아요.’
그를 믿는다는 의미였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여. 바로 옆방이쟈나요.”
“무슨 일이 있으면 소리부터 지르고 보도록.”
이든이 뒷말은 생략하며 자신의 귀를 가리켰다.
여차하면 그 소리를 듣고 달려올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라는 걸 알았다.
“녜. 아빠만 믿어여.”
나는 그의 걱정을 덜어 주기 위해 밝은 얼굴로 손을 크게 흔들어 주었다.
그제야 그가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이든이 응접실로 들어가자, 집사가 옆방의 문을 열어 주었다.
“기다리시는 동안 음료는 오렌지 주스와 핫초코 중에서 어느 것으로 준비해 드리는 게 좋겠습니까?”
“아무거나 상관없써요. 약속한 10분 지키셔야 해여.”
나는 들어가자마자 정면으로 보이는 괘종시계를 보며 말했다.
“참, 오는 길에 무서운 꿈을 잡아먹는 악몽 인형도 가져오겠군요.”
집사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부지런히 방을 빠져나갔다.
나는 넓은 방 안을 찬찬히 둘러보며 생각에 잠겼다.
‘노아에게 별일 없어야 할 텐데.’
한쪽 벽면에는 대대로 마법사들의 배출해 낸 가문답게 크고 작은 마도구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한창 구경을 하던 중, 살짝 열린 테라스 창틈으로 시종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응접실 안에 나 혼자만 있어서 그런지 굳이 엿들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그들의 대화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 소식 들었어?”
“진즉 들었지. 쯧, 언젠가 그럴 줄 알았다니까.”
“피해를 본 가문끼리 합심해서 모였다더만.”
“내 들은 소문으로는 …….”
잠시 말을 멈추고 두리번거린 시종이 목소리를 한껏 내리깔고 비밀을 속삭였다.
“재판장까지 매수했다더군.”
“워낙 죄가 명확하고 빼도 박도 못할 증거도 있어서 유죄는 확실하니, 다페 남작에게 최대한 형을 세게 내리려는 것 같은데.”
“아예 날개 꺾인 새로 만들어 만들어 버릴 생각인가 보더라고.”
“다페 남작가가 몰락한다면, 권력의 축도 새롭게 바뀌려나?”
“아무래도 그러겠지? 잘 됐어 뭐. 각하께서 그리 달가워하지 않은 분이니까.”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더니.
딱 지금 상황이 그랬다.
다페 남작에 관한 소문이 밑바닥 계급에서부터 콧대 높은 귀족층에까지 널리 퍼진 것이다.
덕분에 이 대화만 들어도 현재 비스에서 다페 남작가의 입지가 어떤지 알 수 있었다.
“아휴. 어쨌든 간에, 그건 그거고. 우린 일이나 마저 하자고.”
“에라이, 쯧. 그래. 당장 우리한테 중요한 건 이 빌어먹을 말이 언제 우리 말을 좀 처들을지지.”
이어서 채찍이 무언가를 거칠게 내려치는 소리가 이어졌다.
―히히히이이잉!
말 울음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이 울려 퍼졌다.
나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놀라서 테라스로 가까이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무리 동물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지만 단 하나는 똑똑히 알 수 있었다.
그것이 그저 평범한 울음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에라이, 이 망할 가축들!”
재차 채찍질 소리와 함께 말이 큰 소리로 울었다.
―히히힝!
그건 고통에 찬 비명이었다.
“다른 것들은 때리면 말이라도 듣는데 이건 원!”
분풀이에 가까운 폭언과 뒤섞인 채찍 소리는 섬뜩했다.
―히히히히잉!
동물의 울음소리에도 감정이 담겨 있다는 걸 처음 느꼈다.
마치 구조 신호처럼 느껴지는 외침에 나는 마음속 깊은 곳의 충동을 이기지 못했다.
“멈쵸!”
통유리 문을 벌컥 열고 테라스로 나갔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남자 시종 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희 말입니까?”
그들은 내가 누구인지 정확히 모르나, 입고 있는 옷차림새로 리아노 공작의 손님이라는 걸 짐작하는 듯했다.
공손히 모아진 손에는 빳빳한 가죽 채찍이 들려 있었다.
‘잔인한 사람들.’
그걸로 어찌했는지는 굳이 두 눈으로 확인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푸르르르―.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아 거친 숨을 뱉는 망아지가 나무에 묶여 있었다.
주변 잔디밭 위로 사정없이 말발굽 모양이 찍혀 있는 것이 모든 상황을 증명했다.
“때리지 마!”
“네?”
“그거로 때리지 말라구!”
나는 채찍을 노려보며 외쳤다.
그리고 동시에.
“무슨 일이지?”
시종들이 무어라 대답도 하기 전에 테라스가 연결된 옆 응접실의 창이 열리며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이든이 자리를 박차고 나온 것이었다.
“감히 누가 누굴 때린다는 거야.”
이든이 사납게 치켜뜬 눈을 하고 성큼성큼 내 쪽으로 걸어왔다.
당장에라도 누구 하나 때려죽일 기세시네.
그는 등 뒤로 쏟아지는 응접실 안에 있던 귀족들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았다.
“미치지 않고서야 내 딸은 아니겠지.”
“오, 오, 오해십니다! 저희는 그저 말을 길들이고 있었을 뿐입니다!”
시종들이 격하게 손사래 치며 변명을 늘어놓기 급급했다.
나는 냉큼 이든에게로 쪼르르 달려가 일러바쳤다.
“말이 울어써요. 아프다구.”
