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마구간은 가운데 말뚝을 기준으로 두 공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각각의 공간에 있는 말들은 외양과 상태에서부터 쓰임새가 달라 보였다.
딱 보기에도 화려하고 윤기가 흐르는 갈퀴를 지닌 백마들은 특별 관리 대상 같았다. 이를테면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과시용 미술품처럼 말이다.
‘이쪽은 마차를 끄는 말인가?’
인위적으로 미간 사이에 리아노 공작가를 대표하는 인장 모양으로 털이 염색되어 있었다.
이든과 나는 조용히 표정을 굳혔다.
그것을 알 리가 없는 시종은 아무렇지도 않게 백마가 모여 있는 곳을 지나쳐, 위용 넘치는 흑마들이 있는 곳에 멈춰 섰다.
“이쪽이 승마를 위해 길러지고 있는 말들입니다.”
저마다 쇠로 된 재갈을 물고 있는 검은 말들이 푸르르, 투레질을 했다.
묘하게 화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
내 착각이 아닐 것이다.
입에 물린 거추장스러운 쇳덩이가 불편한 듯, 잘근잘근 씹어 대는 모습을 통해 말의 감정이 읽혔다.
하지만 그것도 모르는 ―실은 관심이 없는 것에 가까울― 귀족들은 그저 점수를 따기 위해 리아노 공작에게 알랑방귀를 뀌기 바빴다.
“오오! 역시 승마하면 리아노 공작가라는 얘기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닙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게 자랑스러운 훈장이라도 되는 양, 리아노 공작이 으스대며 나섰다.
“이 녀석이 가장 우수한 품종이오. 내게 우승 트로피를 가장 많이 안겨 준 녀석이지.”
그가 유난히 몸에 상처가 많은 흑마의 재갈을 끌어당겼다.
―푸르르르!
흑마는 화가 난 듯 목을 거칠게 흔들며 앞발을 높이 쳐들었다.
“이크!”
마침 가까이 있던 귀족들이 순간적으로 뒷걸음질치지 않았더라면, 말굽에 치일 뻔한 순간이었다.
“고 녀석. 힘이 넘치는군요.”
“길들이기 쉬운 녀석은 아니었소. 북반구에서 들여온 야생마거든.”
리아노가 성난 흑마의 고삐를 강하게 흔들며 말했다.
귀족들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 말이 북반구의 야생마였소? 어쩐지 속도가 남다르더니!”
“이거야 원. 여태까지도 리아노 공작가의 승마를 이길 자가 없었지만, 앞으로는 더 불가능한 일이 되겠습니다.”
귀족들은 흑마를 다시 돌아보며 감탄을 내질렀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북반구의 야생마는 웬만한 사내들에게는 꿈의 말일 테니까.’
세상에서 가장 빠르고 가장 힘이 좋은 말.
그 말을 두고 세간에는 이런 풍문도 떠돌았다.
“북반구의 야생마를 길들이는 남자는 천하통일도 가능할 거라던데. 리아노 공작께서는 역시 사내 중에 사내인가 봅니다!”
그래, 저런 한심한 헛소리 말이야.
그러니까 이 세계관 속, 북반구의 야생마는 이를테면 ‘삼국지의 적토마’ 같은 존재였다.
“워낙 호락호락하지 않은 종이라 길들이는 게 어렵다던데…….”
“길들이는 게 웬 말이오? 내 듣기로는 안장에 앉기만 해도 기적이라 들었소.”
존경 어린 시선이 잇달았다.
귀족들도 구하기 힘든 북반구 야생마는 승마용이라기보다는 관상용이었다.
그런 말을 굳이 내서 자랑해 보인다는 건…….
“내기는 이 말로 하는 건 어떻소?”
그래,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약속한 기간까지 말을 빌려드릴 터이니, 나와 경마 시합을 겨루는 게 어떻겠는가? 각자 기록을 재서 승부를 내는 걸세.”
