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원래라면 마법 수업이 한창이어야 했을 리아노 공작저의 작은 서재.
마법서를 읽는 소리 대신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음…….”
이 정도면 괜찮은가?
전신 거울 앞에 선 노아는 잔뜩 심각한 얼굴로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오랜만에 본다.’
……루나.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바람에 흩날리는 민들레 홀씨처럼 마음이 둥실 떠올랐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에 발이라도 달린 걸까.
쿵쿵거리는 박동 소리가 고막까지 차올랐다.
당장에라도 루나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뛰어가고만 싶은데…….
[라이언하트 백작 영애께서 뵙기를 청하셨습니다. 리아노 공작가문의 일원으로서 품위를 떨어트리는 행동은 삼가 주시길 바랍니다.]
조금 전 리아노 공작저의 총 책임 집사, 헤리티지 집사가 으름장을 놓은 덕에 아직까지 거울 앞에 매여 있었다.
‘그래, 기왕이면 잘 적응해서 지내는 모습을 보여 주면 좋으니까.’
괜히 그녀에게 걱정할 일을 만들어 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거울 앞을 서성이며 괜스레 옷매무새만 만지작거리기를 수십 번째.
“꼴값 떤다.”
쯧 혀를 차는 소리가 정적을 깨고 통 튀어나왔다.
‘이 재수 없는 목소리는…….’
보나 마나 그 녀석이었다.
그다지 서로 반가운 사이는 아닌, 서류상 동거인인 셀리.
한 지붕 아래 살고 있는 노아와 셀리는 오며 가며 자주 마주치지만, 좀처럼 친해질 기미가 없었다.
‘요 며칠 전, 어딘가 다녀온 후부터 잠잠하나 했더니만. 다시 또 시작이네.’
처음 노아가 리아노 공작저에 왔을 때처럼 시비 걸러 온 폼이었다.
“야, 굴러들어 온 돌.”
그럴 줄 알았다.
짧게 한숨을 내쉰 노아는 밀리지 않고 받아쳤다.
“뭐, 박힌 돌.”
“이게 진짜. 내가 너보다 누나거든?”
셀리가 발끈하든 말든.
전혀 관심이 없는 노아는 나비넥타이를 매만지며 물었다.
“그래서 하려던 말이 뭔데.”
“어우, 저 싸가지.”
그건 내가 할 말이거든?
말씨름을 하라면 할 수 있겠지만, 더 했다가는 입만 아플 것 같아서 그냥 말을 아꼈다.
“그 코찔찔이 일 쳤어.”
“누구.”
심드렁한 투의 대답이 돌아왔다.
‘어쭈? 관심이 없겠다?
셀리의 마음속에 묘한 오기가 피어올랐다.
‘그래, 네가 언제까지 그러나 보자.’
그녀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설명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네 친구 있잖아. 키는 코딱지만 해서 얼굴은 허여멀게 가지고 양 갈래 묶고 다니는 코찔찔이.”
“루나?!”
화들짝 높아진 언성이 돌아왔다.
시종일관 무관심한 태도였던 노아에게서 평온함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루나가 뭐 어쨌는데? 왜? 무슨 일인데?”
그는 마치 달리는 마차 위에 얹어진 투명한 물컵 같았다.
감정의 결이 격하게 출렁이는 게 훤히 보였다.
‘그래, 그 코찔찔이 얘기라면 이럴 줄 알았다니까.’
은근한 승리감이 셀리를 감쌌다.
“어. 방금 오는 길에 봤는데 1층 테라스에서 각하와 던버르레 공작이랑 한 판 붙은 거 같던…… 야! 너 어디 가! 사람 말은 끝까지 듣고 가야지!”
저게 진짜!
셀리가 뛰쳐나가는 노아의 등에다가 대고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노아는 멈추지 않았다.
등 뒤에서 그녀가 뭐라고 소리를 치든 말든,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루나’에 관한 생각뿐이었다.
그저 1층을 향해 달렸다.
‘루나, 무슨 일 생긴 거 아니지?’
계단을 다급히 내려가는 발걸음에 점점 속도가 붙었다.
‘아무 일 없게 해 주세요. 제발.’
눈 깜짝할 사이에 계단을 내려오느라 턱 끝까지 숨이 차올랐다.
허억. 허억. 허억.
심장이 터질 듯이 요동쳐도 오로지 한 생각뿐이었다.