그들이 들고 있는 채찍을 가리키며 말했다.
몇 마디 하지 않았음에도 이든은 모든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손때 탄 가죽 채찍과 떨고 있는 어린 망아지.
이 두 가지만으로도 상황 판단은 충분했다.
한층 더 가라앉은 맹수의 눈동자는 내가 봐도 등골이 오싹했다.
‘오늘 어쩌면 끝장을 볼지도 모르겠네.’
덜컥 겁을 집어삼킨 시종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영애님께서 저 망아지의 울음소리 때문에 놀라신 것 같습니다.”
끝까지 잘못은 없으시다?
애초에 그들은 자신들이 한 행위가 끔찍했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하긴……. 이 세계는 가치관 자체가 틀려먹은 놈들이 득실득실하니 당연한 건가?
그래도 직접 이유를 듣고 싶어서 질문을 참지 않았다.
“왜 때린 고야?”
“왜냐니요? 그야 가축을 길들이는 데 이게 가장 효과적이니 말입니다. 일종의 교육입니다.”
역시나 당당한 대답이 돌아왔다.
교육? 웃기지 말라고 그래.
그것은 폭력을 그럴듯한 이름으로 포장하는 위선일 뿐이었다.
“틀려써요. 더 죠은 방법도 있써요.”
“채찍질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다고요?”
“녜. 교감이여.”
짧은 정적이 흘렀다.
이내 누군가 웃음을 터트림으로써 그 적막은 깨졌다.
“하하하하!”
조금 전까지 이든과 함께 응접실에 있던 귀족들 중 하나였다.
한 명이 웃기 시작하니 다른 이들도 따라서 웃음을 흘렸다.
뭐가 그리들 우스운지.
웃음은 멈출 줄을 몰랐다.
곧 무리들이 갈라지더니 그 가운데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눈가를 닦는 시늉을 하는 그의 열 손가락 빼곡히 값비싼 반지가 껴 있었다.
‘……던버르레 공작.’
그가 누군지 한눈에 알아봤다.
저 정도로 사치를 과시하고 다닐 이는 이 제국에 단 한 사람밖에 없었으니까.
“라이언하트 영애께서는 아직 어려서 동화 속 얘기가 현실인 줄 아나 보오.”
던버르레 공작의 말 한마디에 잠자코 있던 리아노 공작이 입을 열었다.
“딸아이들이 다 그렇지 않소?”
은근한 무시와 비웃음의 눈빛이 섞여 있었다.
‘어리다고 깔보는 것도 정도가 있지.’
내 겉모습이 아기라서 그런지, 그들은 내가 비꼬는 말을 못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기야. 개 버릇은 남 못 준다고.
평소에도 약하거나 어린 사람 앞에서 오만하기 그지없는 자들이니, 내 앞에서 저러는 것도 당연했다.
“다 그렇다뇨?”
“심약하다는 게 꼭 나쁜 것은 아니니 고깝게 듣지 말거라.”
나를 내리깔아 보는 리아노 공작의 시선이 오만하기 그지없었다.
무시로 일관하는 귀족들의 태도를 보고 오히려 발끈한 것은 이든이었다.
나를 대신해서 나서려는 그의 팔을 잡아 세웠다.
‘걱정 마세요, 사자님. 빌런 뚝배기 브레이커 아가는 이런 일로 울지 않아요.’
내 마음이 제대로 전달된 걸까?
이든은 여전히 화를 억누른 듯한 숨을 내뱉을 뿐 분노를 겉으로 표출하지 않았다.
이제 내가 나설 차례였다.
“그럼 저랑 내기 하나 해여!”
“내기?”
“돈벌레 공쟉밈이든 리아노 공쟉밈이든 더 자신 있으신 분이 대표로 나서세요.”
“무엇을 걸고 하자는 것이지?”
“사과요. 제가 이기면 무례한 언행과 교육 방법이 잘못됐다는 걸 인정하고 사과하시면 됨미다.”
내 말을 들은 던버르레가 내게 대답을 하긴커녕, 주변의 귀족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거 이제 보니 라이언하트가도 리아노 공작가 버금가는 교육자 가문일세그려.”
그의 말에 귀족들이 와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상대를 앞에 두고 저들끼리 웃어 젖히는 건 정말이지 무례함을 넘어 무식함의 정점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던버르레 공작, 당신이 잘못 생각하는 게 있어.’
다른 귀족가 영애들은 이런 식으로 무안을 받으면 울며 도망쳤겠지만, 난 아니거든.
나는 처음보다 더 떳떳하고 당당한 얼굴로 또박또박 발음했다.
“어떤 이유로든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써요.”
“재미있군그래.”
웃기려고 한 말은 하나도 없는데.
어째서 그와 추종자들은 나를 마치 희극인 보듯 보는 걸까?
“미안하지만, 영애. 무릇 내기란 상대방이 끌릴 만한 것을 걸고 해야 하는 것이다.”
리아노 공작이 비웃음이 걸린 얼굴로 내게 충고를 던졌다.
정 그러시다면야 구미가 당기는 걸 걸어 드려야겠네.
나는 리아노 공작과 던버르레 공작을 번갈아 바라보며 대답했다.
“공쟉밈들도 신문에 나오고 싶으신 건가.”
“뭐라?”
자신의 귀를 의심하듯 던버르레 공작이 눈썹을 찌푸리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공쟉밈이 이기시면 기르신 냠쟉밈한테 들은 비밀이 몬지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안 되겠녜.”
두 공작의 눈빛이 돌변했다. 여유가 사라진 늙은 여우는 곧 적대감을 풍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