“북반구의 야생마를 길들이는 건 둘째 치고, 매년 승마 대회 일등이신 공작님을 이기라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 아닙니까?”
누군가가 혀를 내두르며 우리의 패배를 속단했다.
“혹시 모르지 않은가? 라이언하트 백작 영애의 말대로 짐승과 교감한다면 기적이라도 일어날지?”
리아노는 비아냥을 뱉어 내며, 멸시에 가까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기간은 특별히 한 달 주지.”
누가 보면 인심이라도 크게 쓰는 줄 알겠네.
나는 오만하기 그지없는 리아노 공작이나 그를 추종하는 이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모두 눈여겨보았다.
“이거 공개적으로 괜히 망신만 당하게 생겼소. 지금이라도 백작 영애께서 감히 무례하게 굴었다고 잘못을 빈다면, 리아노 공작께서 용서해 주시지 않을까 싶소이다만.”
패배를 인정하라는 종용의 눈빛이 쏟아졌다.
미안하지만, 아저씨들…….
죽었다 깨어나도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나는 그럴수록 오히려 더 떳떳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한 달까지 필요 없써요.”
“뭐?”
뜻밖의 발언에 귀족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모두가 불쾌함을 드러내는 가운데, 잠자코 있던 이든이 나섰다.
“2주 뒤, 가정의 달 연회날 보여 주지.”
이든은 귀족들을 사이를 가로질러, 리아노 공작의 앞에 섰다.
“그러니 그 손은 놓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고삐를 쥐어 당기고 있는 리아노 공작을 향한 말이었다. 그의 손등 위로 힘줄이 붉어져 나왔다.
“……백작께서는 그 연회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듯하오.”
나는 이든의 옆으로 쪼르르 다가가서 그 대신 대답을 했다. 리아노 공작의 표정이 조금 더 좋지 않아졌다.
“알고 있슴미다.”
모를 리가 있나.
이 소설의 열혈 독자로서 가정의 달 연회가 의미하는 바를 모를 리가 없잖아?
‘가정의 달 연회 때 내기 결과를 가리자.’는 말은 곧, 가문의 명예를 걸고 겨루자는 걸 뜻했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에 그 뜻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심지어 수인족인 이든조차도 말이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이군.”
이든의 대답에 리아노 공작이 우리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쯧, 라이언하트 백작은 딸을 너무 오냐오냐 키우는 것 같소. 그리 잘못 가르쳤다가는 버릇 나빠지기 십상인데.”
던버르레 공작이 혀를 찼다.
그의 말대로 내 주장이 잘못된 건지도 몰랐다. 적어도 이 세계 속에서는 내가 틀린 걸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들의 가치관에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
입술을 질끈 깨물며 주먹을 꽉 말아 쥘 찰나, 커다란 손이 나를 단단히 잡았다.
이든 라이언하트였다.
“내 앞에서 세 치 혀를 잘못 놀린 자들이 어찌 됐는지 소문을 못 들었나 보군.”
“무어라?”
“난 그리 관대하지 않은 편이라 말이야. 정 그자들의 말로가 어땠을지 궁금하다면 말리지 않겠다만.”
서늘한 눈빛이 귀족들을 한차례 훑고 지나가자, 그들은 ‘크흠!’ 괜히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어색한 침묵이 지나갔다.
끝까지 자존심만큼은 지키고 싶었는지, 리아노 공작이 나섰다.
“특별히 리아노 가문에서 개발한 마법 고삐도 빌려주도록 하지.”
그제야 하나둘, 다른 귀족들도 낯빛을 바꾸며 거들기 시작했다.
“이거야 원. 리아노 가문의 마법 고삐까지 빌려준다면 누워서 마카롱 먹기가 되는 거 아니오?”
확실히 파격적인 제안이긴 했다.
리아노 가문에서 개발한 마법 고삐는 따로 판매하고 있지 않아 구할 수 없는 것이니까.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우리 라이언하트가를 향한 명백한 무시며 조롱이기도 했다.