‘루나를 지켜 줘야 해.’
숨 돌릴 틈도 없이 1층 테라스의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마침내 익숙한 것들이 보였다.
햇살 아래에서 반짝이는 새하얀 겨울 눈을 닮은 그 애의 눈부신 머리카락이라든가.
봄처럼 따뜻하면서도 절대로 연약하지 않은 그 애의 목소리.
그리고 어떤 것에도 굴복하지 않는 그 애의 정의로운 신념 같은 것들이 차례대로 노아의 마음을 빼앗아 갔다.
“어떤 이유로든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써요.”
루나는 자기보다 몇 배는 더 큰 어른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당당히 말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또 누구를 지키려고 저러는 걸까.’
그러고 보면 늘 루나는 약자의 편이었다.
지난번, 보육원 창고에 몰래 들어온 다람쥐를 발견했을 때만 해도 그랬다.
[해치지 않으면 우리를 공격하지 않을 꼬야.]
루나는 수업 시간에 배운 대로 다람쥐를 잡아 죽이는 대신, 숲에 풀어 주자고 했다.
그러면서 입버릇처럼 ‘힘은 약자를 괴롭히라고 있는 게 아냐. 도와주라고 있는 거지.’ 하고 덧붙였다.
이상했다.
리아노 공작가의 교육 담당 선생님들은 ‘약한 존재는 힘으로 짓눌러 통치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것이 귀족의 자세라고 배웠다.
무릇 귀족이라면 그래야 한다고 했기에 노아도 당연히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눈앞의 작은 아이는 그 틀에서 벗어났다.
자기 자신도 작고 약한 존재면서.
자꾸만 약자들을 위해 나서서 싸운다.
리아노 공작가에서 배운 바로는 그건 멍청하고 잘못된 짓이었다.
하지만 왠지 노아는 그게 싫지 않았다.
봄 햇살처럼 따뜻한 그녀의 신념이 자꾸만 그의 세포 구석구석으로 스며들었다.
노아는 생각했다.
어쩌면 틀린 건 루나가 아니라 어른들일지도 모른다고.
* * *
한여름의 태양이 내 목구멍 속에 처박히기라도 한 걸까.
뜨거운 것이 속안을 틀어막고 들끓기라도 하는 것처럼 깊은 갈증이 느껴졌다.
“지금 나를 협박하는 것이냐?”
던버르레 공작이 나를 쏘아보았다.
“협박이라뇨. 대화를 하자는 곤뎨 오해하셨나 봄미다.”
공격적인 말투를 보아하니 던버르레 공작도 나와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하기야. 그런 말을 들었으니 본색을 드러낼 만도 하나?
[공쟉밈들이 이기시면 기르신 냠쟉밈한테 들은 비밀이 몬지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안 되겠녜.]
돌려 말해 ‘너도 다페 남작처럼 특종 나 보고 싶냐?’는 뜻의 발언은 도화선이 됐다.
늘 고귀한 척 구는 리아노 공작의 안면이 빠르게 굳은 걸 보면 확실히 그랬다.
“하하하. 일단 꼬마 영애께서 무슨 내기를 하자는 건지 들어 보심이 어떻습니까?”
“맞습니다, 공작님.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닐 겁니다.”
두 공작을 둘러싼 추종자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노한 마음을 달래기 바빴다.
고작 해 봐야 네 살배기 어린애가 머리 굴려 봤자죠.
딱 그렇게 생각하는 눈빛이었다.
과연 그럴까?
“그래. 일단 말해 봐라. 무엇으로 나와 내기하고 싶은 것인지.”
깊은 숨을 내쉬며 뒤틀린 심기를 정리한 리아노 공작이 입을 열었다.
그것만을 기다렸던 나는 냉큼 나무에 묶인 망아지를 가리켰다.
“리아노 공쟉밈의 말로 해요.”
“지금 내게 승마 시합을 겨루자고 한 것이냐?”
네가 나를 승마로 이기겠다고?
감히?
비틀린 입매를 통해 마음의 소리가 적나라하게 전달됐다.
“왜여. 자신 없으신 건가?”
“이제 겨우 젖이나 뗐을 어린애와 대결하는 건, 사내로서의 체면이 영 서지 않아서 말이야.”
문득 리아노 공작이 내 뒤로 시선을 던졌다.
……어딜 보는 거지?
“차라리 내 후계자 녀석과 대결하는 건 어떤가?”
“!”
후계자라면?
단번에 떠오른 얼굴이 있었다.
나는 다급히 뒤로 돌아 리아노 공작이 바라보는 쪽을 확인했다.
‘역시나.’
테라스 입구에 노아가 서 있었다.
“네게 특별히 가문을 대표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
“제……가요?”
갑작스러운 이목 집중에 노아는 긴장한 듯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어찌하겠냐?”
“전…….”
“기꺼이 가문의 이름을 드높이기 위해 나서겠느냐?”
강압적인 음성이 공기를 짓눌렀다.
대답을 할 듯 말 듯 입술을 잠시 달싹이던 노아가 문득 나를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이내 결심을 내렸는지, 노아가 깊은 숨을 내뱉었다.
노아는 영특한 아이였다.
리아노 공작의 성격상 가문의 명성을 드높이는 일을 한다면 몹시 기뻐하리라는 걸 잘 알았다.
그리고 그로 인해 자신에게 어떤 대가가 돌아올지도 말이다.
노아의 입술이 서서히 벌어졌다.
‘……저 바보……!’
나는 본능적으로 그 여린 입술이 하겠노라고 대답하리라는 걸 알아차렸다.
‘안 돼!’
저 입을 막아야만 했다.
이대로 그냥 노아가 승마 내기에 응하게 된다면, 외전에 쓰인 대로 낙마로 크게 다치게 될 게 뻔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막을 거야.
“뇨아는 안 돼여!”
후다닥 달려가 노아와 리아노 공작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자연스레 리아노 공작의 곱지 않은 시선을 내가 독차지하게 됐다.
“설마 진심으로 나와 대결하기를 원하는 건 아니라고 믿고 싶구나.”
점수를 따기 위해 틈틈이 기회를 보던 주변 가신들이 이때다 싶어서 거들고 나섰다.
“그러려면 한참 더 커야 하는 거 아닙니까? 지금으로서는 말에 어찌 올라탄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앉아나 있을지 모르니 말입니다.”
하하하하! 한 명이 웃자 하나둘 따라 웃기 시작했다.
그래. 다들 실컷 비웃으라지.
노아를 지킬 수만 있다면야 그런 것쯤은 나에게 아무런 상처도 되지 않았다.
“그럼 저를 대신해서 우리 아빠가 공쟉밈의 상대가 되어 드리면요?”
그러면 노아가 승마를 강요받게 되는 일도 없겠지.
“라이언하트 백작이 말인가?”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든에게로 쏠렸다.
난데없이 지목당했음에도 맹수의 동공은 평온했다.
마치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이.
“내 딸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이든이 의견을 표하자, 두 남자를 둘러싼 공기가 미묘하게 바뀌었다.
티 내지 않으려 했으나, 귀족들은 이 흥미진진한 대결이 어찌 흘러갈지 관심이 생긴 듯했다.
“둘 즁 어느 분이 대표로 나서실래요?”
재차 두 공작을 자극했다.
성인 남성과 어린애의 승마 대결이라면 모양 빠지는 내기가 되겠지만, 이든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힘 있고 젊으며 세간에서 신흥 강자로 평가받고 있는 이든 라이언하트 백작.
그런 자를 꺾는 모습을 보여 준다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힘을 과시할 수 있을 것이다.
남자들의 세계란 그랬다.
힘은 힘으로 증명하는 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 있는 법.
두 남자가 권력의 중심에 있는 이상, 반응할 수밖에 없는 미끼였다.
“좋다. 내가 하지.”
늙은 여우가 미끼를 물었다.
앞으로 나선 리아노 공작을 보니 반사적으로 입술 끝이 말려 올라갔다.
‘리아노는 이번 기회에 자신이 우리보다 우위에 있음을 모두에게 각인시키려고 하겠지?’
하지만 틀렸다.
판을 쥐고 있는 건 그가 아니라 나다.
이번 기회에 그걸 모두에게 똑똑히 보여 줄 생각이었다.
“공쟉밈이 말하는 폭력이 옳은 방법인지, 제가 말한 교감이 옳은 방법인지. 서로 증명해 보이쟈구요.”
“종목은 네가 정했으니, 방식은 내가 정하겠다.”
“상관없써요.”
무얼 떠올린 건지.
리아노 공작은 여유로워진 표정으로 시종을 앞장세워 우리를 저택 뒤 마구간으로 데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