“어쩌겠나, 영애는 아직 사리 분별이 어려운 어린아인데. 나라도 철없는 자식을 둔 자의 짐을 덜어 줘야 하지 않겠소?”
리아노 공작은 내게 선심 쓰듯이 고삐를 내밀었다.
‘속이 훤히 보이네.’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모습이 아랫사람에게 큰 은혜를 베푸는 윗사람처럼 비치길 원하는 것 같았다.
내가 그대로 당해 줄 것 같아?
“그런 거 필요 없써요.”
“후회할 터인데.”
리아노 공작이 보란 듯이 고삐를 놓자, 조금 전까지 가만히 있던 흑마가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히히히잉!
근육질의 말이 격렬히 움직일 때마다 나무판자가 부서져 나갔다.
콰직!
이어서 튼튼한 말뚝이 맥없이 꺾이는 광경이 펼쳐졌다.
“어이쿠!”
근처에 선 귀족들은 부서진 나무 파편들을 피해 도망가기 바빴다.
그대로 뒀다가는 얼마 가지 않아서 마구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을 것만 같았다.
……꿀꺽.
어마무시한 모습을 보니 저절로 목구멍 뒤로 마른침이 삼켜졌다.
들은 대로 힘이 장난 아니었다.
성질머리가 더럽기도 했고.
“무슨 수로 저리 날뛰는 짐승을 가라앉히겠다는 건지 모르겠군.”
흑마의 사나움을 충분히 보여 줬다고 생각한 리아노 공작은 다시금 마법 고삐를 힘주어 잡아당겼다.
파지직!
전기가 통하는 소리와 함께 흑마가 앞발을 높이 쳐들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히히히히힝!
그리고 정말 마법처럼 날뛰던 흑마가 잠잠해졌다.
“!”
“……빌어먹을…….”
욕지거리와 함께 맞잡고 있던 이든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건 진쨔…….”
고문이나 다름없잖아.
차마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효과가 확실하군요. 그 사납다는 녀석이 이리도 온순해지다니!”
“리아노 공작, 혹시 고삐를 판매할 생각은 없소? 내 명마를 얻기 위해서라면 얼마든 주리다!”
아무도 말의 고통에는 관심이 없었다.
아니, 애초에 잘못된 행동이라는 것을 인지조차 못 하는 듯했다.
열광하는 이들 틈에서 이든과 나만이 웃을 수가 없었다.
“실은 말이오. 이 고삐는 꼭 말에게만 쓰지 않아도 된다네.”
리아노 공작이 비밀을 말하는 사람처럼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자네들, 몬스터나 수인을 길들여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나?”
……뭐?
단언컨대 귀를 의심한 건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대체 인간은 어디까지 추악해질 수 있는 걸까.
“그 말, 진심입니까?”
늙은 여우의 눈동자는 악마처럼 돌변했고, 귀족들은 그에 현혹된 듯 귀를 기울였다.
“어떤 짐승이든 주인 앞에서 꼬리를 흔드는 개로 만들 수 있소. 마치 이 야생마처럼 말이오.”
그가 축 처진 꼬리를 흔드는 흑마의 등에 팔을 걸치며 으스댔다.
‘멍청한 놈들.’
뭣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말이 온순해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말이 꼬리를 흔드는 건, 상대에게 복종하기 싫다는 뜻이다.
또 다른 뜻으로는 공격의 의사이기도 했고.
―푸르르.
슬피 우는 흑마와 시선이 얽혔다.
어둠에 잠긴 검은 눈동자가 마치 내게 말을 거는 것만 같았다.
고통스럽다고.
이 지옥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그리 우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주먹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동물과 대화를 할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죽은 자와 소통이 가능하다면, 동물과도 가능하지 않을까?’
목에 걸린 엘코어를 내려다봤다.
그것을 통해 엘베른의 혼과 대화했던 것이 생각났다.
어쩌면 혹시…….
혹시 모르잖아.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엘코어를 손에 쥐었다.